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식현(息縣): 한 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후 3천년간 바뀌지 않은 지방

중은우시 2020. 10. 17. 23:18

글: 홍설(鴻說)

 

중국의 왕조는 빈번하게 교체되었고, 역대왕조의 통치자들은 취임할 때마다 통치하는 천하에 대거 개혁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마다 지명도 많게 혹은 적게 바뀌곤 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할 이 지명은 다른 곳과 달리 3천년의 역사에서 시종하여 같았고 변화가 없었다. 이 지명은 한 여자와 관련이 있다. 이름이 바뀌지 않은 것은 모두 그 미모가 뛰어났던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도시는 어디인가?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이 일어날 것이다: 중국은 미녀가 많이 나왔다. 중국의 사대미녀는 모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미녀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삼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그 여인에게는 어떤 독특한 점이 있었을까? 천년의 역사동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중국에서 '이름을 바꾸지 않은' 도시는 또 어디일까?

 

1. 도화부인(桃花夫人): 식규(息嬀)

 

그 여자의 이름은 '식규'이다. '식부인', '도화부인'이라고도 불린다. 식규는 진(陳)나라 완구(宛丘)에서 태어난다. 진장공(陳莊公)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딸이다. 식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했으며,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진장공의 가르침으로 식규는 건괵영웅의 기개를 지녔다. 비록 봉건시대에 살았지만, 재능이 뛰어나서, 책을 많이 읽었다. 용모와 지혜를 모두 가진 여자였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의 미모는 갈수록 숨기기 어려웠다. 정정옥립(亭亭玉立)의 식규는 이미 주변에 유명한 미녀였다. 당시 유명했던 '재녀스타'였다. 뛰어난 용모, 높은 학력은 식규의 빛나는 일생을 보장해주는 자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의 운명을 기구하게 만드는 화근이 된다. 이는 아마도 '자고홍안다박명(自古紅顔多薄命)'이라 할 것이다.

 

식규의 운명이 기구했던 것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고, 그로 인하여 3개국가간의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모는 인생의 화가 되었다.

 

2. 형부의 눈에 들어 죽어라 채(蔡)나라에서 도망쳐 나오다.

 

식규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녀의 형부인 채국(蔡國)의 채애후(蔡哀侯)는 도덕군자같았는데, 표리부동한 '거짓군자'일 줄은. 기원전684년, 식규는 식국(息國)의 국군인 식후(息侯)에게 출가한다. 당시에 식국으로 가려면 중간에 채국을 지나가야 했다. 식규의 언니는 채국의 국군인 채애후에게 시집가서 그의 처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채국을 지나가는 것은 별달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채애후는 식규의 요청을 받고, 당연히 승락한다. 그런데, 채애후가 승락한 것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기실, 채애후는 일찌감치 자신의 처제가 경국지색이라는 말을 들었고,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예교의 속박에 거리가 멀다보니, 채애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식규가 오는 기회를 갖게 되자 그는 자신의 추악한 계획을 시행하게 된다.

 

먼저, 그녀는 '형부'가 동생을 보살펴준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채국에 남게 한다. 식규의 미모를 본 후에 채애후는 깜짝 놀란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 수 있다니. 채애후는 정신을 못차리고, 세속의 예의도 있고, 식규에 대하여 불궤지사(不軌之事)를 꾸민다. 그러나 그가 생각지 못했던 것은 식규의 성격이 강인하고, 죽어라 반항하며, 그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식국으로 도망쳐 가버린다.

 

그렇다면 식국으로 도망쳐온 식규는 어떻게 되었을까?

 

3. 남편의 총애를 독점하고, 식후는 채국을 멸망시킨다.

 

일노충관위홍안(一怒冲冠爲紅顔). 봉건시대는 남권사회이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처를 엿본다면, 그것은 남자로서 크나큰 모욕이다. 평민백성이라도 참을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국군이면 더더욱 용인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식규는 식후의 성격을 알았고, 대국을 고려하여, 그녀는 채국에서 있었던 일을 계속 말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두 나라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후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숨긴다고 하여 화를 피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피할 수 없다.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은 없다. 식규가 고의로 감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입을 다 막을 수는 없다. 식후도 결국 그 일을 알게 된다. 식후가 어찌 채애후가 저지른 그런 황당한 일을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의 시대에 청백은 여자에게 생명보다 고귀한 존재였다. 만일 절개를 잃는다면, 실로 식국의 국민을 대한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다. 식후는 분통이 터져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맹세한다.

 

나중에 식후는 초국(楚國)의 야심을 이용하여 계책을 올린다. 그리고 초국과 연합하여, 채국을 멸망시킨다. 그리고 채애후를 포로로 잡아, 식후로서는 치욕을 갚은 셈이 되었고, 식규의 원한도 풀어준 셈이 되었다. 

 

식후는 식규에게 한마음이었고, 두 사람은 혼인후에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렇다면, 식후가 채국을 멸망시킨 후, 그는 식규와 백년해로 했을까?

 

사실상 누구도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었다. 원래는 그들의 애정은 백년해로 해야 했지만, 그때는 전란의 시대이다. 선종하기는 쉽지 않았다.

 

4. 식규는 자신의 몸을 내놓아 나라를 구한다.

 

680년, 식후와 식규의 상황을 바꾸는 큰 일이 일어난다. 채애후가 망국의 한을 품고, 식후에 대한 원한까지 얹어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식후를 무너뜨릴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채애후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낸다: 식규부인을 통하여 초국과 식국간의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당연히 제왕은 강산과 미녀를 좋아한다. 초문왕(楚文王)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문왕은 야심이 컸고, 소국을 병합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싶어했다. 채애후는 초문왕의 앞에서 식규부인의 미모를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그녀는 선녀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국군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자연히 천하의 모든 기진이보, 미인재녀를 갖고 싶어진다. 초문왕은 채애후의 말을 들은 후, 욕심이 생긴다. 채애후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진다.

 

이어서, 초문왕은 순유(巡遊)한다는 명목으로 식국으로 가서 식규를 만나본 후, 깜짝 놀란다. 한번 쳐다본 것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뛰다니. 식규를 얻기 위하여, 초문왕은 식후를 포로로 잡고 식국을 멸망시킨다. 채애후는 머리를 쓰지 못했지만, 초문왕의 이 수법은 가히 천의무봉이라 할 만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식규는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남편 식후와 식국의 백성들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비통에 빠져있던 식규는 냉정을 되찾고, 초문왕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식국의 백성과 식후를 구하기로 한 것이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귀족에서 계하수(階下囚)로 전락한다. 한 명은 다른 나라의 비빈이 되고, 한 명은 문을 지키는 병사가 된다. 이렇게 이별하게 된 것은 식규부부의 최대 비극이다. 원래 구차하지만 약간의 안정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초문왕 동생이 그녀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형수로서 식규는 도덕적인 선이 확실했다. 다만 그 시동생은 계속 그녀를 괴롭혔고, 식규는 초국의 후궁에서 여리박빙(如履薄氷)하게 된다.

 

계속 피하고 고의로 침묵하는 중에 식규는 모든 희망을 포기한다. 그녀는 마치 행시주육(行屍走肉)처럼 세상을 살았다. 생존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그녀를 지탱하는 유일한 동력은 만나지 못하고 있는 식후를 만나보는 것이었다. 식규는 견정강렬(堅貞剛烈)했다. 그후 3년동안, 식규는 초문왕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고, 총애란 총애는 다 받지만, 식규는 즐겁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우울해진다. 3년동안 그녀는 먼저 초문왕과 말을 하지도 않았고, 우울해했으며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면 식규는 식후를 다시 만났을까?

 

5. 다시 만나서, 식규는 죽음으로 뜻을 보인다.

 

나중에 식규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남편을 만난다. 그러자 방성대곡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구차하게 살아온 목적은 바로 살아있을 때 식후를 다시 만나기 위함이었다. 이제 바램을 이루었으니 가도 되겠다." 말을 마치자 벽에 머리를 부딛쳐 자결한다. 식후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죽은 것을 보고 비통해하면서 자신도 자결한다.

 

초문왕은 그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양해한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자신의 존엄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식후 식규의 진정한 사랑에 감동받는다. 그리하여 그들 둘을 한양성(漢陽城) 바깥의 도화산(桃花山)에 합장해준다.

 

지금 하남성 동남부의 서쪽에서는 식규를 후세인들이 '도화부인'으로 존칭한다. 도화부인은 이미 죽었지만, 그녀의 이미지, 정신은 천고에 전해지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이백은 일찌기 <망부석>에서 이렇게 식규를 묘사했다.

 

방불고용의(彷佛古容儀)

함수대서휘(含愁帶曙輝)

노여금일루(露如今日淚)

대사석년의(臺似昔年衣)

 

식규는 여러 문인묵객들의 찬상을 받았고, 진정한 '애국부인'으로 일컬어진다.

 

천년동안 식규를 찬양하는 시가는 끊이지 않는다. 식현은 바로 식규의 사적때문에 지금까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식현의 이름이 한번도 바뀐 적은 없지만, 식현의 경제, 문화는 계속 발전하고 완비되어 갔다. 

 

전란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아름다운 사랑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명을 바꾸지 않은 것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현재의 평화로운 생활을 귀하게 여겨라. 식규의 미모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늙어갈 수 있어도, 그녀의 정신은 시간이 흐른다고 담화(淡化)되지 않는다. 한 여자가 혼자의 힘으로 역사의 강물에 영원이 이름을 남길 수 있고, 기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탄복스러운 일이다. 세간에 아름다운 여자는 많고 만다. 그러나 식규같은 여자는 실로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여하한 시대이건 대공무사(大公無私), 심명대의(深明大義)한 사람을 존경하고, 이기적이고 간사한 사람은 버림받는다. 삼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식규부인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식현을 가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