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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바둑역사(3): 바둑이 크게 발전한 양한삼국(兩漢三國)시대

by 중은우시 2022. 3. 4.

글: 설극교(薛克翹)

 

천하제일명수

 

한나라때 바둑의 발전은 비교적 완만했다. 현재 사적에 나타나는 고수는 모두 서한시기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서한시대에 사람들이 두릉인(杜陵人)이라고 부르는 두부자(杜夫子)는 "천하제일명수(天下第一名手)"였다. 그는 바둑실력이 아주 뛰어나고, 바둑을 목숨처럼 좋아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바둑을 두느라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조롱했는데, 그는 예상외로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바둑의 도리에 정통하다. 이것으로 공자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다." 봉건시대의 사대부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는 확실히 바둑을 하나의 예술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가경전에서 배울 수 있는 학문으로 연구할 수 없는. 이를 보면, 그는 담량이 있는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한때, 바둑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는 유거(劉去)와 진축(陳逐)이 있다. 진축은 한선제(漢宣帝)와 바둑을 두면서 천자의 환심을 샀고, 나중에 이로 인하여 태원태수(太原太守)의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한나라때는 궁안에서도 바둑이 성행했다. <서경잡기(西京雜記)>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팔월 사일에 척부인(戚夫人)이 한고조 유방과 바둑을 두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팔월 사일에 궁안에서 바둑을 두는 것이 한나라궁중의 풍속이 되었다. 진(晋)나라때 사람인 간보(干寶)는 그의 <수신기(搜神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바둑을 이기면 평생 복을 얻고, 이 바둑을 지면 질병재난을 당한다고 한다. 만일 재난을 면하려면 머리카락 한오라기를 뽑아서, 북극성을 향해 장수를 빌면 된다고 하여, 이 풍속에 신비로운 색채를 더했다. 어찌 되었건 한나라때 조야에서 모두 바둑을 두었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속이기를 잘하는 조조는 바둑도 잘 두었다.

 

바둑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는 국면을 형성하고, 많은 우수한 기사들이 나타난다.

 

조조는 삼국시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정치가, 군사가로 모략과 계책에 뛰어났다. <삼국지.태조기>를 보면, 조조의 바둑실력은 약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위나라의 저명한 기사인 산자도(山子道), 왕구진(王九眞), 곽개(郭凱)등과 모두 두어본 적이 있다. 바둑실력이 이들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수가 될 수 있었고,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삼국지>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공계(孔桂)도 바둑실력이 아주 강했는데, 누가 그를 조조에게 추천한다. 조조는 그가 바둑을 잘 둔다는 것을 알고 아주 기뻐했다. 그후 공계는 조조의 좌우에 항상 머물고 그를 따라다녔다.

 

위나라에 또 한명의 대기사가 있는데 바로 건안칠자(建安七子)중 하나인 왕찬(王粲)이다. 한번은 왕찬이 다른 사람들의 바둑을 구경하고 있는데, 바둑판이 어지러웠다. 왕찬은 기억에 의존하여 원래의 바둑을 다시 한번 놓아본다. 바둑을 두던 사람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들은 천으로 바둑판을 가리고서, 왕찬에게 똑같이 놓아보라고 한다. 왕찬은 다시 한번 혼전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바둑을 똑같이 놓는다. 바둑을 두던 사람들이 천을 벗기자 두 바둑판은 완전히 똑같았다. 왕찬은 이로 인하여 <혁단평>에서 "혁중신인(弈中神人)"으로 불린다.

 

바둑은 위나라에서 정치적음모를 가리는데도 쓰였다.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다. 이 일은 조씨(曹氏)문중에서 발생했다. 조조의 셋째아들 조창(曹彰)은 용맹하고 전투를 잘 했다. 군대를 따라 북벌할 때, 혼자서 백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적을 추격한 적이 있었다. 조조는 기뻐하며 말했다: "내 아들이 정말 쓸모있는 인재이구나." 나중에, 조비(曹丕)가 황제에 오르고, 용맹한 동생에 대하여 경계심이 있었다.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하루는 조비가 조창을 변태후(卞太后)의 궁안으로 불러 바둑을 두었다. 형제 둘은 바둑을 두면서 대추를 먹었다. 형제간의 우애가 좋아 보였다. 기실 조비는 일찌감치 대추에 독을 넣어두었고, 자신은 독을 넣지 않은 것만 골라먹었다. 조창은 전혀 모르고 아무것이나 집어먹었다. 결국 조창은 중독된다. 변태후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급히 사람을 시켜 물을 한바가지 가져오도록 한다. 그러나 조비는 미리 사람을 시켜 바가지를 깨버리게 한다. 일시에 변태후의 궁중은 혼란에 빠진다. 변태후는 아끼는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맨발로 우물가로 달려갔지만, 물을 길을 수가 없었다. 조창은 결국 변태후의 품안에서 목숨을 잃는다. 흑백이 분명한 바둑판위에는 그가 흘린 선혈이 묻어 있었다.

 

"일등명암복오도(一燈明暗復吳圖)"

 

삼국때 촉나라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유명한 기사들은 그래도 있었다. <삼국지. 비위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비위는 바둑을 아주 좋아했다. 후주 연희칠년, 위나라가 대거 촉을 침입한다. 비위는 병력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당시, 현세가 아주 긴장되고, 적의 대군이 변경으로 밀려왔다. 촉군은 언제든지 패배할 처지에 놓였다. 비위는 그러나 담담하게 지휘하며 군장에 앉아 있었다. 광록대부 내민(來敏)과 바둑을 두는데만 마음을 집중하는 대장의 풍도를 보인다. 이 전쟁을 지휘하면서 비위는 자주 바둑을 두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전쟁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나라에서, 바둑이 유행한 정도는 위나라에 못지 않았다. 심지어 "기성(棋聖)" "혁성(弈聖)"까지 출현한다.

 

엄자경(嚴子卿), 마수명(馬綏明)은 오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이고 이들은 "기성", "혁성"으로 존칭된다. 당시 천하무적이라 할 만했다. 둘을 비교하자면 엄자경의 기력이 조금 더 강했다. <오록(吳錄)>에 따르면, 엄자경의 이름은 엄무(嚴武)인데, 당시 기사들중에 그의 적수가 없었다. 그는 서예가 황상(皇象), 화가 대불흥(戴不興)등과 함게 오나라의 "팔절(八絶)"중 한명으로 불렸다.

 

오나라의 상류층인물들 가운에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손책, 여범, 제갈근, 육손등이 모두 바둑을 좋아했다.

 

<삼국지.여범전>에는 이런 이야기도 실려 있다. 여범이 산월을 공격하고 돌아와서 손책에게 전투보고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손책은 여범이 서서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같이 바둑을 두면서 전쟁보고를 들었다.

 

제갈근과 육손 두 사람은 모두 바둑을 좋아하는데 한 사람은 성격이 급하고 한 사람은 성격이 느긋했다. 성격차이가 컸다. <삼국지.육손전>의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 가락오년에,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양양을 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사정이 누설되어 형세가 심각해진다. 제갈근은 약간 긴장하여, 불안해 했고, 바둑둘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육손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바둑을 두었다. 

 

바둑은 오나라에서 유행했고, 이는 손권의 아들 손화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막료인 채영(蔡潁)등이 모두 바둑을 좋아했고, 바둑을 두느라고 공무를 게을리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손화는 특별히 위요(韋曜)라는 문인을 불러 그로 하여금 <박혁론(博弈論)>을 쓰게 하여, 바둑을 두느라 공무를 게을리한 자들을 비난하게 했다. 글에는 이러헤 적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공자, 맹자의 도리는 공부하지 않고, 바둑을 두기를 좋아하여, 사업을 망가뜨렸다. 바둑을 두면서 자웅을 겨룰 때는 온갖 머리를 짜내야 하며, 심지어 밤을 새워야 한다. 그리하여 심신이 피로해지고, 업무는 내팽개치고, 손님도 제대로 접대하지 않는다. 비록 좋은 음식이 있고, 우아한 음악이 있더라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이는 손오의 치군지도와 맞지 않는다. 또한 공맹의 사람으로서의 도리에도 맞지 않는다.

 

바둑이 이 정도로 유행하자, 유명한 기사들도 갈수록 많아진다. 그리고 재미있는 대국도 이어서 나타난다. 이후, 좋은 대국은 점점 사람들이 수집하여 책으로 만들게 되고, 후대에 전해진다. 수,당이전의 돈황에서 나온 <기경>에는 두번에 걸쳐 "오도이십사반(吳圖二十四盤)"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오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기보이다. 후대의 대시인 두목(杜牧)의 시에서는 "일등명암복오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오나라때의 기보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응차공피(應此攻彼)

 

앞에서 이미 양한, 삼국시대에 사회의 명사들 중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언급했다. 그들의 바둑에 대한 조예도 아주 깊었다. 게다가 그들의 학식과 사회적 지위로 그들은 바둑에 대한 논술이 깊이있고, 게통적이고 전면적이었다. 춘추, 전국시대와 비교하여 큰 발전이 있었다. 이 기간동안 일부 바둑에 관한 서적이 나온다.

 

동한의 저명한 사학자, 문학가인 반고(班固)는 <혁지(弈旨)>라는 글을 쓴다. 일부 단락은 <예문영취(藝文英聚)>, <고문원(古文苑)>과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바둑이론글이다. 반고는 바둑에 대하여 세밀하고 깊이있는 논술을 남겼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좋은 기사는 웅재대략이 있어야 하고 소진, 장의같은 모습을 띄어, 자신을 튼튼히 하면서 넓힌다. 그래야 적이 두려워한다. 그리고 전체국면관념이 있어야하며, 계획은 주도면밀해야 하며 '하우가 치수할 때의 모습을 띄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구멍이 생기면 전체가 무너져셔 힘을 쓸 수 없다. 대국때 작자는 성동격서, 응차격피의 전술을 제기한다. "조귀(曹劌)의 위세로, 매복하여 속이면서 실제로는 포위하여 횡행한다" "전단(田單)의 기발함으로  패를 만들어 실리를 보상받는다" 자신의 바둑이 약할 대는 수비를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야 "과실이 있지만, 강함과 약함을 헤라려서 귀를 지키고 변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보완하면 패배하더라도 망하지는 않는다"

 

반고의 제자인 마융은 <위기부>를 썼다. 내용은 <혁지>보다 더욱 풍부하다. 바둑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다. 당시 마융의 명성은 아주 높았고, 제자가 천명에 이른다. 조정의 중요관리 마일제(馬日碲), 노식(盧植), 경학대가 정현(鄭玄)이 모두 그의 제자이다. 그의 바둑에 대한 견해는 널리 호평을 받는다. 

 

마융은 이렇게 말한다. 바둑의 승부책략은 머리카락처럼 세밀해야 한다. 흑백 쌍방의 포석은 마처럼 복잡다단하다. 그는 공수에는 각각 법칙이 있다고 보았다. 수비는 견고해야 하고, 공격은 앞뒤로 호응해야 하고, 아래 위로 연락해야 하며 '당돌'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적군이 내 집안으로 깊이 쳐들어오고 실리를 빼앗기게 된다. 자신의 돌은 아래 위로 끊어지는 상태가 되고 사방이 막히며, 포위도 하지 못하여, 곤란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건 위험하다.

 

마융과 동시대의 이우도 바둑에 관한 짧은 글 <위기명>을 쓴다. 짧은 32자짜리 글이지만, 바둑에 관하여 생동감있게 묘사했다.

 

"시인유억(詩人幽憶), 감물즉환(感物則患)

망지공한(忘之空閒), 완농유의(玩弄遊意)

국위헌구(局爲憲矩), 기법음양(棋法陰陽)

도위경위(道爲經緯), 방착열장(方錯列張)"

 

기리에 정통한 황헌(黃憲)은 일찌기 <기론(機論)>을 썼다. 이는 바둑의 허실형세를 논한 글이다. 그가 말하는 "기(機)"는 바로 우리가 현재 말하는 포석이다. 그때 황헌은 이미 말했다. 포석은 허실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석이 좋으면 나아가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서면 방어할 수 있다. 그래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이 이론은 중국의 바둑포석전략사상에 기초가 된다.

 

"건안칠자"중 응양도 바둑에 대한 책을 쓴 바 있다. 그의 <혁세>는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왔다. 글에서 바둑에서 싸울 때의 득실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데, 견해가 뛰어나다.

 

한,위,삼국시기에 바둑에 반대하는 주장도 나온다. 이런 주장은 대부분 공자,맹자의 편견에서 나왔다. 서한때 가의(賈誼)는 이렇게 말했다: "실례미풍(失禮迷風), 위기시야(圍棋是也)"(예를 잃게 만들고 풍속을 흐트리는 것이 바둑이다). 그는 봉건등급제도와 제왕의 존엄은 신성불가침하다고 보고, 봉건예의는 치국안민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당시 바둑이 성행하면서 위로는 군왕대신부터 아래로는 평민백성까지 모두 바둑에 빠져 있고, 바둑을 두게 되면 존비를 잊고, 예를 잃는다. 그리하여 그는 바둑은 풍속을 해치는 것이니 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서한의 유안(劉安)은 <회남자>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바둑을 두는 것은 시간낭비이다. 만일 바둑두는 시간에 독서를 하고 학문에 정진한다면 "더 널리 이름을 날릴 것이다."

 

바둑 자체의 매력으로 적당히만 둔다면, 시간낭비가 아닐 뿐아니라, 오히려 지력을 계발할 수 있고, 사고를 가다듬을 수 있다. 또한 사람들간의 정감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바둑에 반대하는 주장들은 그다지 힘을 얻지 못한다.

 

십구로의 바둑판이 세상에 나오다.

 

바둑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면이다: 하나는 바둑기술의 제고이고, 다른 하나는 바둑판의 개량이다. 둘은 서로 관련이 있다. 바둑기술이 제고되려면 바둑판이 개량되어야 한다. 바둑판이 개량된 후, 바둑기술은 더욱 높아질 것을 요구받게 된다. 

 

바둑의 종홍 16로의 선의 바둑판이 상당히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다. 한,위,삼국때, 바둑은 발전추세를 보이면서, 바둑고수들은 아마도 16로 바둑판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같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19로바둑판, 361점의 바둑판이 언제 출현했는지에 대하여 아직까지 정설은 없다.

 

<손자산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금유기국방십구도(今有棋局方十九道), 문용기기하(問用棋幾何) 답왈(答曰): 삼백육심일(三百六十一)" 문제는 <손자산경>이 언제 만들어 졌느냐이다. 역대이래로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청나라때의 주이존은 춘추시대 손무의 저작이라고 본다. 청나라때 완원은 그러나 주나라떄의 저작이라고 본다. 다만, <한서.예문지>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수서.경적지>에 비로소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양진남북조시기의 저작으로 본다. 근대에 다시 고증을 통해서, 동한시기작품이라고 보는 견해가 나왔다. 만일 그러하다면, 동한시기의 바둑판은 이미 19로였던 것이다.

 

동한때의 사람 마융, 채홍의 <위기부>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기추(棋錐)", "오악(五岳)". 이런 배치를 가지고 분석해보면, 19로일 대 이런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361개점의 바둑판일 경우에 형성된다. 이는 다시 한번 19로바둑판이 동한시기에 나왔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나, 삼국시대 위나라의 한단순(邯鄲淳)의 <예경(藝經)>을 보면, "기국종횡각십육도(棋局縱橫各十六道), 백흑기각오십매(白黑棋各五十枚)"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신장 투루판 아스타나촌의 고묘에서, 사람들은 초당대의 채색위기사녀도를 발견했는데, 그림속의 바둑판은 16로이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는 저명한 <손책조여범혁기국면>의 진위문제가 있다. 이 기국은 이일민(李逸民)이 편찬한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에 실려 있다. 여러 해동안 영향력이 아주 컸다. 다만 이 바둑은 종횡19로의 바둑판에서 전개되었다. 삼국시기 한단순의 기록과 서로 다르다. 청나라때 사람 전대흔(錢大昕)떄부터 진실성에 의문을 표시하기 시작한다. 그후 백여년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보이다.

 

우리는 바둑판의 변화는 아주 오랜 기간을 거쳐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다. 특히 이런 변화가 모든 기사들에 의하여 인정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형식은 항상 일부에서 시작해서 전면적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완비된다. 옛형식도 하루아침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추론해볼 수 있다. 종횡19로바둑판은 가장 먼저 동한시기에 나타나서, 수당때 완성된다. 그리고 종횡16로의 바둑판은 초당에 이러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는 유행하고 있었다. 만일 이런 추론이 사실이라면, <손책조여범혁기국면>의 진위도 가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둑판이 19로 361점으로 변화한 것은 바둑발전사상 비약적인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