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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바둑역사(2): 바둑고수가 출현하는 춘추전국시대

by 중은우시 2022. 3. 3.

글: 설극교(薛克翹)

 

비조 혁추

 

바둑이 중국의 사적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재는 춘추시기이다. 지금까지 2천6,7백년의 역사가 있다.

혁추(弈秋)는 중국사적에 등장하는 첫번째 기사이다. 그는 "나라에서 바둑을 잘 두는 자(通國之善弈者)". 그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맹자>이다. 이를 가지고 추측해보면, 혁추는 맹자와 동시대의 인물이거나 약간 빠른 시기의 사람으로 개략 전국시대 초기에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혁추는 당시 제후열국에서 모두 알고 있던 국수(國手)였다. 바둑실력이 뛰어나서, <혁단평(弈旦評)>에서는 그를 "국기(國棋)의 비조(鼻祖)"이다.

혁추는 바둑실력이 뛰어나서,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했다. 혁추는 두 제자를 거두는데, 한 학생은 성실하게 바둑을 배우고, 선생의 말을 잘 듣고 열심히 했다. 또 다른 학생은 그저 혁추의 명성에 기대려는 자로 비록 제자로 들어왔지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혁추가 바둑을 강의할 때도 그는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어서, 계속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홍곡이 언제나 다시 날아올까를 생각하며, 날아오면 활로 쏘아서 잡아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두 학생은 함께 바둑을 배웠지만, 한명은 성취를 얻었고, 다른 한명은 바둑의 오묘함을 깨치지 못했다.

 

바둑을 배우려면 집중해야 하고, 바둑을 둘 때도 마찬가지이다. 설사 혁추와 같은 대단한 스승을 모시고 있더라도, 마음을 흐트려서는 안된다. 하루는 혁추가 바둑을 두고 있는데, 피리를 부는 사람이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유장한 피리소리는 마치 구름위에서 나는 것같았다. 혁추는 일시에 마음이 흐트러지고 피리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때는 바로 바둑의 승부를 결정짓는 승부처였다. 그때 피리소리가 돌연 멈추면서, 혁추에게 바둑의 도리를 가르쳐달라고 말한다. 혁추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를 몰랐다. 혁추가 바둑의 비결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의 집중력이 이때는 이미 바둑에 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사서에 쓰여 있다. 사람들이 이것을 기록한 것은 아마도 후인들에게 집중하여 열심히 두는 것이 바둑을 잘 두는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일 것이다.

 

혁추와 같은 고수가 나타난 것을 보면 당시 바둑이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혁추와 같은 국수가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혁추는 운이 좋았다. 춘추전국시대는 오백년간 지속되는데, 그는 기사로서 이름을 남긴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기사이기도 하다.

 

거기부정부득승(擧棋不定不得勝): 바둑돌을 들고 어디둘지 몰라서 결정내리지 못하면 바둑을 이길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여러 바둑고수들이 나타났을 뿐아니라, 제자백가의 주의도 끌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에서 노예사회가 해체되고, 봉건사회가 확립되는 때이다. 제자백가는 각자의 학설을 주장하면서 도처에 유세를 다녔다. 그리하여 백가쟁명의 국면이 형성된다. 이미 아주 유행하고 있던 바둑이 제자백가들의 말에 나오게 된다. 어떤 때는 좋은 뜻으로 어떤 때는 나쁜 뜻으로. 혹은 바둑을 예로 들고, 혹은 직접 바둑을 얘기한다. 그중에는 가치있는 말들도 적지 않다. 바둑의 이론이 초보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바둑의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사대부계층은 처음에 바둑을 멸시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둑을 두는 것은 하루종일 배부르게 먹고 마음을 쏟을 곳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현인이나 대가가 될 수 없는 자이다. 그는 바둑을 무료하게 시간보내는 것으로 여겼다. 그의 이런 견해는 영향력이 컸다. 이후 사람들 중에서 바둑을 공격할 때면 이와 유사한 말을 하곤 한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는 같은 견해를 가진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했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부모가 길러준 은혜도 잊고, 효도를 다하지 않는다" 그는 바둑을 두는 것을 다섯가지 불효(五不孝)중 하나로 본다. 공자와 다른 점이라면, 그는 바둑을 '마음을 쏟을 곳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것과는 다른 입장을 보인다. <맹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바둑을 배울 때 만일 자신이 자리를 잡고 상대방을 이기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바둑의 정수를 깨달을 수 없다"

 

여기에서 맹자는 바둑은 심오한 예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반드시 마음을 집중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했을 뿐아니라, 동시에 이런 심오함은 학습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다. 당시에 이런 견해를 제기한 것은 의미가 적지 않다.

 

이후 바둑의 지위는 점점 올라간다. <관윤자(關尹子)>에는 이렇게 썼다; "활쏘기, 수레몰기, 금(琴)을 타기, 바둑을 배우기중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배울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바둑은 이때 이미 활쏘기, 수레몰기, 금타기와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바둑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바둑두는 규칙도 점점 정리되기 시작한다. <윤문자(尹文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장기,바둑처럼 지력으로 승리를 취하는 게임은 진(進)과 퇴(退), 취(取)와 사(捨), 공(攻)과 수(守), 종(縱)과 수(收), 주도권이 모두 나에게 있다"

 

당시의 역사조건하에서, 윤문자가 주도권문제를 언급한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주도권은 바둑실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에 이르러, 시종 국면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바둑애호가라면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것이다.

 

"거기부정"은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다. 한 사람이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형용한다. 이 성어는 바둑과 관련있다. 가장 먼저 이 말이 나온 것은 <좌전>에서 태숙문자(太叔文子)의 말이다:

 

"바둑을 두면서 바둑돌을 들고 어디 놓을지 결정을 못하면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下圍棋而擧棋不定, 不能戰勝對方)"

태숙문자는 바둑을 두면서 중요한 경험을 이렇게 정리했다. 즉, 주도면밀하게 생각한 다음에 과감하게 돌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망설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반드시 진다는 것이다. "거기부정"의 네 글자는 아주 간결하며, 생동감있고, 이미지가 떠오르며 정확하다. 이 말은 바둑과 함께 전해져 내려왔고, 바둑을 넘어서서 일상생활의 용어로 되었다.

 

태숙문자의 견해도 영향이 컸다. 한나라때 마융의 <위기부>와 응양(應揚)의 <혁세(弈勢)>, 명나라때 장의(張擬, 일명 張靖)의 <기경(棋經)>은 모두 이를 언급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렇게 정교한 바둑이론이 나오고, 혁추와 같은 바둑고수가 나옸다. 이는 바둑발전사상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둑의 발전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