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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바둑역사(1): 바둑의 기원에 관한 여러가지 설

by 중은우시 2022. 3. 2.

글: 설극교(薛克翹)

 

요순(堯舜)이 바둑으로 아들을 가르쳤다.

 

금기서화(琴棋書畵)는 중국고대의 4대예술이며,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

금기서화중의 기(棋)는 바로 바둑을 가리키는 것이다.

진(晋)나라때 인물인 장화(張華)는 그가 쓴 <박물지(博物誌)>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요(堯)는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고 말했고, 또한 순(舜)은 아들 상균(商均)이 충분히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찌기 바둑을 만들어 아들을 가르쳤다고도 하였다.

<노사후기(路史後記)>에는 더욱 상세하게 적혀 있다. 요는 처 부의씨(富宜氏)를 취하고 아들 주(朱)를 낳았고, 아들의 행위가 좋지않아, 요는 아주 힘들어 했고, 특별히 바둑을 만들어, '이한기정(以閒其情)'하였다.

이 글에 따르면, 바둑을 만든 것은 지혜를 개발하고, 성격을 순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도 있다. 거기에 따르면 "하(夏)나라때 사람 오조(烏曹)가 도박으로 바둑을 만들었다."(<잠확류서(潛確類書)>"

당나라때 사람 피일휴(皮日休)는 그의 <원혁(原弈)>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둑은 전국(戰國)시대에 태어났으며 종횡가(縱橫家)들이 만들었다. 그의 근거는 바둑은 "유해사쟁위지도(有害詐爭僞之道, 해치고 속이고 거짓을 다투는 것)"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바둑은 그저 놀고 즐기기 위한 것이며 권모술수를 쓰는 도구라는 것이다.

 

기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그저 추측일 뿐이다. 요순이라는 설은 단지 아름답게 만들어낸 전설일 뿐이다. 오조는 <고사고(古史考)>에서 벽돌을 만든 선조라고 되어 있다. 바둑을 만들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다른 증거가 없다. 피일휴가 제기한 바둑이 전국시대에 기원한다는 것은 더더욱 믿을 바가 못된다. 일찌기 춘추시기에 공자는 이미 바둑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일종의 추측이다.

 

감숙(甘肅) 수창현(水昌縣) 원앙지(鴛鴦池)에서 출토된 원시사회말기의 도관(陶罐)에는 흑색, 홍색 심지어 채색의 무늬가 그려져 있고, 선이 균일하며, 종횡이 교차하고, 격자형으로 그려져 있다. 형상은 현재의 바둑판과 유사하다. 다만 종횡의 선은 단지 10개 혹은 12개일 뿐이다. 현재의 19개가 아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도관의 무늬를 '기반문도안(棋盤紋圖案)'이라고 부른다. 

 

호남성 상음현(湘陰縣)에서 출토된 당나라때의 고묘에서 나온 부장품에는 바둑판 1개가 나왔는데 정방형으로 종횡 각 15개의 선이 있다.

 

내몽골에서 발굴된 요나라때의 고묘에는 바둑탁자가 나왔는데, 높이는 10센티미터, 변의 길이는 40센티미터, 탁자의 위에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30센티미터인 바둑판이 그려져 있다. 바둑판에는 종횡으로 각각 13개의 줄이 있으며 흑돌 71개가 놓여져 있고, 백돌 73개가 놓여져 있다. 모두 144개이다. 그외에 흑돌 8개, 백돌 3개는 그냥 놓여져 있다. 묘주인이 생전에 바둑을 좋아했던 것같고, 두던 바둑을 그대로 남겨놓고, 구천에서도 연구하려고 가져간 것같다.

 

이것은 단지 여러 고고학적 신발견에서의 몇 건의 문화재이다. 다만 충분히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설명한다: 첫째, 의심의 여지없이 바둑은 원시사회에 이미 원형이 갖추어져 있었다. 종횡이 교차하는 바둑의 모양은 이미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

 

둘째, 출토된 바둑판은 10줄, 13줄, 15줄이고....지금 통용되는 19줄까지의 발전과정을 보면, 바둑은 어느 한 사람이 어느 날 돌연 만들어낸 기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바둑돌은 적은 것에서 많은 것으로, 두는 방식은 단일한 것에서 다양한 것으로 발전변화했다. 그리고 시간은 수천년에 걸쳐 있다. 무수한 바둑애호가들의 지혜와 경험을 모은 것이고,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최종적으로 지금의 이런 규모로 발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둑의 창조자는 광대한 군중이다. 

 

전쟁이 빈번하므로, 군사학지식이 점점 축적되었다. 바둑을 두는 것은 군사상의 전략을 세우는 것과 병력을 보내고 장수를 보내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 전쟁의 필요는 바둑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양한때 이미 누군가 바둑을 병법으로 보았다. <수서.경적지(經籍誌)>에는 기보(棋譜)가 병서(兵書)에 수록되어 있다.

 

바둑의 고향은 중국이다.

 

위에서의 추단과 고고학적인 발견을 보면 바둑이 언제 탄생했는지는 이미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되었다. 다만, 일본의 마츠이 아키오(松井明夫) 선생은 그의 <바둑삼백년사>의 "발단"이라는 편에 이렇게 썼다: "바둑과 장기는 공통된 조상이 있다. 즉 중앙아시아의 일종의 '반희(盤戱)'이다. 그것은 서방에 전해져서 서양체스가 되었고, 동방에 전해져서 중국천문과 기타과학의 영향을 받아 16줄의 바둑으로 개량되었다."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좌전>, <논어>, <맹자>등의 책에서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바둑은 중국의 춘추, 전국시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심지어 제후열국에서 모두 바둑고수가 출현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그 때, 중국과 서역각국은 아직 교류가 없었다. 서한시기에 비로소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가고, 중국은 비로소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문화를 교류했다. 그리고 그 때, 바둑은 중국에서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혁(弈)에서 바둑으로

 

현대인들이 "혁(弈)"이라고 부를 때는 바둑, 장기, 군기(軍棋)를 합쳐서 부르는 것이다. 최초에 혁은 바둑만을 가리켰다. 동한의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弈), 위기야(圍棋也). 종기(從丌), 역성(亦聲)"

혁은 바둑이다. 기에서 따왔으며 소리는 역이다.

 

기(丌)는 고대문자에서 두 사람이 손을 들고 대국을 하는 모습의 상형문자이다.

 

혁이 바둑이라는 것은 <논어>, <좌전>에도 나오고, <맹자>에도 언급된다.

 

위기(圍棋)라는 말은 발전해서 나온 말이다. 서한말기 양웅(楊雄)은 <방언(方言)>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기를 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관(동관)의 동쪽이다. 제로(齊魯)의 땅(지금의 산동성일대)에서는 모두 혁이라고 부른다"

 

이를 보면, 서한때 혁은 이미 위기의 별칭이 되었고, 여전히 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북방의 일부지역이었다.

동한에 이르러, 위기는 서면어로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마융(馬融)이 쓴 <위기부(圍棋賦)>, 이우(李尤)가 쓴 <위기명(圍棋銘)>등이 있다. 

 

바둑의 발전과정에서 "혁"과 "위기"외에 여러 재미있는 명칭들이 있다. 진나라대, 어떤 사람은 바둑을 "좌은(坐隱)"과 "수담(手談)"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결국 바둑의 두는 방식을 표현하는 위(圍)자는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