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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포수경(蒲壽庚): 송원교체기의 아랍계 부호

by 중은우시 2020. 12. 1.

글: 하신(何新)

 

중국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각종 원인으로(주로 사신(史臣)이 무지하거나, 혹은 유가적인 이데올로기로 편견을 가져서), 정사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역사의 그림자 속에 매몰되어 버렸다. 남송말, 원초에 한 아랍계통의 상인이 있었다(아마도 유태인일 수도 있다. 당시 유태인과 아랍인을 중국인들은 혼동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포수경이다.

 

포수경(1205-1290). 일명 포수경(蒲受畊), 호는 해운(海雲)이다. 출신은 불명인데, 고조우(顧祖禹)에 따르면 그의 부자는 서역에서 왔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선조가 점성(占城, 지금의 월남)의 서역 아랍인의 후예라고 한다. 

남송시기, 육상비단길은 이미 막혔고, 중국과 아랍의 교역은 해운을 위주로 바뀌었다. 남송중후기, 천주항(泉州港)은 날로번성하여, 광주항을 추월했다.

송영종 가정10년(1217년), 포수경의 부친 포개종(蒲開宗)은 광주에서 천주로 이주하여, 천주 후제항(後諸港)에 가까운 법석향(法石鄕) 운록촌(雲麓村)에 정착한다. 향료운송판매에 종사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해상무역에 종사한다.가태4년(1204)년 안계현(安溪縣) 주부(主簿)가 된다. 소정6년(1233), 관상(官商)으로서 무역활동을 한다. 남송정부는 "승절랑(承節郞, 9품)"의 관직을 내리고, 해상무역선박을 관리하는 것을 책임진다.

(그런데, <천주부지.직관>권을 살펴보니, 포개종이라는 이름은 없다. 오히려 만개종(滿開宗)이라는 사람이 순우연간에 안계현 주부를 맡았다. 포자와 만자가 비슷하니 혹은 와전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포씨가족이 광주에서 천주로 일가가 이주한다.

포수경은 남송의 해관총관(海關總管)이 되어, 천주시박사(泉州市舶司, 남송의 세관본부)를 30년간 주재한다. 해관수입은 남송재정의 주요수입원이었다. 

포수경가족은 관리이며 상인이었다. 자료를 보면, 포수경은 송나라말기 천주의 향료 해외무역을 독점했다. "해상무역에 능하여, 거액의 재산을 모으고, 집안일꾼만 수천이었다."

 

포수경이 남송해관을 주재한 기간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송사.영국공본기> 경염원년(1275) 십이월조: "포수경이 천주시박사로 외국선박을 관리한 것이 삼십년이다."

혹은 송나라에서 원우7년(1092)부터 함순3년(1267)까지 175년동안 천주시박사를 주재한 관리는 모두 104명이다.

심유경(沈瑜慶), 진연(陳衍)이 편찬한 <복건통지>에서는, "함순10년(1274), 해적이 천주로 쳐들어왔고, 서역인인 포수성(蒲壽晟), 포수경이 격퇴했다." <천주부지. 습유>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송나라말기 서역인 포수성과 그의 동생 포수경은 호시(互市)를 관리했고, 함순말기 해구를 격퇴한 공로가 있어, 포수경은 관직이 초무사(招撫使)에 이른다..."

 

다만, 양청강(楊淸江), 진창송(陳蒼松)이 1987년 편저한 <복건시박사인물록>에 따르면, 송나라는 원우7년(1092)부터 함순3년(1267)까지 175년동안 천주시박사를 주재한 관리(提擧泉州市舶司)는 모두 104명이고, 순우10년에 비로소 포수경의 이름이 나온다. 순우12년후에는 양근(揚瑾)이다. 남송말기에도 포수경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제로 포수경은 3년이 되지 않는 기간동안 제거시박사를 지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방관리가 3년의 임기를 가지고 순환보직을 맡는 송나라의 관리제도에 부합한다. 그래서 포수경이 30년간 제거천주시박사를 맡았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원나라때 지원14년(1277), 천주시박사가 회복된다.

다음 해 8월, 원세조는 포수경등에게 해외에서 오는 선박을 원나라가 환영하고, 통상무역을 보호하는 정책을 쓴다는 것을 알리도록 명한다.

남송때, 해상무역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남해의 해적도 창궐했다.

함순10년(1274), 해구가 천주를 습격했고, 관병은 이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포수경과 그의 형인 포수성은 자금을 내서 민단을 조직하여 해구를 격퇴한다. 그 공으로 복건안무사(福建按撫使) 겸 연해도치제사(沿海都置制使)의 관직을 받아, 북건의 병사와 민정의 요직을 맡는다.

 

1276년, 원군이 남송의 도성 임안(지금의 항주)를 점령하고, 5세된 남송황제 송공종(宋恭宗)을 생포하고, 태후 사도청(謝道淸)은 각지의 신하들에게 원나라에 항복하라고 명을 내린다. 포수경도 그 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투항한다.

지원15년(1278), 포수경은 원나라의 복건행성(福建行省) 중서좌승(中書左丞)이 된다.

 

포수경 가족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 1973년, 천주 후제항에서 남송의 원양화물선을 발굴한다. 적재중량은 200여톤이었다; 선박에 향료가 많이 실려 있었는데, 강진향(降眞香), 단향(檀香), 침향(沈香), 유향(乳香), 용연향(龍涎香), 호초(胡椒)등이 나왔다. 일부 학자들은 이 해선은 아마도 포씨가족의 향료선일 것이라고 본다. "포씨집안의 향료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혁혁한 관직과 웅후한 해상실력이 결합하여, 포씨는 송,원교체기에 중요한 인물이 된다.

 

경염원년(1276), 남송은 포수경을 복건,광초무사, 총해박, 겸 "주시박(主市舶)"에 임명한다.

덕우2년(1276), 이월, 원군이 남하하여 임안을 포위한다.

원나라는 포수경이 해상업무에 익숙하고, 해상선박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듣는다. 원군의 총사령관 백안(伯顔)은 불백(不伯), 주청(周靑)을 보내 포수경, 포수성 형제를 초무(招撫)한다.

포수경은 원에 투항한 후, 원세조 쿠빌라이에게 중용된다. 지원14년(1277),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민광도제거복건광동시박사(閩廣都提擧福建廣東市舶事)를 내리고,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바꾸며, 강서행성(江西行省)을 책임진다."

지원15년(1278) 삼월 다시 포수경은 "행중서성사어복주(行中書省事於福州), 진무빈해제군(鎭撫瀕海諸郡)"으로 승진한다. 

 

지원14년(1277), 원나라는 천주에 시박사를 다시 설치한다.

사월, 동문병(董文炳)이 원세조를 알현하여 말한다: "포수경은 원래 시박사를 맡았었습니다. 그에게 권한을 주어, 우리를 위하여 해구(여기서 해구는 남송잔여세력을 가리킴)를 제거하고, 여러 오랑캐의 신복을 받아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원14년(1277) 칠월, 남송 소조정의 장세걸은 조주(潮州)에서 천주로 돌아온다. 그리고 포씨가족을 토벌하겠다고 선포한다. 그리항, 의군 진조안(陳吊眼), 여족(畬族) 허부인(許夫人)등과 협력하여 포수경을 토벌하려 한다. 그 기세가 대단했다. 다만 그래도 포씨세력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지원15년(1278) 삼월, 포수경은 복건행성참지정사가 된다.

팔월, 포수경은 복건행성중서좌승이 되고, '진무빈해제군'이 된다.

지원16년(1279) 이월, 포수경은 수군을 이끌고 원군주력과 함께 광동으로 진격하여, 애산전투에서, 남송소조정을 멸망시킨다. 장세걸과 어린황제 상흥제(祥興帝)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렇게 남송은 멸망한다.

지원21년(1284) 팔월, 포수경은 강회등 외행성의 중서좌승 겸 천주분성 평장정사가 된다.

 

포수경은 송원교체기에 명성을 떨치고, 그 가족과 자손은 원나라초기에 크게 성공을 거둔다.

포수경에게는 세 아들이 있다; 사문(師文), 사사(師斯), 균문(均文). 사문은 지정18년(1281), 제거복건도시박을 겸임하고, 부친의 관직을 넘겨받아 복건평해행성중서성이 된다. 사사의 아들 숭모(崇謨)는 관직이 행성 평장정사에 이른다.

 

[포수경은 아랍인인가, 유태인인가]

 

20세기의 연구자들은 모두 포수경이 아랍인이 한화(漢化)한 후예라고 본다. 이 점은 의문이 없다.

남송유민 정사초(鄭思肖, 복건 연강인, 1241-1318)가 쓴 <심사.구구서.제대송충신문>에는 포수경을 포수경(蒲受畊)이라고 적었다. 그의 조부는 남번인(南番人)이라고 했다.

남번은 당송시기 중국의 남부 및 남해(남양) 및 인도양의 광대한 지구의 주민을 널리 가리키는 명칭이다.

 

고조우의 <독사방여기요>는 <송사>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수경, 서역인이다." 

명나라의 하교원(何喬遠, 1558-1631)은 <민서>에서 역시 포수경의 선조는 서역인이라고 말했다.

약 1890년경, 독일인인 쉴더는 이렇게 말한다: 포수경의 '포(蒲)'는 아랍의 보통사람이름인 Abu(Abon)의 음역이라고 했다. 포수경의 성은 여기에서 온 것이다. 아랍인은 남번인이라고도 부른다. Abu라는 단어만 보더라도 포수경은 아랍인이라고 볼 수 있다.

 

악가(岳珂, 1183-1234)의 <정사.번우해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번우(지금의 광주)는 해료(海獠)가 잡거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자는 포성(蒲姓)인데 백번인(白番人)이다. 원래 점성(占城)의 귀인(貴人)이다. 바다를 나갔다 풍랑을 만났다. 돌아가기를 꺼려서 중국에 남기를 원했다. 그리고 무역을 했다. 날이 가면서 도시 안에 살았다....그 지방에서 가장 부유했다...."

 

송나라때 남양에서 중국으로 온 외국상인들을 '해료' 혹은 '박료(舶獠)'라고 불ㄹㅆ다. 그래서 아랍상인들도 해료라 칭했다. 악가는 포성이 점성사람이라고 했는데, 당연히 점성에 거주하는 아랍상인이었을 것이다. 점성은 지금의 월남 중남부이고, 당나라때는 교주라 불렀고, 송나라때는 번국(藩國)이라 불렀다.

 

왕반(王磐)의 <고성령동문병유애비(藁城令董文炳遺愛碑)>에 따르면, "천주태수 포수경은 원래 서역인이다. 해상무역에 능하여, 많은 자산을 모았고, 집안일꾼이 수천이었다. 남해의 남이의 여러 나라가 두려워하여 복속했다."

도광제때의 <진강현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포수경. 그의 선조는 서역인이다. 총제번호시(總諸番互市). 광주에 거주했다.수경의 부친 개종이 천주로 이주한다."

 

일본학자 구와바라 지츠조(桑原騭藏)의 <포수경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사>의 포성은 그 때 광동제일부호였고, 외국무역을 관리했다; 포수경의 조상은 양광에서 최고부자였고, 총리제번호시를 지냈다. 둘을 비교하면, <정사>의 포성은 바로 포수경의 선조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자료를 종합하여 추단하면, 포수경은 부친 포개종을 따라 천주로 이주하기 전에, 그의 조상은 '서역(아랍)'에서 점성으로 이주했고, 다시 점성에서 광주로 이주한다. '서역'과 '점성'은 모두 그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다. 포수경은 분명 점성에 살던 아랍인 혹은 유태인의 후예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천주의 도시남쪽일대에 동으로 도문가에서 서로는 계정, 남으로는 지금의 천주칠중, 북으로는 도산가에 이르기까지 주위 약 300무가 모두 포수경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그 안에는 화원, 기반원, 서헌, 강무장, 주방, 사당등이 있었다.

 

{원말명초에 포씨일족은 멸족된다)

 

원나라말기에 군웅이 할거하고 천하는 대란에 빠진다. 

지정26년(1366), 원나라의 복건행성 평장정사 진우정(陳友定)은 아들 진종해(陳宗海)를 보내, 천주를 점령한다. 그리고 성내의 아랍상인들을 모조리 죽인다.

<청원김씨족보>에 따르면, 이번 겁난에서, 포씨일족은 대부분 참살된다. 그리고, "무릇 포씨일족의 시신은 나체로 서방을 향하게 했다." "모두 오형을 모두 갖추어 주살했고, 그들의 살을 돼지우리에 버린다." "무릇 서역인은 모조리 죽였다. 색깔있는 머리카락이나 코가 높아서 오인되어 죽은 자들도 있었다. 성문을 걸어닫고 3일간 주살했다." "포적(蒲賊, 포수경일족)의 여러 무덤을 파서, 얻은 금은보화가 부지기수였다. 포수경의 장남 사문은 성격이 잔인하여, 송나라의 종실자손들이 모두 그의 손에 죽었다. 보물이 특히 많았는데, 마노석이었다."

 

포씨일족은 이슬람교를 믿었다. 그래서 '나체로 서방을 향하게 했다' 돼지를 꺼리므로, 그들의 시신을 잘라서 돼지우리에 넣는 것은 최대의 모욕이었다. 무슬림의 재산, 주택, 청진사등은 모두 불태워지거나 약탈당했다.

 

명나라가 개국한 후, 홍무7년(1374), 포수경은 일찌기 원군을 도와 남송소조정을 멸망시켰으므로, 주원장도 칙령을 반포하여, 천주의 포씨일가중 남은 자들은 모조리 군대에 가게 하여 영원히 군노(軍奴)로 삼는다. 군적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고, 영원히 공부하여 관직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 포씨일족의 여성은 모두 교방사(敎坊司)에 넣어 대대로 창기(娼妓)나 노비가 되게 했다.

 

주원장이 포씨일족을 엄히 처벌했다는 것은 관방기록외에, 지방사적과 당시 사람들의 필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민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는 포씨성의 사람은 글공부를 해서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했다." <송원통감>에는 "우리의 태조황제는 천주 포수경, 공승부(孔勝夫)의 자손은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는 그의 선조들이 원군을 도와 송을 멸망시킨 죄때문이다." <일지록>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명태조는 천하를 얻고, 송말의 포수경, 황만석(黃萬石)의 자손을 치죄하여 관리가 될 수 없게 했다."

 

원나라때 토토(脫脫)등이 편찬한 <송사>, 명나라때 송렴등이 편찬한 <원사>는 모두 포수경전이 없다. 청말의 위원(1794-1857)의 <원사신편>의 <평송공신전> 목록에, 포수경의 이름만 있고, 내용은 없다. 오직 가초민(柯劭忞)의 <신원사>에 포수경전이 있다. 그러나 간략하다.

 

[부록] <신원사>(권77) 포수경전

 

포수경, 원래 서역인이다. 그의 형 수성(壽宬)과 천주로 와서 호시(互市)를 했다.

송 함순말기, 해구를 막은 공로가 있다. 수경은 민광초무사를 받았고, 전군이 항복해 왔다.

송의 유주(幼主)가 천주를 지나가며 그를 끌어들이려 했다. 수경은 문을 걸어닫고 받지 않았다. 장세걸은 군대를 되돌려 성을 공격한다. 송나라종실중 성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응세걸(應世傑)을 끌어들이려 했다. 포수경은 주연을 베풀어 응세걸을 불러 성을 방어하는 일을 논의했다. 술자리가 진행되는 중에, 모조리 죽였다. 장세걸은 성을 삼개월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포위망을 풀고 갔다. 원세조는 그의 공을 치하하여 소용대장군, 병마초토사를 내린다.

십사년, 강서행성참지정사가 된다. 자손은 모두 관직에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