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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동치제(同治帝)의 사인은 매독인가 천연두인가?

by 중은우시 2021. 11. 17.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동치13년말, 대청은 다시 한번 황제가 바뀌게 된다. 조정은 대행황제(사망한 전임황제를 가리킴)의 유조(遺詔)를 반포한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짐은 몸이 원래 강건했으나, 금년 십일월에 천화(천연두)에 걸렸다. 조심해서 조리했으나, 날이 갈수록 원기가 약해지고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전에 우리는 얘기했었다. 청나라황제의 유조에 사인을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동치제는 명확하게 유조에서 자신이 천연두로 사망한다고 적었다. <청목종의황제실록>에도 편자는 다시 한번 동치제가 천연두고 사망했다고 적는다: "천연두에 걸려 성체가 나빠지고 결국 신민을 떠나게 되었다."

 

청나라황제중에서 동치제는 수명이 가장 짧은 황제이다. 그전까지 이 기록보유자는 순치제였고, 그는 24살까지 살았다. 그도 6살에 등극하였고, 천연두로 사망한다. 그런데, 이제 동치제가 같은 이유로 선조의 기록을 깨게 된 것이다. "재위 십삼년, 나이 열아홉" 향년 19세이다. 이것이 바로 '만세야'의 인생이다. 1만세의 백분의 1도 살지 못했다. 청선종이래, 청나라황제는 갈수록 전황제만 못했다. 도광제는 69세까지 살았고, 함풍제는 31살까지 산다. 동치제는 스무살 생일까지도 살지 못했다. 유조는 이 일을 모두 하늘의 뜻으로 돌렸다. 하늘이 그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왜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거지.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압력이 가장 컸던 것은 공부(工部)의 관리들이다. 함풍제의 정릉은 만든지 겨우 몇년이 되었을 뿐이다. 원래 동치제는 나이가 어려서, 그의 능침은 몇십년이후에 만들어도 될 것이라 여겼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렇게 빨리 능묘를 만들어야하게 생긴 것이다.

 

황제가 이렇게 젊은데, 그는 정말 천연두로 죽었을까? 청궁에 남아있는 문자재료를 살펴보면, 마치 그러한 것같다. "만세야천화진약용약저부(萬歲爺天花進藥用藥底簿)>라는 당안에는 동치제가 병을 앓는 동안 치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황제의 스승인 옹동화(翁同龢)는 당시 궁안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그는 매일 <맥안(脈案)>을 살펴보았다. 황제는 십월 삼십일 병을 앓기 시작해서 십이월 초닷새에 붕어한다. <맥안>에 기록된 내용은 <만세야천화진약용약저부>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1970년대말, 동치제의 사인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고궁박물원은 의학전문가를 초빙하여 <만세야천화진약용약저부>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동치제가 병을 앓기 시작한 초기의 증상은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며, 다리에 힘이 없고, 천연두가 났다(出痘). 중기의 증상은 허리에 붉은 종기가 나서 고름이 흘렀다; 후기의 증상은 어떤 때는 핏물이 흐르고, 잇몸이 검게 변했으며, 허리, 엉덩이의 궤란(潰爛)이 엄중했다. 어의는 고약을 써서 대량의 고름을 짜냈는데, 한번은 그릇의 절반을 채울 정도였고, 악취가 냄새를 맡지 못할 정도였다. 이상의 증상을 보고, 의학전문가들은 동치제는 확실히 천연두로 사망한 것이라 결론내린다. 이런 결과에 대하여, 의외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왜나하면 그들의 연구한 재료의 명칭에 이미 '천연두(天花)'라는 글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만일 최종결론이 천연두가 아니라면, 그게 오히려 문제일 것이다. 이는 청궁의 어의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이고, 이런 유행질병조차도 진단하지 못했다는 것이 되니까. 

 

먼 옛날 순치제가 천연두로 붕어했고, 강희제는 천연두를 앓고 살아남은 것때문에 황제에 올랐다. 이백년동안, 청궁은 천연두라는 질병에 대하여 상당히 잘 이해했을 것이고, 방호수단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종두(種痘)이다. 가경제도 어렸을 때 종두를 맞았고, 예순몇살까지 살았다. 그런데, 어찌 동치제가 이런 질병으로 죽는단 말인가? 그는 종두를 맞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면 맞았지만 효과가 없었던 것인가? 이것이 의문점중 하나이다. 그외에 또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은 동치제가 병을 앓은 기간이 좀 길다는 것이다. 보통사람이 천연두에 걸리면 빠르면 며칠만에 길어도 십여일이면 죽는다. 그런데 동치제는 어떻게 천연두에 걸렸는데, 36일이나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보통사람보다 두배이상이다. 그가 비록 '천자'이지만, 실제로는 보통사람과 같은 살과 뼈를 가졌다. 하물며 병을 앓은지 이십일쯤 되었을 때는 당안에 병세가 안정되어가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온 몸에 두(痘)가 성숙하여 고름이 잡히고 이는 완치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돌연 병세가 심각해져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

 

동치제보다 뒤의 황제인 선통제의 묘사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 자금성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동치제는 자극을 받아서 병세가 악화된 것이라고. 그래서 치료했지만 결국 목숨을 구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럼 도대체 어떤 자극을 받은 것일까? <숭릉전신록>이라는 책에 아주 분명하게 적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황후때문이다. 당초 대혼때 자안태후(동태후)와 자희태후(서태후)는 황후를 고르는 것에 대하여 이견이 있었다. 서로 생각하는 후보가 달랐다. 자안태후는 아로특씨(阿魯特氏)를 선호했고, 자희태후는 부찰씨(富察氏)를 선호앴다. 두 사람이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자, 결국 동치제에게 고르게 한다. 원래 친아들이 자기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는 아로특씨를 좋아했다. 이렇게 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골이 생기게 된 것이다. 대혼 후, 자희태후는 매번 황후를 괴롭혔고, 태도가 아주 가혹했다. 그리고 수시로 학대했다. 명목상으로는 일국의 국모인데, 대가집의 며느리만큼도 편하지 못하게 살았다.

 

동치제가 앓고 있을 때, 아로특씨는 남편을 보러 달려왔다. 그리고 황제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 어미는 사람도 아니다! 네 어미는 정말 뭣도 아니다!" 동치제도 생모인 자희태후를 좋아하지 않았다. 권력을 농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의 사생활까지 간섭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기가 부찰씨를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에게 그 여자와 궁안에서 같이 지내라고 요구했다. 실제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황후는 그와 사이가 좋았고, 아주 가련했다. 황제는 황후를 다독인다: "잠시만 참으라.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자희태후가 곁에서 듣고 있었다. 자희태후는 분노하여, 황후의 머리카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나가서 주먹과 발로 때렸다. 그리고 태감을 시켜 곤장을 치게 한다. 아로특씨가 애원하며 말했다. 나는 어쨌든 대청문으로 들어온 황후이다. 노불야께서 체면을 봐주시라고. 그러자 서태후는 더욱 격분한다. 이십여년전에 대청문으로 들어온 황후는 자안태후이다. 자희태후는 비빈이므로 대청문으로 들어올 자격이 안된다. 아로특씨의 이 말은 자희태후의 아픈 곳을 다시 한번 건드린 셈이다. 그래서 더욱 심하게 때린다. 이 장면을 보고, 황제는 놀라고도 슬퍼하며, 용상에서 굴러떨어진다. 급화공심(急火攻心)후, 원래 호전되던 건강상황이 급전직하하고 결국은 아무 약도 듣지 않게 되었다. 남편을 잃은 아로특씨는 자금성에 자신이 있을 곳이 없었다. 곧 그녀도 자결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갈등이 병세를 악화시키고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이 하나의 견해이다. 정사에는 그런 내용이 적힐 리가 없다. 그저 야사의 범주에 들어갈 뿐이다. 청나라황실에 있어서, 황후가 태후와 싸우고, 황제는 병상에 누워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은 전혀 드러낼만한 일이 아니고, 감추어야 했다. 그 일을 아는 사람도 극소수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겨우 몇명 뿐이다. 무측천이 딸을 목졸라 죽였다는 것이나, 아들을 독살했다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이다. 궁중의 비사이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진실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후세인들이 두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부정할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견해도 역시 야사에 속하는데, 다만 믿는 사람이 더욱 많다. 그것은 바로 동치제가 병을 앓은지 이십일후에 그의 천연두는 확실히 좋아졌으나, 다만 "여독이 가라앉지 않았다(餘毒未消)". 또 하나의 병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은 동치제의 생명을 앗아가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매독이었다. 속칭 '화류병'이다. 전파방식은 HIV와 비슷하다. 주로 모친에서 영아로 전파되거나, 혈액으로 전파되거나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이다.

 

병을 앓은 후기에 황제의 궤란부위는 주로 허리와 엉덩이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잠을 잘 자지 못하고 꿈을 많이 꾸었다. 이런 증상은 매독에 아주 유사하다. 어의는 황실의 체면을 고려하여, 분명 황제가 앓은 천연두는 이미 치료를 마쳤고, 매독이 발작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원인으로 그저 천연두로 계속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진상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옹동화는 비록 매일 <맥안>을 보았지만, 중기부터 환자는 실제로 이미 그 병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치제는 그럼 왜 매독에 걸리게 되었을까? 방대한 자금성 안에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좋아하는 황후는 생모인 자희태후가 함께하지 못하게 막았다. 좋아하지 않는 혜비(慧妃)는 황제가 흥미없었다. 그는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해 할 수 없이 궁밖에서 신선한 자극을 찾아야 했다.

 

야사기록에 따르면, 당시 북경성의 화류항은 모두 3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1등급은 고관귀족, 부호거상들이 찾는 곳이다. 그런 곳에 동치제는 감히 갈 수가 없었다. 모두 상하급관계이고 서로 알고 있으니 만일 누군가 그를 알아보게 되면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 아마 팔대후통이 난리가 날 것이다. 대청황제의 위엄은 없어질 것이다. 조정의 체통도 말이 아니게 된다. 제2등급은 주로 구석진 골목에서 찻물등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용모나 재예는 제1등급과 차이가 컸다. 동치제는 이런 곳을 찾으면서도 전전긍긍했다. 혹시라도 중하급관리가 그를 알아보게되면 그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3등급을 동치제는 자주 찾았다. 장소도 그렇고 질도 엉망이다. 속칭 "하삼람(下三濫)"이다. 고객의 특수한 신분에 전혀 부합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런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독에 쉽게 옮은 것이다. 대상이 가난뱅이건 황제이건 매독은 가리지 않는다. 태의원은 매독임을 발견한 후에도 감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희태후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린다. 이 병을 어떻게 치료할까요? 자희태후도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천연두이겠지라고 대답할 수밖에. 어의는 그녀의 지시를 듣고는 계속하여 천연두의 기준으로 치료했다. 그래서 조야에서는 두신낭낭(痘神娘娘)을 찾아 천자를 위해 기도를 하기도 했다. 태의 이덕립(李德立)의 후손에 따르면 집안내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동치제는 매독에 걸렸는데, 태후가 천연두로 치료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이덕립은 자희태우헤게 천연두로 치료하면 증상에 맞지 않으니 안된다고 보고했더니, 자희태후가 불쾌해 했다고 한다. 자희태후라고 매독인 줄 몰랐을 리는 없다. 다만 황실의 체면을 생각하여 억지로 천연두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광서5년 삼월 경오 묘시, 동치제와 아로특씨의 관이 창서산(昌瑞山)에 묻힌다. 혜릉의 지궁에 영원히 묻힌 것이다. 그는 부친 함풍제와 같은 곳에서 잠들 수 있었다. 이건 자희태후가 공공연히 조제(祖制)를 위반한 것이다. 건륭황제가 정한 법도에 따르면, 전임황제가 동릉에 묻히면, 후임황제는 서릉에 묻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 곳이 황폐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행효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도광제가 우선 지궁에 물이 들어온다는 이유를 들어, 앞장서서 조제를 위반했다. 이미 준비해둔 능침을 다 철거하고, 서릉에 다시 만년길지를 만든다. 이번에는 자희태후가 도광제를 본받아 다시 조제를 파괴한다. 그녀는 자기가 죽은 후에 아들과 멀리 떨어지기 싫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