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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사격격(四格格): 만청제일미녀(晩淸第一美女)

by 중은우시 2020. 10. 14.

글: 독보심해유(獨步深海遊)

융유황후 서태후 사격격

중국역사상의 미녀를 얘기하자면, 대다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사대미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얼마나 예뻤는지를 말하자면, 고대인들은 그저 구름잡는 표현을 썼다. 그녀들은 "침어낙안(沉魚落雁)"이라든지, "폐월수화(閉月羞花)"라든지. 이런 말은 현재인들이 보기에 약간 과장된 것같지만, 약간 상상을 해보면, 그래도 여전히 용모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여자의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문구를 얘기하자면, 조위의 문학가 조식의 그 <낙신부>를 꼽아야 할 것이다. 조식은 <낙신부>에서 낙신의 용모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모습(天人之姿)로 묘사했는데, 후세의 무수한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에게는 고대인들의 미녀에 대한 찬미가 과장된 점이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근대 만청의 한 여자는 아주 아름다웠다. 그래서 만청제일미녀라는 칭호를 듣는다. 그녀는 바로 경친왕(慶親王) 혁광(奕劻)의 넷째딸 "사격격"이다. 아쉽게도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격격'은 귀족의 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니, '사격격'은 넷째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만청제일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얘기하자면 불가사의하긴 하다. 이 만청제일미녀는 그녀의 미모때문에, 서태후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항상 사격격을 궁안에 남겨두고, 자신의 말상대로 삼았다.

 

1. 수총(受寵)

 

사격격은 경친왕 혁광의 넷째 딸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아름다워 궁안의 사람들이 좋아했다. 광서20년때 혁광은 정식으로 경친왕에 봉해지고, 서태후 곁의 '홍인(紅人)'이 된다. 4년이후, 무술정변때, 경친왕은 앞장서서 서태후를 지지하여 서태후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는다. 그리하여 '철모자왕(鐵帽子王, 청나라때 귀족의 등급은 대를 내려가면서 강등되었다. 다만 철모자왕은 대를 내려가도 강등되지 않고 그대로의 등급을 유지한다)'이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별다른 능력이 없던 혁광은 넷째딸을 서태후의 곁에 보내어 모시게 하면서, 계속 총애를 받고자 한다. 사격격은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외모도 아름답고, 말도 잘하여, 항상 서태후의 곁에서 같이 놀았고,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서태후는 거의 매일 사격격을 궁안으로 불러서 얘기를 나누었다. 하루라도 그녀가 곁에 없으면 불편해 했다. 이렇게 되다보니, 사격격은 매일 일어나면 서태후와 같이 놀아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서태후가 그녀를 너무나 좋아하다보니, 그녀는 매달 집에도 몇차례 돌아가지 못했다. 서태후의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혁광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사격격을 집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매일 서태후의 곁에 남아있는 것을 좋아했다. 서태후가 궁안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대다수의 사진에 사격격은 서태후의 바로 옆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사격격은 정말 종령육수(鍾靈毓秀)한 인물이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흑백사진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사격격이 온완현숙(溫婉賢淑)하고, 명모호치(明眸皓齒)의 모습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사진들의 '못생긴 격격'들과 비교하면 만청제일미녀라를 칭호를 얻은 이 사격격은 명실상부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인의 심미안으로 보더라도 이 우아하고 단정한 사격격은 역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총애를 받는 사격격의 이후 인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웠을까?

 

그걸 얘기하자면 안타깝다. 그녀가 서태후의 총애를 크게 받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비교적 처량했다. 왜냐하면, 서태후는 그녀를 너무 좋아해서 이미 일종의 '점유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2. 만경처량(晩景凄凉)

 

사람은 어쨌든 자라서 어른이 된다. 사격격도 궁중에서 서태후를 여러 해 따랐지만, 그녀도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딸에 대하여 그다지 신경쓰지 않던 혁광이지만,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정략결혼을 계획한다. 사격격을 만청의 중신 유록(裕祿)의 아홉째 아들과 결혼시킨 것이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궁중에서 서태후를 여러 해동안 모시던 사격격으로서는 미래에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가지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이들 신혼부부는 서로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 수 있었다. 원래 사격격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사격격이 유록의 아홉째 아들에게 시집을 갔지만, 서태후는 여전히 매일 사격격을 궁으로 부른다. 여전히 예전이나 마찬가지로, 사격격을 궁안으로 불러서, 얘기나누고, 놀고, 사진찍고 했다. 사격격이 신혼인 신부라는 것은 전혀 고려해주지 않았다.

 

원래 신혼의 신부로서 남편과 애정을 가꾸어야 할 때,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는 계속 서태후의 곁을 따라다녀야 했다. 그리하여 신혼이후 몇달동안 그녀가 남편과 얼굴을 본 것은 겨우 몇 차례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다보니, 사격격과 그녀의 남편은 서태후의 행위에 불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서태후는 나라의 최고권력자이다. 그러니 그들은 할수없이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격격의 남편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청나라때 부모 혹은 남편이 죽으면, 처는 반드시 수효(守孝)를 해야 했다. 청나라의 수효제도는 등급이 나뉘어 있고, 가장 긴 경우가 3년이고 가장 짧은 경우가 3개월이다. 그러나 사격격은 그것을 지키지도 못한다.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태후가 다시 궁안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ejh

 

그렇게 되니, 원래 슬픔에 빠져있던 사격격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서태후와 함께 놀아주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서태후가 관음보살로, 이연영(李蓮英)이 선재동자로 분장한 사진 속의 소룡녀(小龍女)가 바로 사격격이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눈에서 슬픔이 묻어나오는 것같다. 나중에 스스로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서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때문인지,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일생동안 개가를 하지 않았다.

 

광서제의 진비와 비교하면 사격격의 인생은 그렇게까지 처참하지는 않았지만, 일생동안 외롭고 처량하게 살았다는 점에서는 역시 '행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과연 사격격이 만청제일미녀로 불릴 만한가라는 점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사실상, 역사적 원인으로 청나라의 격격들이 남긴 사진은 아주 적다. 그중 전해지는 약간의 사진을 보면 청나라때의 후비나 격격들이 대부분 못생겼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사격격의 사진은 그 중에서도 발군으로 예쁘다 할 수 있다.

 

3. 대비 

왕민동

많은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청나라때 후비와 격격의 흑백사진들을 보았다. 현재인이 심미관으로 보면, 그 사진의 비빈들의 용모는 '못생겼다' 설사 어떤 비빈은 못생기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미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촬영기술의 제한도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현대와는 다른 화장기술도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다만 그 흑백사진을 보면 어떻게 보더라도 '미인'이라고 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당연히, 그중에도 현재인의 심미관으로 볼 때 '미인'이라 부를 수있는 비빈 혹은 격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애신각라 육랑(毓朗)의 외손녀인 왕민동(王敏彤)은 현재 전해지는 사진으로 볼 때, 아주 아름다운 미녀라 할 수 있다. 그외에 사격격도 아주 보기 힘든 미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격격이나 왕민동같은 경우는 만청의 비빈이나 격격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몇되지 않는 여인들이다. 그래서 사격격에게 만청제일미녀라는 칭호가 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