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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해주관묘(解州關廟)와 낙양관림(洛陽關林): 어디가 최고의 관제묘인가?

by 중은우시 2019. 12. 12.

글: 상황기(鑲黃旗)


관림이나 관묘를 얘기하자면 먼저 관우에 대하여 얘기해야 한다. 관우에 대하여는 이미 잘 알고들 있겠지만, 간략히 소개해 보기로 하자.


관우(關羽, 160년-220년), 자는 운장(雲長), 하동 해량(海良, 지금의 산서성 운성) 사람이다. 삼국시대 촉한의 저명한 장수이다.


그의 일생은 약속을 중시하고(重許諾), 신용을 지키며(守信用)  유비 및 그 집단의 이익에 무한한 충성을 바쳤다. 그는 유비와 여러 해동안 동감공고(同甘共苦)하면서 신의를 지키는데 시종일관했다. 관우는 아주 용맹했으며 전군에서 으뜸이었다. 후세의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그에 관하여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참차주(斬車胄), 참안량(斬顔良), 주문추(誅文醜), 봉인봉금(封印封金), 천리주단기(千里走單騎),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 화용도(華容道), 단도부회(單刀赴會), 수엄칠군(水淹七軍)등등을 섰다. 비록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무용과 신운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데 충분하다. 괄골요독(刮骨療毒)은 더더구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관우는 사후에 민간의 존중을 받는다. 역대이래 민간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되고, '관공(關公)'으로 존칭된다. 그리고 역대조정에서는 그에게 작위를 봉한다. 청나라때 광서제는 "충의신무영우인용현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로 봉하며, '무성(武聖)'으로 받들어 '문성(文聖)'인 공자(孔子)와 나란히 위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를 '관부자(關夫子)'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는 '개천고불(蓋天古佛)'에 봉해져서 불교에서는 그를 '가람보살(伽藍菩薩)'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사람이었으나 나중에는 제(帝)에 오르고 다시 신(神)이 되었다.


최근 필자는 몇몇 친구들과 그의 명성을 앙모하여 고향인 산서성 운성(運城)으로 여행을 다녀온 바 있다. 거기서 규모가 거대한 전국삼대관묘중 하나로 불리는 해주관제묘(이하 '해주관묘'라 함)를 참관했다. 낙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계속 한 가지 생각이 마음 속에서 살아나ㅏㅆ다. 낙양관림과 해주관묘의 관계는 어디가 먼저이고 어디가 후일까? 어디가 크고 어디가 작을까? 누가 중요하고 누가 덜중요할까? 왜 낙양에 관림이 있는데 다시 해주에 관묘를 지었을까? 필자는 필자와 같은 의문을 지니고 있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여겨서,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해주관묘는 진말(陳末, 남북조) 수초(隋初)(개략 589년경)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그 후 역대왕조를 통해 확장 보수되었다. 현존하는 건축물은 대부분 명청시기에 중수한 건물이다. 위치는 운성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해주진(解州鎭)에 있다. 남쪽으로는 외아수려(巍峨秀麗)한 조산(條山)이 있고, 북으로는 만경벽파의 은호(銀湖)가 있다. 전각은 호광산색과 서로 비추고 있다. 총 점유면적은 22만평방미터로 약 330무이다. 완전하게 보존되고 규모가 거대한 고건축물군이다. 건축배치는 중국전통의 '전조후침(前朝後寢)' 및 중축대칭(中軸對稱)의 궁전식 배치이다. 중축선 위에 차례로 단문(端門), 치문(雉門), 오문(午門), 어서루(御書樓), 숭녕전(崇寧殿), 춘추루(春秋樓), 양측에는 목방(木坊), 석방(石坊), 비정(碑亭), 종정(鐘亭)과 동서장랑(東西長廊)이 있다. 높이 솟은 건축물과 하늘을 찌를 듯한 송백은 황실의 기세를 보여준다. 묘안에 걸린 강희제의 어필친서 "의병건곤(義炳乾坤)", 건륭제 흠정의 "신용(神勇)", 함풍제의 어필친서인 "만세인극(萬世人極)", 서태후가 쓴 "위령진첩(威靈震疊)"의 편액은 모두 진귀한 보물이다. 묘내의 가장 뛰어난 건축물은 춘추루인데, 2층은 현량조주(懸梁弔柱)구조인데 중국고건축에서 진품(珍品)이라 할 수 있다.


해주관묘는 현재 국내외의 여러 관묘들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다. 고건축물도 역사가 유구하고, 규모가 거대하며, 기세가 비범하여 국내외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낙양관림은 하남성 낙양시 관림진에 위치하고 있다. 전세계의 모든 관묘들 중에서 유일하게 '관림'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여기에서 상식 하나를 얘기하기로 하자. 중국의 고대에 제왕의 능은 릉(陵)이라고 부르고 왕후(王侯)의 묘는 총(塚)이라고 불렀다. 백성의 묘는 분(墳)이라고 부른다. 성인의 묘만을 림(林)이라 부른다. 관림은 북으로 수당고성(隋唐古城)이 있고, 남으로 용문석굴(龍門石窟)이 있다. 서로는 웅이산(熊耳山)이 있고, 동으로는 이수(伊水)가 흐른다. 이곳은 무성 관우의 수급이 묻힌 곳이다. 또한 중국내 유일의 '임묘(林廟) 합사(合祀)의 고대 경전적 건축물이다. 점유면적은 180무이며, 현존하는 명청시대 건축물은 150여간이 된다. 후원에는 청나라때의 석룡비정(石龍碑亭)이 있다.


219년 겨울, 손권이 형주를 취하고, 관우는 맥성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포위를 당해 생포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 손권은 유비의 보복이 두려워, 관우의 수급을 목갑(木匣)에 넣어 낙양으로 보낸다. 이를 통해 조조에게 화를 전가하려 한 것이다. 조조는 손권의 음모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조조는 관우를 사람됨을 존중해왔다. 그리하여 관우를 형왕(荊王)으로 봉하고, 음침목(陰沉木)으로 몸을 만들어, 낙양성의 남쪽 15리 지점에 왕후의 예로 관우의 수급을 안장한다. 동시에 묘우(廟宇)를 지어 제사지낸다. 명나라 만력제때 관림은 대규모로 확장된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몇 개의 주요건물은 이 시기에 건축된 것이다. 지금 관림은 1800여년이 흘렀다. 비록 건물을 여러번 개축 보수했지만, 관우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전체 고건축물의 배치는 제왕궁전식 건축으로 '회(回)'자형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대문 밖의 무루(舞樓), 대문(大門), 의문(儀門), 대전(大殿), 이전(二殿), 삼전(三殿), 묘총(墓塚)에서 후문(後門)까지 중축선으로 이어진다. 기타 건축의 배치는 이 중축선의 좌우에 대칭으로 늘어서 있다. 중국고건축문화의 전통적인 특징과 '대일통(大一統)'의 사상의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관림의 독측한 경치는 묘조(廟早), 위존(位尊), 신령(神靈), 백기(柏奇), 상미(像美)와 정절(亭絶)의 육대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뚝 솟은 광장 남쪽의 무루는 속칭 희루(戱樓)인데 건륭56년에 지어졌다. 옛날 백성들이 관우에게 극을 바치던 장소이다. 지금도 매년 가을이 되면 낙양시정부는 이곳에서 '중국낙양관림국제조성대전'을 거행한다. 그 때가 되면 동남아국가와 홍콩 마카오 대만의 중국계, 종친조직이 와서 제사를 지낸다. 무루 건축은 아주 독특하다. 일찌기 일본의 건축가 시미즈 마사오(淸水正夫)가 '세계고전건축중의 기파(奇葩)'라고 부른 바 있다.


관림의 대문은 청나라 건륭56년에 지어졌고 문판(門板)에 배열된 81개의 금색문정(金色門釘)은 제왕의 규격이다. 이를 통해 관우의 숭고한 봉건시대의 지위를 드러냈다. 의문의 앞에는 한 쌍의 삼천여근짜리 철사자가 있는데, 명나라때의 선남선녀들이 관공에게 바친 유물이다. 40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위엄있는 모습이다. 오개간삼문도(五開間三門道)의 의문은 일찌기 명나라 관림의 대문이었다. '의문'은 '유의가상(有儀可像)'이라는 의미이다. 당시의 문관들은 여기에 이르면 가마에서 내렸고, 무관은 말에서 내렸다. 의표를 정리하던 장소이다. 지금도 이곳에 와서 관우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의분에서 의관을 정리하고 먼지를 턴 후에 의문으로 들어선다. 의문의 문액(門額)에는 '위양육합(威揚六合)'이라는 편액이 있다. 이는 서태후의 어필로 아주 진귀한 것이다. '육합'은 동,서,남,북,상,하의 육방을 가리킨다. 그 뜻은 관우의 위엄과 신용이 천지간에 떨쳐진다는 의미이다. 의문의 동서의 벽에는 각석이 하나씩 새겨벼 있다. 동쪽은 악비(岳飛)가 그린 '관성제군상(關聖帝君像)'인데, 송나라때의 항금명장 악비가 관우를 앙모하여 그린 것이다. 그림에서 관우는 칼을 빗겨들고 말을 타고 위풍늠름한 모습이다. 후세에 그려진 관우가 말을 탄 모습은 모두 이를 본받은 것이다. 서쪽에는 '관제시죽(關帝詩竹)'인데 관우가 친히 그린 것이다.


명청시대에 관우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국가의 제례대전으로 삼는다. 낙양관림도 중국고대에 가장 먼저 조정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던 묘우이다. 명나라때는 전문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생원을 두었다. 강희58년, 관공의 낙양후예인 52대손 관위(關霨)를 오경박사로 임명한 후, 세습하며 관림묘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옹정3년에는 관공의 58대손 관문방(關文榜)을 세습오경박사로 임명하며, 해주관제묘에서 제사지내게 한다. 옹정10년에는 관공의 52대손 관조태(關朝泰)를 오경박사로 하여 당양관릉묘(當陽關陵廟)에서 제사지내게 한다.




전세계에 관묘는 수천개나 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3곳이다. 낙양관림, 당양관릉, 해주관묘. 낙양관림에는 관우의 수급이 매장되어 있고, 당양관릉묘에는 관우의 몸이 매장되어 있다. 해주관묘는 관우의 의관총(衣冠塚)이다. 그래서 민간에는 이런 말이 있다. 관우가 죽은 후 머리는 낙양을 베고, 몸은 당양에 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위에서 이미 해주관묘와 낙양관림에 관한 상황을 일부 소개했으니, 여기에서는 간략히 당양관릉에 대하여도 소개하기로 하자. 당양관릉은 당양시 서북 3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역사서에 관릉은 관우의 몸이 매장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지의 민간에 "두침낙양(頭枕洛陽), 신와당양(身臥當陽)"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관릉은 원래 "대왕총(大王塚)"이라고 불렸다. 묘는 동한말기(220년)에 만들어 졌다. 남송 순희10년(1183년)에 양양태수 왕수(王銖)가 묘 앞에 제정(祭亭)을 세운다. 명나라때인 성화3년(1467년) 묘우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건축군은 명나라 가정15년(1536년)에 완성된다. 관릉은 점유면적이 45000평방미터도 약 67무이다. 중축대칭식의 황제릉의 배치를 따랐다. 중축선에는 8개의 건축물이 있다. 차례로 신도비정(神道碑亭), '한실충량(漢室忠良)'석패방(石牌坊), 삼원문(三元門), 마전(馬殿), 배전(拜殿), 정전(正殿), 침전(寢殿), 능기(陵基). 양측에는 화표(華表), 종루(鐘樓), 고루(鼓樓), 비랑(碑廊), 재당(齋堂), 내지헌(來止軒), 성상정(聖像亭), 백자사(伯子祀), 계성궁(啓聖宮), 불당(佛堂), 춘추각(春秋閣)등이 있다. 정전의 대문 위에는 청나라 동치제의 어필친서인 "위진화하(威震華夏)" 금자편액이 있다. 능의 사방에는 황제릉식의 홍장(紅墻), 황와(黃瓦)의 궁전벽을 갖추고 있다.


복잡하기는 하지만 두 가지 문제에는 회답해야 한다.


첫째, 건축시기이다. 낙양관림을 먼저 지었다. 220년 조조가 지었다. 해주관묘가 늦게 지어졌다. 개략 589년 누군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지었다. 당양관릉은 처음에는 그저 무덤이고 묘우는 없었다. 1183년에 제정이 지어지고 1467년에 묘우가 지어졌다.


둘째, 점유면적을 보면 낙양관림이 작다. 180무이다. 해주관묘가 크다 330무이다. 당양관릉은 가장 작다 67무이다.


다음으로 어디가 더 중요한지를 보면, 하나는 수급이 묻힌 곳이고, 하나는 고향에서 제사지내는 곳이다. 다른 하나는 몸이 묻힌 곳이다.


당양은 낙양 및 해주와 비교할 수가 없다. 다만, 낙양과 해주는 백중지간이다. 다만 낙양관림은 관우의 수급이 묻혀 있을 뿐아니라 동시에 묘도 있고 묘우도 있어 기능이 하나 더 많고, 건축시기도 가장 빠르다. 그래서 낙양관림의 지위가 조금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본인이 낙양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낙양에 치우친 점이 있을 수 있다. 이를 그저 개인적인 견해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