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남경대학살논쟁: 언론통제가 부른 "무지지막(無知之幕)"

by 중은우시 2021. 12. 23.

글: 하청련(何淸漣)

 

최근, 상해진단직업학원의 강사인 송겅이(宋庚一) 선생의 남경대학살에 대한 강의와 관련하여, 누군가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고, 결국 송겅이는 면직당했다. 국외의 많은 중문매체는 정확하게 말고와 정치처벌의 두 가지 포인트를 잡아, 중국정부의 독재와 언록통제를 비판하고 있다. 다만 SNS, 개인미디어 및 일부 중문사이트는 남경대학살의 사망자숫자를 놓고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주제를 남경대학살이 존재했느냐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는 아예 이것이 중국당국의 일관된 조작에 의한 작품으로 보고 남경대학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일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무지지막(veil of ignorance)"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중국의 "무지지막"은 언론통제의 부산물이다.

 

소위 "무지지막"이라는 단어는 원천이 여럿이다. 현재 통용되는 의미는 1971년 미국의 정치철학가 John Rawls의 <정의론>이다. 한번은 실험을 진행했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 품격, 기능, 사회상황등을 전혀 모르는 상황하에서(무지지막), 이 사회의 50%가 노예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이 가정을 가지고 선택하게 했다. 결과는 사람들은 사회의 어느 위치에서 태어났건 일단 '무지지막'에 차단되어버리게 되면, 모두 사회의 가장 불행한 사람의 각도에서 문제를 고려하고, 사회제도를 설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정부의 사상통제 및 언론통제의 본뜻은 중국정부의 사상교육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필자는 중국정부의 사상통제를 여러 해동안 연구했다. 1990년대이래 사상교육은 모택동시대의 사상교육보다 훨씬 정교해졌다. 주로 일부 진상에 거짓말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선전한다. 그래서 기만성이 더욱 크다. 다만 중공당국이 절대로 생각지 못했던 결과가 나타난다. 인터넷시대에 정보통제는 물샐틈없이 해낼 수가 없다. 정보원이 여러 곳이다보니 최종적으로 '무지지막'이 나타나는 결과가 된다. 정부의 선전에 거짓말이 충만하기때문에 아예 자신은 완전히 기만당하는 사람(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일체의 사회, 역사에 대한 설명은 거짓말로 여긴다. 이런 전제하에서 남경대학살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남경대학살 논쟁이 사망자숫자에 집중되어 있다.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중순에 발생했다. 중국인들이 국치, 국난으로 여기는 이번 학살사건이 발생한 후, 세계는 모두 그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일본을 포함해서.

 

중공정권이 들어선 후, 일본의 중국침략전쟁에 대하여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항일의 주인공을 국민정부군대에서 공산당이 영도하는 팔로군, 신사군으로 바꿔버렸다. 이런 주선(主線)으로 역사를 기술하게 된다. 1990년대부터, 중국의 사학계는 점점 사실을 발굴하고, 당시 국민정부 및 국군이 항일에 적극적으로 노력했고, 무수한 영웅열사들이 사망했다는 것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공도 대만에 대한 통일전선의 필요에서 남영(藍營)의 주체가 국민정구, 국군인사 및 그 후손이므로 이 연구에 대한 제한을 풀어주었다. 이 항전사를 일부 고쳐쓰게 된다; 비록 중공항전의 공헌이 과장되고 왜곡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한적으로 국군영웅열사들의 항전에 대한 공헌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다만 이렇게 일부 역사를 복원하는 방식은 긍정적인 작용외에, 일부 국내민중의 중공의 선전교육에 대한 불신을 강화시켰다. 중공은 자신이 정권을 잡은 이래 발생한 각종 인화들 예를 들어, 토지개혁, 반우, 3년대기근으로 인한 3천만명의 사망자수, 문혁, 6.4사태에 대하여 당국은 입맛에 맞게 성격을 규정하거나 아예 말살해버렸다. 인터넷시대에 정보원이 다양화되면서, 사람들은 여러 정보를 접촉한 후, 중국당국의 선전교육을 믿지 않고 반감을 가지고 배척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이러하다: 중공의 선전은 점과 부호를 제외하고 한 글자도 진실이 없다. 즉, 중국인의 '무지지막'은 중국당국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중국당국선전에서의 중일관계는 계속 바뀌어갔다.

 

중일역사관계가 오늘날 이 지경에 된 것은 중국정부의 선전정책이 계속 바뀌어간 것과 관련이 있다. 1970년대이전에 중일관계는 냉동기였다; 일본의 중국침략사는 반드시 얘기해야하는 정치항목이 되었고, 교과서, 관영매체, 영화에서 시시때때로 국민들에게 '국치를 잊지 말자'라고 외쳤다. 일단 중일관계까 해동되자 "중일양국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이고 중일우호의 연원은 장구하다"고 말하면서 당나라대의 일본견당사, 감진대사가 동도일본하여 불법을 전수한 것에서 일본의 조경(晁卿)이 중국유학에서 돌아간 것등등을 통해 고대인들의 우의를 융단폭격식으로 선전했다. 매번 양국간에 불유쾌한 사건이 발생하면, 다시 민중의 반일시위를 일으키게 했다. 당국의 이런 정신분열적인 선전으로 결국 국민들은 대일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정신분열을 앓게 된다.

 

전쟁배상금을 예로 들면, 1955년 3월, 중국정부는 <중공중앙의 대일정책 및 대일활동에 관한 방침과 계획>을 내놓는다. 거기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전쟁상태취소성명과 일본배상금면제선언의 시간은 지나치게 빨라서는 안된다. 중일관계정상화전에는 정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 이는 중공이 이미 대일손해배상청구를 포기하겠다고 결정내렸다는 것이다. 일본의 대중 정부개발원조(1979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정부가 중국정부에 제공한 정부개발원조는 3.65조엔(약2,551억위안)에 이른다)은 39년동안 일본의 대중국 정부개발원조(ODA) 총액이다. 주요 자금원은 일본국민이 납부한 세금이다. 일본에서 보기에 이는 일종의 우회적인 배상이다. 베이징의 중일우호병원, 수도공항제2터미널, 상하이의 바오강과 푸동공항, 우한의 장강대교, 경태철도의 전철화개조등등이 모두 과거 일본의 중국원조프로젝트이다. 최근 들어 사천성 원촨대지진후의 재건, 노령화사회하의 간병교육, 공기오염방지등 프로젝트에도 모두 일본의 원조가 있다. 이 모든 것을 중국에서는 선전하지 않는다. 일본측은 단지 공사현장 혹은 프로젝트소재지에 '일본원조건설'이라는 글자를 표시하지만,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남경대학살의 사망자수치에 대한 것은 당시 피해자유체를 정리하는 데서 나왔다.

 

남경대학살이라는 민국시기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 지금의 이런 상태가 된 것도 당국이 선전정책을 계속 변경해왔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남경대학살이라는 역사사건은 국사이면서, 남경을 피해지로 하는 역사이다. 지금까지 전문적인 역사학자들이 계속하여 연구해왔다. 남경대학살의 피해자수의 정리업무는 대학살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민간자선기구가 참여하여 직접 피해자의 시신을 점검하면서 나온 숫자이다. 장쑤성 사회과학원의 연구원 손택외(孫宅巍)는 필생의 정력을 들여 남경대학살을 연구했다. 특히 수치정리방면에서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논문을 서서 이를 기술했다. 3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 것은 4개의 경로를 통해서이다. 첫째 경로: 자선기구는 모두 19.8만구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중 적십자회 남경분회에서 수습하여 매장한 시신이 43,123구이다; 둘째 경로: 시민군중이 수습하여 매장한 시신이 4.2만여구이다. 셋째 경로: 왕정위정권이 수습하여 매장한 시신이 1.6만구이다; 넷째경로: 일본군이 부대를 동원하여 시신을 훼손한 흔적이 있는 시신이 약 수만구이다. 마지막 숫자는 추정인 것을 제외하면 앞의 3가지는 문서가 남아 있다.

 

일본학계의 절대다수는 남경대학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위키백과의 "남경대학살"항목을 보면 명확히 쓰여 있다: 대학살사건을 연구하는 일본학자는 '관점과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서로 다른 일본인들은 남경대학살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해석과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중 사상자수의 부분에서 20만이상, 10여만명, 4만명, 수천, 수백 심지어 완전히 부정하는 것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리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일반살마들은 이런 역사사건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 두 명의 중국계 미국인이 남경대학살에 관련된 창작물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하나는 중국계 미국인화가 리쯔젠(李自健)이 1992년 창작한 대작 <남경대학살>로 해외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하나는 중국계 미국인작가 장춘루(張純如)가 1997년 출판한 <The Rape of Ninking: The Fog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비소설류서적이다. 그리고 국제사학계의 광범위한 주목과 토론을 이끌어 냈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도 이름이 올라간다.

 

두 중국계 미국인의 이 사건에 대한 회고작은 당연히 중국에서도 한동안 남경대학살에 대한 토론붐을 불러오고, 적지 않은 서적이 출판된다. 예를 들어 <라베일기(拉貝日記, 원작 The Good Man of Nanking)>, <동사랑일기(東史郞日記, The Diary of Azuma Shiro)>등이 그 시기에 번역출판된다. 다만 그때는 아직 전통매체시대이다. 발언에 문턱이 있었다. 매체가 발표할 수 있는 것은 그중 수준있는 토론이었고, 토론자는 모두 학식이 있고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들이다. 개인미디어시대와는 달랐다. 지금은 관련사료를 읽어보지도 않은 네티즌이 말하고싶은대로 '역사를 창조한다' 송겅이가 말한 "사망한 사람이 누구인가? 성과 이름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만일 이름도 없고, 성도 없고 신분증번호도 없다면 이 30만은 단지 역사소설에서 쓰는 하나의 개괄적 서술이다"라는 말은 역사허무주의자들에 의하여 자주 인용된다. 이것은 인터넷시대의 특징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하다: 국민정부의 제1대신분증은 1947년 5월에 정식 발급된다. 남경대학살이 발생한 1937년 12월에는 아예 신분증이라는 것이 없었다.

 

1946년 국민정부가  <호적법>을 개정공포한다; 같은 해 6월, 행정원은 <호적법시행세칙>을 반포한다. 그리고 국민의 신분증에 관련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인터넷에 올라온 연대가 쓰여있지 않은 <호적법시행세칙복사본> 제4장의 신분증관련규정은 이 시행세칙중 일부분일 것이다. 1947년 5월 민국정부는 2페이지로 접는 식의 흰색 1세대 신분증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8세이상의 국민에게 발급해주었다. 2013년, 중국의 인터넷에는 이런 소식이 올라온 적이 있다. 등재될 때는 순수한 역사의 발견이었고, 정치적인 요소는 없었다.

 

고금중외에 그 어떤 정상국가도 자신의 국민이 언론과 사상이 통제된 '무지지막'하에서 생활하도록 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이런 '무지지막'으로 두 종류의 사람을 양성하게 된다. 하나의 유형은 중국이 필요로 하는 민족주의 감정이 충만한 애국 샤오펀홍으로 오직 당과 정부를 보호하려고 한다. 다른 하나의 유형은 역사허무주의와 민족허무주의의 민족자한자(民族自恨者)이다. 중국이 하루빨리 붕괴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전자는 중국 웨이보의 주력이고, 후자는 해외중문개인미디어의 주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