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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대륙과 대만의 70년 간첩전

by 중은우시 2018. 12. 19.

글: 삼창(森彰)


최근 중국의 관방매체인 CCTV는 <신문연파(新聞聯播)>, <초점방담(焦點訪談)> 프로그램에서 대만간첩사건에 관한 특별보도를 하면서, 최근 1세기가량, 대만간첩정보기관은 양안관계의 평화적인 발전국면에도 불구하고, 조국대륙을 목표로, 대거 간첩정보활동을 전개했다고 하였다. 그들은 금전매수, 감정부식, 미인계 및 인터넷연락등 여러 방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조국대륙에 침투해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대거 인원을 끌어들이고, 간첩정보망을 펼쳐 양안간의 평화적인 발전국면을 엄중하게 해쳤고, 국가안전과 이익에 엄중한 위해를 가했다고 하였다.


사실상, 1949년 장개석정부가 대만으로 물러간 이후, 양안간에 소리없는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근 70년의 간첩전 과정에서 쌍방은 모두 손실이 참혹했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한 후, '반공대륙(反攻大陸)'을 위하여 스파이를 많이 남겨놓는다. 당시 대만은 정보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국방부군사정보국(國防部軍事情報局, 약칭 '군정국')'과 '중국국민당중앙위원회대륙공작회(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大陸工作會, 약칭 '육공회')'가 가장 중요하다. 그들은 대륙간첩을 파견하거나 발전시키는 다수 공작을 책임졌다.


군정국에는 7개의 처(處)와 1개의 정보연구센터와 1개의 비밀교통센터가 있다. 그들의 활동은 주로 대륙의 정치,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상황이 필요하면 파괴, 암살을 기획하며, 대륙연해지구에서 습격, 소요, 심리전등 활동을 일으킨다. 그 외에, 대만군정국의 주요임무에는 대륙에 '적후무력(敵後武力)'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포함된다. 대륙군대에 대하여 포섭(策反)하고 군사적으로 '심리공격'하여, 대만군대의 전략적 행동에 협조하도록 하는 것등이 있다.


1950년을 전후하여, 동남연해의 일부 도서, 중부 서남 화남대부분지역, 해남도는 모두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대만정보기관의 공작중점은 "정치전복, 내부책반, 적후유격"이었다. 보밀국의 특무인 유전덕(劉全德)은 상해시장 진의(陳毅) 암살을 기도했고, 보밀국 상교 단운붕(段雲鵬)은 3번에 걸쳐 북경으로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기회를 보아 중공지도자를 암살하려 했다; 1950년 대륙 국경절 기간동안, 대만특무는 '60'박격포를 배치하여 모택동, 주덕등을 암살하려 했다. 중국공산당이 건국을 선포하는 당일은 더욱 국민당특무의 최고의 목표가 된다. <청년주말>의 글에 따르면, 대만국민당 보밀국은 이미 밀령을 내려 북평(北平, 북경)에 잠입해 있던 특무분자들에게 암살행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중국공산당의 부장(部長)이상이면, 부대의 장군(將軍)이상 인원이면 모두 암살하라", "임무를 하나 완성하고 돌아오면 승진과 상을 내린다." "1명 암살에 황금50냥이다." 나중에는 아예 이렇게 지시를 내린다. "시간, 장소를 따지지 않고, 쏘면 된다." 중국공산당은 개국대전 전날 여러 명의 특무를 체포하고, 개국대전 당일에는 더더욱 주은래가 직접 안보업무를 책임진다. 기밀해제된 중국공산당 자료에 따르면, 개국대전을 10월 1일 오후에 거행했는데, 국군의 개국대전공습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국공쌍방의 정보전은 오랫동안 네 속애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는 상태였다. 이상의 사건은 대륙의 공안에게 발각되어 체포된다. 대륙의 역사류잡지 <반열일력.연하>는 이런 글을 실은 바 있다. 이 몇 건의 사건에서 대륙측이 매번 순조롭게 위기를 넘긴 것은 한단계 높은 정보공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민당의 여러 번에 걸친 행동은 모두 사전에 대륙이 알고 있었다. 반대로 기회를 이용하여 적지 않은 잠복해 있던 첩보인원을 색출해낸다. 예를 들어, '캐시미르공주호"사건에서 기실 주은래는 사전에 대만암살행동의 밀보를 받았다. 그리고 인도네시아공항측에 통보했다. 아쉽게도 상대방에서 그다지 중시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잡지는 국민당 보밀국의 상교인 조장 단운붕이 체포된 것은 더더욱 중국공산당의 첩보기술이 뛰어남을 말해준다고 한다.


대만을 잘 알고 있는 직업정보관 정투주(丁渝州)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가장 가치있는 정보는 모두 대만첩보인원들이 목숨과 바꾸어 얻은 것이다. 실수로 체포되고, 사망하고, 실종된 첩보인원이 근 2만명에 이른다. 이와 동시에, 대륙의 대만에서의 첩보기구도 엄중하게 파괴된다. 대만공위(臺灣工委)의 성공중학(成功中學), 대만대학법학원(臺灣大學法學院), 기륭중학(基隆中學)등지의 조직이 폭로된다. 여기에는 대만공위의 서기 "노정(老鄭)"(蔡孝干)을 포함한 지도자들이 체포된 것까지 포함된다. 채효간의 진술로 인하여 중국공산당이 대만에 파견한 정보전달원 주풍(朱楓), 그리고 그에게 정보를 제공하던 대만 국방부 참모차장 오석(吳石)이 모두 희생된다. 또 다른 증거가 되는 숫자는 대륙 <환구시보>의 보도인데, 중국공산당이 비밀리에 1,500여명의 간부를 대만으로 보냈고, 그중 1,100여명이 대만측에 발견된 후 처형당했다고 한다.


희생이 너무 컸으므로, 1970년대이후, 대만당국은 점차 폭파, 암살등 폭력적인 수단을 특징으로 하는 파괴활동을 포기하고, 대륙의 정치, 군사, 경제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주력한다. 그러나 이때는 대륙의 '문혁'기간이고, 외래인구에 대한 심사가 아주 엄밀하여, 침투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다.


대륙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자 하는 공동의 수요로, 미국과 대만은 1952년 대륙을 정탐하는 기구를 설립하는데 대호(代號)가 '서방공사(西方公司)"이다. 이곳은 미국의 가장 선진적인 U-2고공정찰기를 통하여 두 가지 업무를 진행한다: '흑묘중대(黑猫中隊)'의 임무는 주로 카메라설비를 이용하여 지면정보를 수집하는 것이고, "흑편복중대(黑蝙蝠中隊)"는 대륙에 문건, 전단, 양식등의 물품을 공중살포하는 것이다. 1961년부터 1972년까지, '흑묘중대'는 대륙의 원자탄실험 및 임표도망사건을 정탐해낸다.


1978년, 중국대륙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봉쇄되었던 국문을 연다. 대만의 원래 국방부 보밀국은 일찌감치 큰 변화가 있었고, 이름을 군사정보국(軍事情報局)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국방부 직속에서 국방부 참모본부에 예속되는 것으로 격하된다. 대외적으로 국방부군사정보국이라고 불리웠지만, 예전의 지위는 없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대륙에 침투하고 첩보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중국대륙이 개혁개방으로, 군대를 포함하여 전인민이 상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군정국이 침투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다. 대만이 대륙에 파견한 정보인원은 더 이상 밀항이나 공수방식이 아니라 '대만상인'이 되어, 투자의 명목으로 광명정대하게 대륙에 들어가서, 회사를 세우고 정보를 수집하며, 정보인원을 책반ㅅ키고 발전시킨다.


당시, 대만측은 이미 군사적으로 대륙을 '반공(反攻)'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더욱 전단살포, 선전기구(氣球)띄우기등의 방식을 채택한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1983년 3월 광동표어풍파이다. 당시의 광주빈관 7층 남쪽의 창문에, 돌연 길이 3미터의 표어가 내걸린다. 위에는 백색바탕에 흑색글씨로 "삼민주의통일중국(三民主義統一中國)"이라고 쓰여 있었다. 광주빈관의 종업원은 사건발생전에 두 명의 홍콩마카오동포로 보이는 사람이 7,8층에서 활동했는데 행적이 의심스러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군중도 이 두 명의 홍콩마카오동포 모습을 한 사람이 표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당연히 대륙의 공안기관은 금방 대륙육공회(陸工會)가 홍콩에 파견한 '391'특무조직의 조장 하은걸(何恩傑)과 조원 임택영(林澤榮)을 체포한다.


이후, 양안간에는 군사대항성격의 관첩활동은 이미 거의 나타나지 않고, 주로 대만상인 및 대만에서 대륙으로 보낸 인사를 통한 고위관리 혹은 군대간부를 '책반'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동근상전: 대륙의 대만간첩>이라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만군정국이 진행한 여러 책반활동중 '소강항목(少康項目)'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91년 1명의 대만상인이 전 총후근부 군계부 국장, 대교인 소정종(邵正宗)을 책반시켜, 암호명 '소강일호(少康一號)'가 된다. 그후 전 군계부 부장, 소장 유연곤(劉連昆)도 군정국에 정보를 제공하고, 동시에 대만에서 소장(少將)대우를 부여한다.


대만이 포섭한 대륙의 관리에는 전 전국사회보장기금이사회 판공청의 국장급 간부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는 대만에 국가경제계획과 개혁방안에 관련한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전 전력부의 중고위간부들도 대만에 많은 대륙의 중요한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2003년에 체포된 광동성 안전청의 처장급 간부는 군정국을 위하여 6년간 일해왔다; 2004년 대륙에서 간첩망을 소탕했는데, 한 군사학교의 10여명 중고위장교들이 대만에 수-27, 수-30등 해방군의 주력전투기 배치와 훈련상황을 제공해왔고, 대륙의 방공시스템든 극비정보를 제공했다.


편제외의 간첩이 계속하여 체포되자, 2006냔 5월초, 대만군정국은 10년동안 대륙에 편재내의 장교를 파견하지 않던 관례를 깨고, 군정국 4처 상교 부처장 주공훈(朱恭訓)을 파견한다. 이 정보계의 엘리트는 대륙에 발을 디딘지 1달도 되지 않아 체포되고 만다. 최근 들어 대만군정국 인원이 대륙에서 체포된 최고위급 장교가 된다.


동시에 대만방면에서도 그들이 체포한 대륙의 간첩을 계속 공표한다. 예를 들어, 대만 중산과학연구원 미사일전문가 황정안(黃正安)은 대륙간첩 임위(林偉)에게 '봉황장거리공격정령폭탄'등 기밀자료를 제공했다; 대만입위 요국동(廖國棟)의 전 비서인 진품인(陳品仁)은 총통부 전 참사 왕인병(王仁炳)을 하선(下線)으로 포섭하여 총통부의 기밀문건을 대륙에 전달한다; 대만공군 전관지근 중교 원효풍(袁曉風)은 12차례에 걸쳐 공군군사기밀(배치, 건설, 작전정보등)을 대륙에 알려준다. 그리고 대륙이 대만에서 발전시킨 가장 중요한 간첨인 전 대만육군사령부 통자처장(通資處長)인 소장 나현철(羅賢哲)이 있다.


대만매체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1949년부터 2006년까지 이미 3천며명의 간첩이 '순직'했다. 그러나 정투주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이 숫자는 저평가되었고, 최소한 1.9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대만의 공산간첩수량을 보면 1950년에서 1998년까지 중국공산당은 전후로 주심지(朱諶之), 진보창(陳寶倉), 오석(吳石), 장지충(張志忠)을 혁명열사로 추인했다. 2013년 12월, 해방군 총정치부 연락부는 북경 서산에 무명영웅광장을 만들어 이들 대만에서 죽은 특공을 기념했다. 양쪽의 화강암벽에는 현재까지 각측에서 조사하여 발견한 846명의 대만에서 희생된 열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떤 경우는 무명영웅이다. 다만 분명히 일부러 이름을 숨긴 무명의 잠복자도 있을 것이다. 진실한 인원수는 알 길이 없다.


양안관계가 호전되면서, 간첩교환건도 계속 제기되었다. 대륙은 주공훈, 서장국(徐章國)으로 나현철을 교환하자고 했으나, 대만측에서 거절한다. 그러나 2010년 12월 9일, 주심지의 유골이 대륙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다음 해 고향인 절강성 진해에 안장된다. 당시 대만의 <중국시보>는 열렬히 기대했다. "형제혁어장(兄弟鬩於墻), 외어기모(外御其侮)"(형제가 담장 내에서 싸우더라도, 외적은 같이 막는다), 민족대의를 명분으로 양안이 정치적인 상호신뢰에서 나아가 군사적인 상호신뢰로 적대상태를 끝내고 진정한 신뢰를 건립하고, 공영으로 손잡고 나가서 중화민족의 근대이래 부흥을 실현하는데 의미가 아주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간첩교환후, 양안을 나누어 통치하는 국면은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여전히 계속되게 만들었다. 이번 대륙에서 폭로한 "2018-뇌정"행동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