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군(王友群)
금년은 중국건당100주년이다. 100년동안, 중공은 전후로 12명의 총서기(당수)가 있었다. 제1대 총서기는 진독수이다. 재직기간은 1921년 7월부터 1927년 8월까지이다. 그후 진독수는 면직당하고, 당적을 박탈당했으며, '일본스파이'로 몰렸고, 여러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을 뒤집어 쓴다.
진독수는 자가 중보(仲甫), 호는 실암(實庵)이며, 안휘 회녕 사람이다. 청나라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秀才)이다. 5번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거나 피난을 했다. 북경대학 교수, 북경대학 문과대학장을 지냈고, 5.4운동의 지도자중 한 명이다.
1920년 4월 소련공산당(볼세비키) 극동국 블라디보스톡분국 외국처는 그레고리 보이틴스키(중국명 吳廷康)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중국공산당 건립을 고취시켰다. 1920년 5월, 보이틴스키는 상하이에서 진독수를 만난다. 쌍방은 합작의향에 합의하고, 코민테른(공산국제)가 경제적 지원을 하여, 상하이에서 건당업무를 전개하기로 한다.
1921년 6월 3일, 코민테른 대표인 네덜란드인 Henk Sneevliet(중국명 馬林, 이하 '마림'이라 칭함)이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는 각지의 공산주의소조의 대표를 상하이에 소집하여 전국대표대회를 열자고 제안한다. 1921년 7월,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상하이에서 거행된다. 진독수는 중앙국서기로 당선된다. 나중에 중공 제2기, 제3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제4기, 제5기에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선임된다.
중공성립후, 코민테른의 조종하에, 중화민국경내에서 대량의 반정부운동을 벌인다. 오늘날 중공의 말을 빌리면, 대량의 '국가정권전복활동'을 벌였다. 중공당사에서 이는 '제1차국내혁명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패로 끝난다.
당시 진독수는 여러번 코민테른의 일부 방식에 반대했다. 그러나 반대도 효과가 없었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코민테른은 모든 책임을 진독수에게 떠넘긴다. 1927년 8월 7일, 코민테른대표인 비사리온 로미나츠(Vissarion Lominadze)가 우한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진독수의 당내외 일체 직무를 박탈한다.
1929년, 중국측이 중동로(중국동방철로)의 권리를 회수하자, 소련은 중국동북지방으로 진격하는 전쟁을 일으킨다. 바로 이 전쟁에서 소련은 중국영토인 흑할자도(黑瞎子島)를 점령한다.
1929년 7월 19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동로사건에 관한 호소>를 발표한다. 그리고 '소련을 보위하기 위해 전진한다'는 구호를 내놓고, 중공에 소련의 편을 들도록 요구한다. 10월 26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공중앙에 서신을 보내 중공에 '독립적인 군중혁명운동을 계속 전개할 것', '노동자의 파업투쟁에 극히 주의하고, 유격전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라. 특히 동북삼성에서'라고 요구한다.
중공중앙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일체의 선전도구를 사용하여 소련을 성원한다. 그리고 8월 1일 상해노동자총파업을 일으킨다. 11월 26일, 중공지도자 이입삼(李立三)은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앙은 이미 무장으로 소련을 보위할 것을 제안했다. 곧 전국의 무장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소련에서 군사를 배운 유백승(劉伯承)등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국제의용군'에 참여해서, 국민정부군 장학량의 부대와 전투를 벌이며, 소련이 흑룡강성 하이라얼(海拉爾)로 진출하는 것을 협조한다.
1929년 11월 15일, 진독수는 중공이 내놓은 '무장으로 소련을 보위한다'는 구호에 반대한다. 그리하여 당적을 박탈당한다.
1932년 10월 15일, 진독수는 상하이에서 체포된다. 나중에 중화민국정부에 의해 13년형을 받는다. 1937년 8월 23일 진독수는 조기출옥한다. 출옥후, 진독수는 신문에 성명을 발표한다: "나는 이미 여하한 당파에도 속해 있지 않다."
1938년 1월 28일, 2월 8일, 중공 주코민테른대표인 강생(康生)이 연안으로 돌아온 후, 중공중앙기관지 <해방>에 <일구(日寇)의 정탐(偵探) 민족의 공적인 트로츠키 일당을 제거하자>는 글을 발표한다. 그 글에서 1931년 "9.18사변"으로 일본이 동북삼성을 점령했으며, 동시에 상하이의 일본정탐기관은 친일파인 당유왕(唐有王)의 소개로 진독수와 공동협력의 담판을 진행했다. 결과는 진독수가 '일본의 중국침략을 막지 않으며', 일본은 진독수에게 매월 300원의 보조금을 준다는 것이다. 보조금을 받은 후, 진독수는 일구의 지시하에 일본의 중국침략을 도우는 일을 하게 된다.
강생의 글이 발표되자, 마치 폭탄을 터트린 것같았고, 일시에 여론이 비등한다. 반공인사뿐아니라, 비공산당 혹은 친공산당의 인사들까지 들고 일어나 진독수는 억울하다고 얘기한다.
1938년 3월 17일, 중공지도자 주은래가 동사장을 맡고 있는 <신화일보>는 계속하여 선동글을 올려, <진둑수는 트로츠키파의 매국노인가의 문제>라는 짧은 글에서 계속하여 진독수에게 '공개적이고 정식으로 성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다음 날, 진독수는 <신화일보에 보내는 서신>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다: "누구든 매국노를 발견하면, 정부에 증거를 제출해야 하고, 정부에서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너희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무고하는 고심을 나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나는 분명히 너희들에게 말하겠다: 내가 만일 트로츠키파가 매국노의 짓을 한 진실한 증거를 발견하면, 개가 가장 앞장서서 반대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함사사영(含沙射影), 혈구분인(血口噴人)식으로 너희를 따라 치어리더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일생동안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았다. 적의 돈을 받아 간첩짓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형사문제이다. 절대로 매국노조직에서 벗어난다거나 매국노행동을 반대한다는 성명으로 해결되지 않고, 사실이 설명한다. 매국노인지 여부는 당연히 증거가 있는지 여부를 가지고 판단하여야 한다."
"우한으로 온 후, 항전에서의 이견이 늘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일관되게 여하한 당파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스스로 강행물을 내지도 않았다. 나는 각 당파의 강행물을 모두 발표했다. 나의 정치태도는 우한인사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사실이 웅변을 이긴다. 나는 여하한 성명도 화사첨족이라 생각한다. 너희가 매국노의 죄명을 날조하여 나를 압박하면 이런 화사첨족의 짓을 하고, 너희를 따라 치어리더짓을 할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다. 너희는 지금까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사실의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 그저 너희에게 코가 꿰어서 끌려다니면 전사이고, 너희를 반대하면 바로 매국노이다. 인간으로서의 도덕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1938년, 우한기간동안 동필무(董必武)는 중앙의 요청으로 진독수를 만나러 간다. 그를 연안으로 데려가고자 하면서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서면반성문이다. 그러나 진독수는 거절한다: "나는 잘못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데, 무슨 반성이 있겠는가." "현재는 어지러운 시대이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쓸 수없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 반성을 한단 말인가?"
그후, 진독수는 사천으로 간다. 그동안 중공 주충칭대표 주은래는 강진(江津)으로 가서 진독수를 만난 바 있고 계속하여 진독수에게 반성문을 쓰고 연안으로 가자고 설득한다. 진독수는 이렇게 말한다: "중앙에서 회의를 열면 내가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코가 꿰어서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 내가 왜 모두 아무런 결과없이 회의를 끝내도록 해야겠는가?"
아무리 권해도 진독수가 움직이지 않자, 주은래는 시위장 용비호(龍飛虎)에게 100은원을 진독수에게 건네주라고 한 후, 이렇게 말한다: "돈은 '호제회(互濟會)'에서 주는 것이니 받아주십시오." 진독수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며 끝까지 돈을 받지 않는다.
진독수의 <최후정치의견>은 1940년 11월 28일에 쓰였다. 진독수는 여러번 말했다. 그의 견해는 "소련공산당의 20여년의 경험에 근거하여, 6,7년간 심사숙고한 후에"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그는 이렇게 썼다: "소위 프롤레타리아독재는 근본적으로 그런 것이 없다. 그것은 단지 당의 독재이다. 결과는 그저 지도자의 독재이다. 여하한 독재도 잔혹, 은폐, 기만, 부패한 관료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스탈린의 모든 죄악은 소련이 10월혁명이래 비밀경찰대권, 당외무당, 당내무파, 사상, 출판, 파업, 선거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등 일련의 반민주적인 독제제도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1941년 12월 23일, 그는 친구인 정학가(鄭學稼)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레닌, 트로츠키의 견해는 중국에 맞지 않는다. 러시아와 서구에서 어찌 정확하겠는가. 아우는 볼세비티의 이론과 그 인물을 새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나 자신은 이미 그들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아우는 오랫동안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쓰고자 했는데, 우리세대의 이전 견해는 철저히 뒤집어질 것이다."
진독수는 말년에 사천 강진시에서 30여리 떨어진 석장원(石藏院)에 거주한다. 생활은 아주 궁박했다. 부인 반란진(潘蘭珍)은 진독수 몰래 악세사리를 전당잡혔고, 진독수의 오랜 친구인 백문울(柏文蔚)이 그에게 보내준 가죽옷도 전당잡혔다. 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해 집의 후문밖 공터에는 감자를 심기도 했다.
진독수는 자신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를 여러 해동안 따른 북경대학 학생 하지유(何之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은 후 장례식은 간단하게 치러라. 신문에 싣지도 말라." 그리고 또한 이런 말을 한다: "아들은 일찌감치 분가하여 독립하였으나, 처는 집안에 의지할 친척이 없어서 안심이 되지 않는다. 네가 많이 보살펴주어라. 그리고 처에게 앞으로는 모든 것을 혼자 알아서 해결하고, 생활에서 자립하도록 당부해달라. 내가 남경 감옥에 있을 때 친구들이 준 5개의 현덕4년 골동 도자기는 란진에게 남긴다. 후사를 처리한 후, 원고비에 남은게 있으면 그녀에게 일부를 남겨주어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장병이 발작한다. 진독수는 1942년 5월 27일 사망하니, 향년 63세이다.
진독수가 죽은 후, 수의, 관, 묘지등은 모두 현지의 향신 등씨 숙질이 돈을 내서 해주었다. <진독수사망전후비용수지표<에 따르면, "장개석 1만원, 주가화 5천원, 단석붕, 왕성공, 진입구 각 2천원, 허정인 1만5천원"으로 되어 있다. 그외에 "호소석, 구양경오, 고어한등 학계의 명사들도 돈을 냈는데, 그래도 5,003원이 부족해서, 등씨 숙질이 부담했다."
진독수는 일찌기 장개석은 그의 '불공대천'의 원수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진독수가 죽고 안장될 때, 장개석은 1만원을 내놓아 추도의 뜻을 표했다. 이는 조야 상하에서 매우 의외라고 여겼던 점이다.
그외에 그가 과거에 도와주고, 중시하고, 이끌어 주었던 사람이 그의 사망후 한푼의 돈, 한 글자, 한 마디를 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모택동은 일찌기 진독수를 숭배했다. 그러나 진독수가 면직된 후, 특히 1949년 중공이 중화민국을 전복시킨 후, 모택동의 진독수에 대한 평가는 폄하위주이다.
1936년, 미국작가 스노가 물었다: 누가 1927년 공산당실패의 주요책임을 져야 합니까? 모택동이 대답한다: "죄를 져야할 으뜸은 진독수이다. 그때, 진독수는 중국당의 철두철미한 독재자였다." 그후, 모택동은 당내투쟁에서 여러번 진독수를 언급한다 그를 "대반도" "나쁜사람" "반혁명분자" "적계급의 우리 당내의 대리인" "우리당에 위해가 가장 크다" "치료할 약이 없다" "오직 타도해야 한다"고 표현한다.
진독수가 타도된 후, 중공은 진독수에게 최소한 9가지 죄명을 덮어씌웠다: 기회주의적인 2차혁명, 우경기회주의, 우경투항주의노선, 트로츠키진독수취소파, 반코민테른, 반당, 반혁명, 매국노, 반도.
다만, 2009년 2월, 중국문사출판사에서 출판한 섭광정(葉匡政)의 저작 <대왕사:종횡역사해밀당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학술계는 진독수 일생의 사상과 활동을 새로 고찰하고 있다. 이상의 죄명이 모두 성립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건은 중공당사의 최대의 원가착안(寃假錯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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