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군(王友群)
모택동이 정한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劉少奇, 류샤오치)이다. 1969년 11월 12일 모택동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죽는다. 두번째 후계자인 임표(林彪, 린뱌오)는 모택동으로부터 연이언 타격을 받은 후 1971년 9월 13일 몽골 원두르칸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그 후, 모택동은 나이가 젊고, 학문이 낮고, 입장이 굳건한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가지 고려 끝에 1973년 모택동은 그의 세번쨰 후계자로 왕홍문(王洪文, 왕홍원)을 고른다.
왕홍문 체포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한다.
1976년 10월 6일 저녁, 모택동이 생전에 지정한 네번째 후계자인 중공중앙 제1부주석 화국봉(華國鋒, 화궈펑)은 중공원수 섭검영(葉劍英, 예젠잉), 중앙판공실주임 왕동흥(汪東興, 왕둥싱)이 중남해 회인당(懷仁堂)에 모여 '사인방' 체포의 역사적 장면을 개시한다.
'사인방'은 모택동의 부인이자 중앙정치국위원인 강청(江靑, 장칭), 중공중앙부주석 왕홍문, 중공정치국상위이며 국무원부총리인 장춘교(張春橋, 장춘차오), 중공정치국위원, 중공이데올로기책임자 요문원(姚文元, 야오원위안)이다.
장춘교를 체포한 후, 이어서 체포한 사람이 바로 왕홍문이다.
왕홍문을 체포하기 전에, 체포팀이 고려한 것은 왕홍문의 나이가 젊고, 군인출신으로 전선에 나가 보위간사를 지낸 바 있어, 의외의 사태를 막기 위해, 체포행동팀은 사전에 면밀한 계획을 수립한다.
왕홍문이 회인당으로 올 때, 그의 신변호위병은 문밖에 제지당한다. 왕홍문이 회인당의 복도를 걸어갈 때, 체포행동팀의 경위는 즉시 달려들어 그의 두 손을 붙잡는다. 당시 왕홍문은 자신이 이미 체포되었다는 것을 몰랐고 ,큰 소리로 자신을 붙잡은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너희 뭐하는 거냐? 난 회의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경위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그는 조급해져서 즉시 반항한다. 그는 손발로 그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을 치면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행동팀의 경위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금방 제압한다.
그후, 왕홍문은 두 팔이 붙잡힌 채로 회인당 대청으로 끌려간다. 화국봉이 일어나서, 왕홍문에게 중공중앙의 '격리심사'결정을 낭독한다. 화국봉이 다 읽기도 전에 왕홍문은 소리를 지르며 경위들의 포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마치 분노한 사자처럼 두 팔을 벌리고, 5,6미터 떨어진 곳의 섭검영에게 달려든다.
당시, 체포를 주관하던 왕동흥은 손을 뻗어 총을 꺼내려고 하였으나, 금방 손을 내려버린다. 왜냐하면 쌍방이 너무 가까워 총을 쏘게 되면 오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섭검영은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왕홍문이 섭검영과 1,2미터 정도 다가왔을 때, 몇몇 경위가 달려들어 그를 땅바닥에 눞이고, 손에 수갑을 채웠다.
왕홍문은 계속 버둥거렸다. 화국봉이 결정을 다 읽은 후, 행동팀은 왕홍문을 회인당 밖으로 끌고나가 바깥에 이미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렇게, 모택동이 생전에 지정한 세번째 후계자인 왕홍문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왕홍문 혹형을 받다
왕홍문은 형을 받은 후,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힌다. 전 총후근부주임 구회작(邱會作)등과 함께 갇혔다. 구회작은 1987년 출옥후 <구회작회고록>을 썼는데, 거기에는 왕홍문이 혹형을 받은 일을 기록하고 있다. 구회작이 처음 왕홍문을 만났을 때, 그의 몸이 아주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왕홍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가 감금된 첫날부터 중형구를 채웠다. 그것은 자동으로 조이는 것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더욱 조여진다. 마치 손오공의 긴고주처럼. 만일 힘을 강하게 주면 바닥에 쓰러진다고 한다. 그는 형구를 찬 후 풀어주지 않았다. 밤에 잘 때도 풀어주지 않았다.
"처음에, 왕홍문은 인민대회당 지하실에 갇힌다. 거기에는 '전기경보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십분마다 한번씩 울린다. 그 소리는 실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의 신경을 자극했다. 사람을 흥분시키고 억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한번은 그가 끓인 물을 마시다가 물을 입에 넣기도 전에 잠이 들어 버렸다. 그때 돌연 경보기가 울려서 그는 깬다. 끓인 물은 온도가 높았다. 마치 악몽을 꾼 것같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새벽에 멀건 죽같은 밥만 주었다. 점심과 저녁에는 각각 작은 와두(窩頭) 1개씩 주었다. 매일 겨우 4량의 식량만 먹었다. 그는 배가 고파서 온몸에 힘이 없었고, 머리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의 몸에는 후유증이 있었는데, 어떤 때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금방 먹은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재판을 하기 전에 비로소 그가 좀 더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잘 먹지 못해서 그는 부었다."
전안조(專案組)는 도대체 무슨 수단을 써서 왕홍문에게 자신의 죄행을 '진술', '자백'하게 하였는가? 왕홍문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자료를 얻어내기 위해 나에게 차륜전을 쓰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어떤 때는 말하면서 잠을 잤다. 그들은 몇번이나 나에게 주사약을 놓았다. 그 약을 주사받으면, 어떻게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지며 아주 고통스러웠다. 나는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억지로 주사를 놓았다. 나중에 교환조건은 진술을 하면 주사를 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왕홍문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는 뭐든지 인정해야 했다. 그들이 말하라는대로 말해주었다.
구회작은 이렇게 회고한다: "3,4일이 지난 후, 우리는 마당에 앉아 바람을 쐬었다. 왕홍문은 가장 나중에 나왔다. 그는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문짝처럼 땅바닥에 쓰러졌고, 입에서는 거품을 물었다. 우리가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려고 하자, 감독관이 즉시 말했다; "움직이지 말라. 움직이면 아주 위험하다. 그 스스로 천천히 일어나게 하면 된다." 2,3분이 지나서, 왕홍문은 천천히 몸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코에서는 피가 나왔고, 얼굴 절반은 모조리 흙이 묻어 있었다. 왕홍문은 우리 몇명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왕홍문은 38살때 모택동의 후계자가 된다.
왕홍문은 길림성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장춘시 교외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돼지와 소를 길렀다. 16살에 군대에 들어가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그때 중공에 가입한다; 1956년 퇴역후 상해 국면(國綿)17창(廠)에 배치받는다. 노동자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보위과 간사가 된다. 1964년 '사청(四淸)'운동때 공작대와 당위의 대자보를 붙인다. 1966년 문혁이 발발한 후, 앞장서서 조반파가 되어, '상해노동자혁명조반총사령부'의 사령관이 된다.
1967년 1월 6일, 중앙문혁소조의 부조장 강청, 장춘교등의 기획하에, 왕홍문은 상해인민광장에서 '타도시위대회'를 개최한다. 얼마 후, 상해시혁명위원회가 성립되고, 장춘교가 주임을 맡으며, 왕홍문은 부주임이 된다.
1967년 7월, 무한의 두 조반파조직간에 무장다툼이 벌어진다. 모택동은 친히 무한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양파의 싸움은 너무 격렬하여, 모택동이 거처까지 그중 일파가 포위하게 된다. 모택동은 황급히 상해로 도망친다. 상해에서도 무장다툼이 있었다. 왕홍문은 30만노동자를 지휘하여 창과 몽둥이를 들고 시혁명위원회와 노동자총사령부에 반대하는 상해휘발류기계공장연합조반사령부를 무너뜨린다. 놀란 마음을 미처 진정시키지 못한 모택동은 그 무장투쟁기록편을 보고 왕홍문을 크게 칭찬한다.
1969년 4월, 중공9대가 개최된다. 왕홍문은 9대대표로 북경에 간다. 당시, 대회에서는 농, 공, 병의 대표가 발언하는데, 왕홍문은 중국노동자계급의 대표로 뽑혀 대회에서 발언한다. 이는 왕홍문이 전국에 두각을 드러낸 첫번째 사례이다. 9대에서, 왕홍문은 중앙위원에 당선된다.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의 후계자 임표의 '반도(叛逃)'사건이 발생한 후, 모택동은 큰 타격을 입는다. 모택동은 다시 후계자를 고르는 일에 착수한다. 모택동은 왕홍문이 농공병을 다 지냈고, 젊으며, 문혁때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왕홍문을 선택한다.
1972년 9월 7일, 모택동은 왕홍문을 북경으로 불러 학습시킨다. 중공총리 주은래에게 '전(傳), 방(幇), 대(帶)'를 책임지게 한다. 주은래가 주재하는 회의에 모두 참석하고, 그에게 의견을 발표하게 하여, 후계자로서의 준비를 시켰다.
1973년 5월하순, 모택동의 제의로 왕홍문은 정식으로 상해에서 중앙으로 옮겨와 일하기 시작하며, 중공정치국회의에 참석한다. 그리고 중공10대당장 수정작업을 책임진다. 같은 해 8월 20일, 중공10대 선거준비위원회가 북경에 성립된다. 모택동은 왕홍문에게 주임을 맡기고, 주은래, 강생, 섭검영, 강청, 장춘교, 이덕생을 부주임을 맡긴다. 중공10대에서 38세의 왕홍문은 중공중앙부주석에 선임된다. 그는 모택동, 주은래의 바로 다음가는 서열3위의 인물이 된 것이다.
1973년 9월에서 1974년 5월까지, 모택동과 주은래가 외국원수, 정부수뇌와 중요외빈을 16차례 접견한다. 매번 왕홍문이 배석한다. 목적은 그를 배양하는 것이고, 그에게 당과 국가의 지도자로서 학습하는 기회를 준 것이다.
한 영국기자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얘기했다: 38세의 상해조반파영수 왕홍문은 이미 의심의 여지없이 모택동의 후계자가 되었다. 모택동은 중공10대이후 매번 외국수뇌를 맞이할 때마다 그의 양측에는 항상 주은래, 왕홍문이 앉았다. 주은래는 이미 75세이고, 모택동과 동년배의 전우이다. 그러므로, 모택동은 이런 특수한 방식으로 전세계에 알린 것이다. 왕홍문이 나의 후계자라고. 미래의 중국은 왕홍문의 중국이라고. 모택동은 확실히 이미 임표사건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같고, 더 이상 후계자의 이름을 당장에 넣지 않았다. 다만, 모택동은 명확하게 자신의 후계자를 지정했다. 왜냐하면 모택동은 어쨌든 이미 80이 노인이고, 언제든지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모택동은 오랫동안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다. 1974년 9월 4일, 모택동이 토고 대통령 아이아드마를 접견할 때, 모택동의 곁에 앉은 사람은 왕홍문이 아니라, 다시 나온지 얼마지나지 않은 국무원 부총리 등소평이었다. 중공중앙부주석에 오른지 1년도 되지 않아, 왕홍문은 모택동의 총애를 잃은 것이다.
원인은 왕홍문이 모택동의 부인 강청등과 중앙정치국내에서 '사인방'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1975년 소집되는 4기전인대에서 자신들의 인원으로 국무원을 조직하고자 했다. 중공최고위층의 인사안배에 대하여 모택동은 유일무이한 결정권자이다. '사인방'의 이런 생각과 방식은 모택동의 반대와 타격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의 사망후,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과 화국봉, 섭검영등은 최고권력을 쟁탈하기 위해 갈등이 격화된다. 마지막에 화국봉, 섭검영이 먼저 선을 써서 그들을 타도한다.
왕홍문이 무기징역의 형을 받다.
1977년 7월, 중공10기 3중전회에서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반당집단에 관한 결의>를 하고, 왕홍문의 당적을 영구히 제적하며, 당내외의 일체 직무를 박탈하는 결정을 내린다.
1981년 1월 25일, 중공최고법원 특별법정은 왕홍문이 "반혁명집단영도죄, 정부전복음모죄, 무장반란책동죄, 반혁명상해죄, 무고죄"로 왕홍문을 무기징역에 정치권리 종신박탈형을 내린다.
왕홍문이 간암으로 사망하다.
사인방 중에서 왕홍문이 가장 젊었고, 신체도 건강했다. 그러나 심리적인 면에서는 가장 약했다. 감옥에서, 왕홍문은 고민이 많은 듯했고, 자주 탄식을 했으며, 얼굴을 찡그렸고, 마음이 우울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결국 병이 들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왕홍문의 동생 왕홍쌍(王洪雙)에 따르면, 왕홍문은 1986년부터 진성감옥을 나와 공안부소속의 북경부흥병원에 입원한다.
1992년 8월 3일, 왕홍문은 간암으로 사망한다. 향년 5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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