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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충칭육호(重慶六虎): 낙마한 충칭의 여섯 호랑이

by 중은우시 2021. 3. 5.

글: 왕우군(王友軍)

 

최근 충칭시위서기 천민얼(陳敏爾)이 두 차례에 걸쳐 전 충칭시 부시장, 공안국장 덩후이린(鄧恢林)을 맹비난하여, 널리 주목받고 있다.

 

중국에서 부패관료척결에 나선 후, 일반적으로 부성장(부부장)급이상의 고관을 '호랑이'라고 부른다. 중공 18대이래, 충칭시에서는 연이어 6마리의 호랑이가 조사처벌 받았다. 각각 전 중공정치국위원, 충칭시위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전 중공정치국위원, 충칭시위서기 쑨정차이(孫政才), 전 충칭시부시장, 공안국장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시위서기 공안국장 허팅(何挺), 전 충칭시부시장, 공안국장 덩후이린, 전 충칭시위 상위, 정법위서기, 공안국장 주밍궈(朱明國)이다.

 

아래에서는 이 여섯마리의 호랑이에 대하여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1. 보시라이

 

보시라이는 중공원로 보이보(薄一波)의 아들로 홍얼다이(紅二代)이다. 당시 중공원로들이 홍얼다이중에서 후계자를 고를 때, 두 명의 후보가 있었다; 하나는 보시라이이고, 다른 하나는 시진핑이다. 보시라이는 너무 나대다가 낙선했고, 시진핑은 겉으로 보기에 돈후하고, 성실했으며, 사람됨이 비교적 겸손하여, 마지막에 후계자 자리를 거머쥐었다.

 

보시라이는 그 결과를 분명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다롄시장으로 있을 때, 베이징의 천안문광장보다 두 배나 큰 싱하이광장을 만들고, 광장의 중심에는 천안문광장의 황권을 대표하는 화표(華表)보다 더욱 높은 화표를 설치했으며, 자신의 발자국도장을 청동으로 주조하여 광장의 가에 새겨 놓았다. 이는 보시라이에게 일찌감치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보시라이는 이 목표를 실천하기 위하여 분투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일찌기 당시 중공의 독재자 장쩌민에게 아부했다. 1999년 다롄시 건립100주년때, 보시라이는 특별히 베이징으로 와서 장쩌민에게 시찰을 와줄 것을 부탁한다. 그해 8월 16일, 장쩌민은 일가족을 이끌고 다롄으로 가서 10일간 머문다. 장쩌민의 생일은 8월 17일이다. 보시라이의 일가 3명은 장쩌민과 함께 지낸다. 카라오케에서는 보시라이의 처인 구카이라이(谷開來)가 장쩌민과 함께 의미심장한 <나의 태양>을 합창하기도 했다.

 

그후 장쩌민은 보시라이를 보살펴분다. 보시라이는 랴오닝성위상위, 다롄시위서기, 랴오닝성장, 상무부장으로 승진가도를 달린다. 2007년 11월 중공17대에는 중공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하고, 얼마 후에는 충칭시위서기를 겸임한다.

 

충칭으로 간 후, 보시라이의 목표는 2012년 중공18대에서 중공정치국상위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처음 충칭에 도착했을 때, 보시라이는 공개적으로 말한다. 그와 그의 일가는 절대 부정부패하지 않겠다고. 그후 기세가 대단한 '창홍타흑(唱紅打黑, 홍가를 부르고, 흑사회를 친다)'을 시작한다. 동시에 대거 '충칭모델'을 선전한다.

 

장쩌민의 또 다른 중요심복인 당시 중공정치국 상위, 중앙정법위서기 저우용캉(周永康)은 여러번 충칭을 가서, 보시라이의 '창홍타흑'을 적극 지지한다. 두 사람은 일찌기 밀모한 바 있다: 중공18대에서 보시라이가 저우용캉을 대신하여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정법위서기가 되고, 그후에 적당한 시기에 정변의 방식으로 시진핑을 끌어내리고, 보시라이가 시진핑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2년 2월 6일, 전 충칭시공안국장 왕리쥔이 미국주청두영사관으로 가서 망명신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돌발사건으로 보시라이의 황제의 꿈은 철저히 부숴진다. 왕리쥔은 보시라이 저우용캉의 쿠데타음모를 미국측에 공개한다. 2012년 3월 15일, 보시라이는 베이징의 전인대에 참석한 기간에 체포되고 만다.

 

2013년 9월 22일, 보시라이는 수뢰죄, 부정부패죄, 직권남용죄로 지난시중급인민법원에서 무기징역의 형을 받는다. 보시라이는 판결에 불복하여, 상소했다. 2013년 10월 25일, 산둥성고급인민법원은 최종심에서 상소를 기각하고, 원판결을 유지한다. 법원은 보시라이가 2,179만위안의 뇌물을 받았고, 부정부패금액이 500만위안에 달한다고 인정했다. 현재 보시라이는 베이징 창핑에 있는 진성감옥에서 복역중이다.

 

2. 쑨정차이

 

2012년 11월 중공18대에서, 49세의 쑨정차이와 후춘화(胡春華)가 동시에 중공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된다. 쑨정차이, 후춘화는 25명의 정치국위원들 중에서 유이한 '60후'(두 사람은 모두 63년에 태어났다)이다. 중공의 이전 관례에 따르면, 쑨정차이, 후춘화는 19대에서 중공정치국 상위로 승진할 것이다. 그중 한 명은 총리후보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총서기 후보가 될 터였다. 18대후 얼마 지나지 않아, 쑨정차이는 충칭시위서기를 겸임한다.

 

쑨정차이도 황제를 꿈꾼 바 있다. <재신주간>에 따르면, 쑨정차이와 가장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한 정부 류펑저우(劉鳳洲)는 쑨정차이의 생년월일시 팔자를 가지고 도사에게 점을 친 바 있는데, 도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쑨정차이는 봉강대리(封疆大吏, 지방최고지도자)의 명을 타고 났을 뿐아니라, 관료로서 한단계 더 올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류펑저우는 용포(龍袍)를 만들어 쑨정차이에게 선물한다. 쑨정차이와 가까운 한 사람은 그가 쑨정차이의 집에 있는 빈 방에는 용포가 걸려있는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쑨정차이는 집에 있을 때면 매일 용포를 보곤 했다는 것이다. 용포는 누가 입는가? 오직 황제만이 입을 수 있다.

 

쑨정차이는 중공정치국위원이 된 후, 중남해에서 직접 시진핑이 하나 하나 '호랑이'를 잡아들이는 것을 목도했다. 2013년부터 2017년 6월까지, 전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정법위서기 저우용캉, 전중앙군사위부주석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전중앙판공청주임 링지화(令計劃)...수백명의 부성장(부부장)급이상의 고관들이 체포되었다.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추세였다. 당시 시진핑은 계속 강하고 독하게 말했으며 부정부패에 대해 고압적인 자태를 취하고 있었다.

 

쑨정차이에 있어서, 한편으로 그는 떠오르는 정치스타로 앞날이 유망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들 호랑이들이 그의 눈앞에서 계속하여 철창에 갇히고, 어떤 사람은 무기징역을, 어떤 사람은 사형집행유예를, 어떤 사람은 사형을 받아 즉시 집행되었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쑨정차이는 마땅히 스스로 '전전긍긍, 여림심연, 여리박빙'했어야 마땅하다. 

 

다만, 쑨정차이도 결국 잘린다. 바로 19대가 개최되기 2달여전인 2017년 7월 24일 쑨정차이는 엄중한 기율위반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2018년 5월 8일, 쑨정차이는 1.7억위안의 뇌물수수로 텐진시제1중급인민법원에서 무기징역의 형을 받는다.

 

3. 왕리쥔

 

왕리쥔은 원래 보시라이가 랴오닝성에서 일할 때 '심복'이었다. 보시라이가 충칭시위서기가 된 후, 특별히 당시 랴오닝성 진저우시공안국장으로 있던 왕리쥔을 충칭시 공안국 상무부국장(정국장급)으로 데려온다. 1년후에는 정국장이 되고, 그후에는 충칭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이 된다. 왕리쥔은 보시라이를 도와 '타흑'했고, 힘을 다해서 공을 세웠다. 

 

다만, 2011년 11월 15일, 보시라이의 처인 구카이라이가 충칭 남산리징호텔에서 청산가리로 영국상인 헤이우드를 독살한다. 구카이라이는 왕리쥔을 찾아가서 그에게 사건경과를 얘기한다. 왕리쥔은 구카이라이와의 대화를 몰래 녹음해둔다. 그리고는 구카이라에게 안심하라고 말한다. 사건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하겠다면서.

 

그후, 왕리쥔은 그의 심복을 몇명 보내어 이 사건을 처리한다. 헤이우드는 '과도한 음주'로 사망한 것이라고 처리한다. 시신은 사법해부를 거치지 않고 화장해버린다. 그후 헤이우드의 유골은 영국으로 보내어진다. 헤이우드의 가족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이를 따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 사건은 묻혀졌다.

 

다만, 사람을 죽인 구카이라이는 내내 마음이 안정시키지 못했고, 계속 말썽을 부린다. 여러번 왕리쥔에게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을 한다. 그리하여 구카이라이와 왕리쥔간의 갈등이 심화된다. 2012년 1월 28일 왕리쥔은 보시라이에게 누군가 구카이라이가 헤이우드를 죽인 것을 고발했다고 말해버린다. 다음 날, 보시라이는 왕리쥔에게 물어본다. 혹시 네가 누군가를 시켜서 고발한게 아니냐고. 왕리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보시라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왕리쥔의 부하들이 있는 앞에서 왕리쥔의 뺨을 때린다. 왕리쥔은 보시라이가 그에게 독수를 쓸 것을 우려해서, 2월 6일 밤에 여자로 변장하고, 몇 건의 기밀문건을 챙겨서, 미국주청두영사관으로 도망친다.

 

왕리쥔망명사건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왕리쥔은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미국측은 중국측과 교섭한 후, 왕리쥔의 요청을 거절한다. 2월 7일, 미국측은 왕리쥔을 중공당국에 넘겨준다.

 

2012년 9월 24일, 왕리쥔은 순사왕법(徇私枉法), 직권남용, 반도(叛逃), 수뢰등 4가지 죄로 청두시중급인민법원에서 유기징역15년형을 받는다.

 

4. 허팅

 

허팅은 전 중앙정치국상위, 중앙정법위서기 저우용캉이 발탁한 심복중 한명이다. 허팅은 먼저 공안부 형정국(刑偵局)의 국장으로 발탁된다. 그후 깐수성 성장조리, 공안청장, 칭하이성 부성장, 공안청장으로 간다.

 

저명한 기자인 장웨이핑(姜維平)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2012년초 '왕리쥔망명사건'이 발생한 후, 저우용캉등은 암중으로 활동하여, 허팅을 충칭시 공안국장으로 추천한다. 목적은 그들이 충칭에서 저지른 흑막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2012년 3월부터 2017년 6월까지, 허팅은 충칭시 부시장, 공안국장으로 재임한다.

 

2017년 10월 9일, 중앙기율검사위 웹사이트에는 이런 소식이 실린다: 전 충칭시부시장, 공안국장 허팅은 당적을 박탈하고, 행정직책을 면직하며, 부처장급으로 강등시켜, 조기은퇴시킨다.

 

중앙기율검사위의 통보에 따르면, 허팅은 엄중하게 정치기율과 정치규칙을 어겼으며, 승진을 위하여 고위인사에 로비하고, 미신활동을 벌였으며, 심사에 항거했다; 공무접대규정을 위반하여, 공공재산을 함부로 낭비하였으며, 개인클럽하우스를 출입했고, 사영기업가들의 접대를 받았고, 사무실과 공용차량은 모두 기준을 초과했다; 규정에 위반하여 간부를 발탁하고, 직권과 영향력을 이용하여 친척의 사업활동에서 이익을 챙기게 했으며, 사법활동에 위법하게 간여하고 끼어들었다.

 

5. 덩후이린

 

2017년 7월, 덩후이린은 베이징에서 충칭에 낙하산으로 내려가서, 공안국당위서기, 정법위부서기가 된다. 9월, 공안국장이 되고, 2018년에는 충칭시부시장 겸 공안국장이 된다.

 

2020년 6월 4일, 중앙기율검사위는 웹사이트에 소식을 올린다: 덩후이린은 엄중한 기율위반, 법률위반으로 조사받고 있다. 금년 1월 4일, 덩후이린은 당적과 공직을 박탈당하고, 사법기관으로 이송되어 수사를 받는다. 2월 26일, 덩후이린의 수뢰사건은 허베이성 바오딩시검찰원이 바오딩시중급인민법원에 기소한다.

 

2월 23일, 충칭시의 주요간부들에 대한 교육회가 시위 당교에서 진행된다. 충칭시위서기 천민얼은 대회에서 덩후이린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정치태변(政治蜕變), 경제탐람(經濟貪婪), 생활부화(生活腐化), 도덕패괴(道德敗壞), 작풍전횡(作風專橫)을 혼자서 모두 갖추었으며 정치기율을 위반하고, 법치를 짓밟고, 권력을 남용하고, 도덕이 무너졌으며 해야할 일은 안하고 하는 일은 엉터리로 하는 반면교사의 전형이다.

 

3월 1일, 충칭시 공안국은 덩후이린사건교육회를 연다. 천민얼은 대회에서 다시 한번 덩후이린을 맹비난한다. 이상과 신념의 총스위치가 '작동하지 않으며', 자기 사람만 써서 사람을 기용하는데 '신뢰를 잃고', 권력과 권력간의 거래를 하고, 권력과 여색간의 거래, 권력과 돈의 거래를 통해 '덕망을 잃었다'고 했다. 덩후이린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덩후이린의 주밍궈, 왕리쥔, 허팅의 뒤를 이어 충칭시 공안국에서 조사받는 4번째 공안국장이 되었다.

 

덩후이린은 충칭에 낙하산으로 내려가기 전에, 중앙정법위판공실주임을 지냈다. 덩후이린은 그리하여 당시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정법위서기 멍젠주의 비서실장으로 인식되었다.

 

6. 주밍궈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주밍궈는 충칭시공안국장, 정법위서기를 지낸다. 그후 광둥성 부서기, 성정법위서기를 지낸다. 이전에는 하이난성위상위, 성정법위서기를 지낸 바 있다.

 

2014년 11월 28일, 주밍궈는 엄중한 기율위반, 법률위반으로 조사를 받는다. 2016년 11월 11일, 주밍궈는 1.41억위안의 수뢰죄와 9,104만여위안의 거액재산내력불명죄로 사형 2년집행유예의 판결을 받는다.

 

보도에 따르면, 사건담당자는 하이난의 한 호화주택내에서만 대량의 황금, 현금을 찾아냈는데, 10여대의 차량에 싣고 와야 했다. 주밍궈는 14개의 가짜여권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 6개는 여성이고, 8건은 홍콩, 마카오를 오가는 '공무여권'이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에 따르면, 그의 고향사람들이 알기로는 자식이 5명이라는 것이다. 첫번째 혼인이 지속되는 동안에 두번째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겼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 비로소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두번째 부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또 어떤 보도에 따르면, 그에게는 자식이 9명이 있다고 한다. 중앙기율검사위의 통보에 따르면 그의 문제중 하나로 '엄중하게 계획생육(가족계획)정책을 어겼다'는 것이 들어 있다.

 

주밍궈는 체포된 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인자로 35년간 있었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1인자가 입만 열면 기본적으로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난 후, 예를 들어, 처음 10만위안을 받으면, 그 다음에 다시 10만을 받고 100만을 받으며, 100만을 받고 1000만을 받는다. 그건 그저 뒤에 0하나가 더 붙는 것뿐이다. 이걸 한번 시작하면, 외부의 강제력이나 조직의 간여가 없으면 누구든 그만두질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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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의 여섯호랑이에게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은 한편으로 부정부패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발탁중용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인물은 덩후이린이다. 그는 2명의 충칭시위서기가 무기징역형을 받고, 3명의 충칭시공안국장이 조사를 받은 후에 충칭에 갔다. 

 

덩후이린에게는 중요한 경력이 하나 있다. 그는 후베이성 이창시 정법위서기, 공안국장으로 있을 때, 전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정법위서기 저우용캉관련사건의 수사에 참여한 바 있다는 것이다. 저우용캉의 두번쨰 처인 자샤오예(賈曉曄), 장남 저우빈(周濱), 비서 궈용샹(郭永祥)사건의 조사에 덩후이린이 참여했던 것이다. 자샤오예는 9년형을 받았고, 저우빈은 18년형에 3,501만위안의 벌금형을, 궈용샹은 20년형을 받았다.

 

저우용캉의 무기징역이 선고된 후, 중공은 재삼강조했다. 저우용캉의 정법계통내의 '유독(流毒)'을 숙청한다고. 다만, 저우용캉사건조사에 참여한 덩후이린은 전혀 거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검찰기관의 덩후이린에 대한 기소내용은 이러하다: 후베이성 향진기업관리국 계재처 부처장, 후베이성 경제위원회판공실주임, 후베이성 경제위원회 부주임, 후베이성 이창시 부시장, 이창시위상위, 정법위서기, 공안국장, 후베이성 공안청 부청장, 중앙정법위 반분열지도협조실 책임자, 중앙정법위판공실주임, 충칭시 부시장, 공안국장등 직무상의 편의와 직권, 지위로 형성된 조건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기업경영, 특수번호판차량, 직무발탁등에서 이익을 취했고, 불법적으로 타인의 재물을 받아 금액이 특별히 거대하여, 법에 따라 수뢰죄로 형사책임을 물어야한다.

 

덩후이린이 후베이성향진기업관리국 계재처 부처장을 맡았던 것은 언제인가? 1996년이다. 그가 체포된 것은 2020년이다. 24년동안, 덩후이린은 계속하여 부정부패를 했다. 후베이성에서 베이징까지 그리고 다시 충칭까지. 그의 관직은 계속 올라간다. 부처장급에서 부성장급까지.

 

충칭은 베이징, 상하이, 텐진의 뒤를 잇는 중국의 4번쨰 직할시이다. 중국 서남지구의 가장 중요한 대도시이다. 충칭의 두명의 시위서기가 감옥에 갇히고, 3명의 공안국장이 수사를 받은 후에, 누구를 충칭시공안국장으로 보낼지는 시진핑에 있어서 아주 신중하게 고려했을 일이다. 이리저리 고르다가 결국 덩후이린을 선택했는데, 결과는 바로 덩후이린이 24년전 부처장으로 있던 때부터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였던 것이다.

 

충칭의 여섯 호랑이를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중국의 부패의 길은 이미 말기암의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도 이를 되돌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