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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쩡칭홍: Deep State의 총감독인가?

by 중은우시 2021. 7. 23.

글: 왕우군(王友軍)

 

7월 21일, 장쩌민, 쩡칭홍을 배경으로 하는 해외매체에서는 쩡칭홍에 관한 글을 실었다. 그런데, 제목을 3번이나 바꾸는데, 각각, <쩡칭홍: 그는 어떻게 장쩌민이 가장 신임하는 '지다성(智多星)'이 되었는가?>; <쩡칭홍: 최초의 홍얼다이 정치국상위, 그는 어떻게 장쩌민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쩡칭홍: 장쩌민이 중남해에 안착하도록 도와서 '가장 처세를 잘하는 사람'으로 불리다>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것처럼 보인다.

 

세 개의 제목에서 두드러진 점이라면 첫째, 쩡칭홍, 장쩌민은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이고, 장쩌민이 없으면 쩡칭홍도 없고, 쩡칭홍이 없으면 장쩌민도 없다는 말이다. 장쩌민, 쩡칭홍은 한몸으로 불린다; 둘째, 쩡칭홍은 아주 대단하다. '지다성'이면서 '처세를 잘한다'.

 

첫번째 제목하의 원문에 이런 문구가 있다: "쩡칭홍이 장쩌민의 핵심막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서출신으로서 원만한 일처리스타일의 장점이 있고, 그는 홍얼다이권내에서 깊은 인맥관계가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정치적 수완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세번째 제목하에서는 이 문구가 삭제된다. 아마도 거기에 언급한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정치적 수완'이라는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재, 중국고위층의 각 파벌은 중공20대에서 새로 분배되는 핵심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내부투쟁이 유례없이 치열하다. 시진핑은 현재 3연임을 모색하고 있다. 정치적 수완이 남다른 쩡칭홍은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밀실에서 계획을 세워서 20대의 결전에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2002년 중공16대때 장쩌민이 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나면서, 쩡칭홍을 중용하여 중공정치국상위로 발탁했다. 그리고 정치국상위를 7명에서 9명으로 확대하며, 장쩌민파가 다수를 점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쩡칭홍은 장쩌민의 중공최고위층내에서 가장 중요한 대리인이었다. 당시, 후진타오는 명목상의 중공중앙 총서기였고, 내정외교의 중대문제는 여전히 장쩌민, 쩡칭홍의 뜻에 따라 결정했다.

 

중공16대이후, 쩡칭홍은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서기처서기, 중앙당교교장, 국가부주석을 맡는다. 이런 직무는 모두 후진타오가 장쩌민에게서 후계수업을 받을 때 맡았던 직무들이다. 즉, 장쩌민은 쩡칭홍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공당정군의 최고지도자가 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적지 않은 중공원로의 반대로 쩡칭홍은 후진타오를 대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2007년 은퇴한다.

 

2007년, 중공17대이후, 장쩌민, 쩡칭홍은 모두 은퇴한 노인이 된다. 다만 17대전에, 장쩌민, 쩡칭홍은 17대의 인사배치를 이미 해놓았다. 17대의 핵심직위는 모두 장쩌민, 쩡칭홍의 사람들이 맡는다.

 

중공17대이후, 장쩌민, 쩡칭홍은 중국 'deep state'의 '총감독'이 된다. 두 사람은 물러났지만 가만히 있지는 않았고, 직위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장쩌민, 쩡칭홍의 원래 계획은 18대에서 당시 중공정치국위원, 충칭시위서기 보시라이를 발탁중용하여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정법위서기를 맡게 하는 것이었다. 그후에 적절한 시기를 봐서 보시라이가 시진핑을 대체하여 중공최고지도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계책은 하늘의 계산을 이기지 못한다. 2012년 2월 6일, 전 충칭시 공안국장 왕리쥔이 미국주청두영사관으로 도망가고 직접적으로 2012년 3월 15일의 보시라이체포로 끝나게 된다. 장쩌민, 쩡칭홍의 계산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장쩌민, 쩡칭홍의 세력은 여전히 아주 컸다. 중공18대의 인사배치에서, 장쩌민, 쩡칭홍의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핵심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2년 중공18대에서, 시진핑은 중공중앙총서기가 된다. 시진핑은 후진타오처럼 장쩌민, 쩡칭홍의 허수아비로 남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2013년 1월 반부패호랑이잡기 전투를 시작한다. 5년간 440명의 장관급(성장급, 부부장급, 부성장급)이상의 고관을 조사처벌한다. 그리고 다른 중견간부들까지 수사받는데, 그중 대다수는 장쩌민, 쩡칭홍이 발탁 중용한 사람들이다. 

 

한때, 시진핑이 장쩌민, 쩡칭홍을 체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중공19대전에 장쩌민, 쩡칭홍은 시진핑과 타협하고, '시핵심'의 지위를 인정하고, '시진핑사상'을 당장에 넣는 것에 동의해주면서, 시진핑은 장쩌민, 쩡칭홍의 부정부패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다.

 

장쩌민, 쩡칭홍이 어떤 사람인가? 중국의 가장 어두운 세력의 총대표이다. 금적불금왕(擒賊不擒王)하면 반드시 재앙이 뒤따른다. 시진핑이 장쩌민, 쩡칭홍을 봐주기로 한 이후, 지금까지 근 4년이 지났다. 그러나 시진핑은 하루도 편하게 지내질 못한다.

 

나무가 쓰러지지 않으면, 원숭이도 흩어지지 않는다. 7명의 현임 중공정치국상위중에서, 장쩌민, 쩡칭홍의 심복이 3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왕후닝, 한정, 자오러지. 장쩌민, 쩡칭홍은 막후에서 그들의 심복을 조종하여 시진핑과 다른 중공정치국상위 리커창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시진핑과 국가부주석 왕치산의 관계를 이간질한다. 그리하여 시진핑은 8명의 정국급 최고위관료들 사이에서 소수파로 전락하고 만다.

 

장쩌민은 금년 95세이다. 여러번 위중하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 장쩌민, 쩡칭홍을 위시한 중국의 deep state는 실제로 쩡칭홍이 우두머리이다.

 

2019년 4월 20일, 3년여동안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던 쩡칭홍이 돌연 장시의 고향에 요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쩡칭홍은 일부러 4월 24일이라는 날짜를 골라서 후야오방의 묘지를 참배한다.

 

1989년 4월 15일, 전 중공중앙총서기 후야오방이 사망했다. 그후 베이징의 대학생들은 천안문광장으로 가서 후야오방을 추모하고, 이로 인해 전국을 석권한 커다란 기세의 민주운동을 불러온다. 1989년 4월 25일 <인민일보>는 <반드시 선명하게 기치를 들어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글을 싣는다. 1989년 6월 4일, 등소평은 천안문에서 학생을 진압하도록 명령내린다. 그때부터 매년 4월 25일경은 중국의 소위 '정치민감일'이다.

 

"다른 사람이 잘 모르는 정치적 수완"을 가진 쩡칭홍이 일부러 4월 24일을 골라서 후야오방의 묘지로 간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그후, 홍콩에서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모두 쩡칭홍의 낙인이 깊이 새겨져 있다.

 

첫번째 큰 사건은 2019년 6월 12일부터 중국이 홍콩에서의 반송중운동에 대한 폭력진압의 강도를 계속 높여간 것이고, 두번째 사건은 작년 중국이 홍콩에서 홍콩판 국가보안법을 강제로 추진한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시진핑이 한 것인데, 왜 쩡칭홍을 들먹이는가? 시진핑은 중국 당정군의 최고지도자이고, 위의 두 가지 사건은 당연히 시진핑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쩡칭홍이야말로 막후의 진정한 '총감독'이다. 쩡칭홍은 시진핑의 '보당정서(保黨情結)'를 이용하여 시진핑을 '묶어서' 전차에 태운 것이다.

 

홍콩은 오랫동안 쩡칭홍의 기반이다. 2019년 홍콩의 반송중운동이 발발했을 때, 쩡칭홍의 5대심복이 홍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모든 핵심직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중공정치국상위, 국무원부총리, 중앙홍콩마카오공작영도소조 조장 한정;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정법위서기 궈셩쿤; 당시 국무원 홍콩마카오판공실주임 장샤오밍; 당시 중앙주홍콩연락판공실주임 왕즈민; 당시 공안부 홍콩타이완마카오판공실주임 쑨리쥔.

 

홍콩반송중운동이 발발했을 때는 시진핑이 미중무역전으로 골치아플 때였다. 당시 시진핑의 가장 큰 골치거리는 미중무역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였다. 홍콩문제에 대하여는 시진핑에게도 정확한 전략이 없었고, 정확한 전술도 없었다. 완전히 쩡칭홍의 5대심복에 장쩌민, 쩡칭홍의 가장 중요한 심복이자 당시 중공선전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정치국상위 왕후닝이 끌고 갔다.

 

시진핑이 홍콩문제에서 분위기를 완화시키려 할 때마다, 중앙정법위의 붓잡이 '장안검(長安劍)은 바로 들고 일어나서 불에 기름을 부어, 폭력을 업그레이드시켜 진압의 핑계를 삼았다. 쩡칭홍의 최종목표는 시진핑으로 하여금 홍콩에 군대를 보내 다시 한번 '6.4'사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후 시진핑이 모두의 적이 되었을 때 시진핑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다만, 시진핑의 홍콩출병은 당시 미국대통령 트럼퍼의 강력한 저지에 부닥친다. 비록 시진핑이 최종적으로 홍콩에 군대를 출동시키지는 않았지만, 옛날에 휘황찬란하던 동방의 진주 홍콩은 중앙정법위서기 궈셩쿤이 장악한 경찰에 의해 암흑천지로 바뀌어 버렸다.

 

홍콩에서 홍콩판 국가안보법을 강제로 추진하는 것도 쩡칭홍이 원하는대로 되었고, 시진핑은 쩡칭홍이 그린 그린안에 갇혀 버린다.

 

2019년 3월-4월, 홍콩반송중운동이 발발하기 전에, 장쩌민, 쩡칭홍을 배경으로 하는 해외매체는 연이어 일련의 글을 발표한다.  <홍콩관찰: 23조입법 더 무엇을 기다리는가>, <중공은 23조입법에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소식통: 캐리람의 임기내 가장 중요한 임무>, <중국전인대 법해석준비, 기본법23조입법에 아마도 중대한 진전이 있을 것이다> <사론: 홍콩은 233조입법에 정치적 자각을 가져야 한다>등.

 

그중 세번째 글에는 이렇게 썼다: "여러 측의 권위있는 소식통에 따르면, <기본법>23조입법이 계속 지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앙은 현재 더욱 적극적인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 가장 놀라운 방안은 전인대상위회가 적극적으로 23조 법해석을 하는 것이다" 네번째 글에는 이렇게 썼다: "입법목적은 여러 홍콩독립분자의 분열, 국가안전등 사회의 복잡한 문제와 리스크에 대응하는 것이다" "중앙은 홍콩에서 스스로 입법할 시간을 줄 여지는 이미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다."

 

2020년 6월 30일, 전인대상위회는 홍콩판 국가안보법을 통과시키고 7월 1일부터 정식 시행한다.

 

전인대가 직접 <홍콩판 국가안보법>을 제정한 것은 위의 세번째 글에서 예고한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홍콩판 국가안보법을 제정한 이유는 위의 4번째 문장에서 말한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위의 4편의 글에서 여러번 언급한 "최근 권위있는 소식통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여러 측의 권위있는 소식통에 들은 바에 따르면"등이 나온다. 이 매체가 장쩌민, 쩡칭홍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권위있는 소식통'은 분명히 쩡칭홍과 그의 심복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홍콩에서 홍콩판 국가안보법을 강제추진한 후, 이어지는 것은 중공20대이다.

 

중공16대, 17대, 18대는 기본적으로 모두 장쩌민, 쩡칭홍이 주도했다. 중공19대에서 시진핑의 명망은 최고조에 달한다. 장쩌민, 쩡칭홍은 2보전진을 위한 1보후퇴를 하며 암중으로 조치를 취한다. 그래서 여전히 적지 않은 핵심지위를 차지했다. 내년에는 20대가 개최된다. 지금까지 시진핑의 명망은 이미 최저점으로 내려가 있다. 내외적으로 곤경을 겪고 있다. 장쩌민파의 진정한 장문인인 쩡칭홍은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계속하여 '남들이 잘 모르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것이다.

 

시진핑은 이미 그의 생사가 걸린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1월 22일, 시진핑은 19기 중기위 5차전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패는 여전히 중공의 최대위협이다. 1월 23일, 신화사는 글을 실어 이렇게 말한다: "정치부패는 최대의 부패이다. 일부 부패분자는 이익집단을 결성하여, 당과 국가권력을 절취하려고 한다." 즉 누군가 정변을 꾀하여 시진핑의 권력을 찬탈하려 하고 있다는 말이다.

 

1월 29일, 시진핑당국은 전 화룽(華融)집단 동사장 라이샤오민에게 사형을 집행한다. 라이샤오민은 장쩌민, 쩡칭홍을 위시한 장쩌민파의 핵심인물중 하나이다. 시진핑의 이런 조치는 장쩌민, 쩡칭홍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중공의 고위층간에 너죽고나살기식의 힘겨루기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월부터 7월까지, 국내외에서 중공20대의 고위층권력투쟁과 관련한 사건이 최소 13건이 발생한다:

 

(1) 시진핑이 중국최대의 이비지니스거물 마윈을 숙청한다; (2) 시진핑은 중국최대의 이동플랫폼 디디츄싱을 숙청한다; (3) 시진핑은 정법계통에 대한 숙청을 계속하여 진행한다; (4) 무경의 고위층을 교체했다; (5) 중앙경위국의 국장을 교체했고, 군대의 여러 고위장군들의 행방이 묘연하다; (6) 전인대상위회에 국무원부총리등의 임면권을 부여했다; (7) 심계(감사)에서 벌크상품의 매점매석의 중대한 위법단서가 발견된다; (8) 선전의 '일부일위양원(一府一委兩院, 지방정부, 지방인대, 검찰원, 법원)'을 대거 교체한다; (9) 샤오젠화의 명천계의 9개 금융기관에 대한 위탁관리를 1년 연장했다; (10) 예젠밍 산하의 상하이화신등 71개의 관련회사는 곧 파산, 경매에 돌입할 것이다; (11) 계속하여 '당을 분열시킨' 장국도와 '중앙의 영도를 따르지 않은' 왕명을 거명한다; (12) 중공고위관료의 '망명'사건이 발생한 것같다; (13) 해외의 '시진핑타도'활동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7월 11일, 신화사는 글을 실어 누구도 면죄부인 '단서철권'을 받을 수 없고, 누구도 '철모자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특별히 저우용캉, 보시라이, 궈보슝, 쉬차이허우, 쑨정차이, 링지화의 6마리 호랑이 및 이미 사형집행된 라이샤오민을 언급했다.   

 

재미학자 허칭롄은 글을 써서 이렇게 분석했다: 중공당내의 심각한 부정부패로 철모자왕으로 불릴 만한 사람은 오직 장쩌민, 쩡칭홍뿐이다.

 

쩡칭홍은 절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이 아니다. 충분히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것이고, 시진핑과 마지막 힘겨루기를 할 것이다.

 

현재 국내외의 각종 첨예한 갈등이 모두 시진핑에 집중되고 있다. 국내외에서 시진핑을 욕하고, 시진핑에 반대하고, 시진핑을 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쩡칭홍의 20대전에 첫번째 목표는 아마도 전력을 다해서 시진핑을 끌어내리는 것일 것이다. 국내외매체에서 자주 말하는 '반시진핑세력'의 총감독은 쩡칭홍 말고는 없다.

 

쩡칭홍의 두번째 목표는 아마도 중공정치국상위 왕후닝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일 것이다. 왕후닝은 장쩌민, 쩡칭홍이 시진핑의 곁에 심어놓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중공19대이래, 왕후닝은 미중무역전, 홍콩반송중, 2020년팬데믹, 중공100주년기념등의 대사에서, 최대한 시진핑을 구덩이로 밀어넣었고, 시진핑을 '고가과인(孤家寡人)'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6월 17일, 정칭홍의 해외매체는 이미 글을 써서 왕후닝이 연임될 것이라고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쩡칭홍의 세번째 목표는 아마도 전력을 다해서 중앙정법위서기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일 것이다. 1999년부터 지금까지 22년간, 중앙정법위서기 뤄간, 저우용캉, 멍젠주, 궈셩쿤은 모두 장쩌민, 쩡칭홍의 심복이다. 누가 다음 번 정법위서기에 오를 것인가? 일찌기 가장 주목받은 후보는 아마도 현임 최고법원장 저우창이다.

 

6월 25일, 위의 장쩌민, 쩡칭홍의 해외매체는 글을 실어, 중국법학자들에게 '화국앙민(禍國殃民)'으로 욕먹고 있는 최고법원장 저우창을 칭찬했다. '풍부한 사법계통업무경험'이 있다는 등으로...그는 중앙정법위서기의 자리를 차지할 후보중 하나이다.

 

쩡칭홍은 '처세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장 가리지 않는 가장 얼굴이 두껍고 검은 사람이다.

 

중국의 가장 엄중한 부패분자들의 가장 뒤에서 받쳐주면서, 장쩌민과 쩡칭홍은 좋은 말은 다하면서 나쁜 짓은 다 했다. 16대부터 지금까지, 매번 중공당대회이전에 그들은 '총감독'이 되고 싶어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청산을 피하고 심판을 받는 액운을 피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다만, 쩡칭홍이 아무리 계산하더라도 분명 '하늘의 계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