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회역사(情懷歷史)
한말 삼국시대에 무장의 관직은 주로 잡호장군(雜號將軍)과 중호장군(重號將軍)의 두 유형이다. 그중 중호장군은 비록 지위가 비교적 높지만 수량이 많지 않다. 주로 대장군(大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장군(衛將軍), 전후좌우사방장군(四方將軍)등이다. 그러므로, 서한때부터 조정은 대량의 잡호장군을 책봉했다. 전공을 세운 무장들에게 잡호장군을 내린다. 한말 삼국시기에 이르러 잡호장군은 더욱 널리 응용된다. 예를 들면 관우의 탕구장군(蕩寇將軍), 여포의 분무장군(奮武將軍)은 모두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잡호장군이다.
그중,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도호장군(都護將軍)'도 자연히 하나의 잡호장군이다. 그러나 도호장군은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는 직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일찌기 동한초기, 한나라 광무제 유수는 도호장군이라는 관직을 두었다. 동한말기에 이르러, 조조 휘하의 두 종실장수가 이 관직을 맡는다. 그렇다면 문제가 나왔다. 조위의 두 명의 '도호장군'중 한명은 하후연(夏侯淵)이다. 또 다른 한명은 누구일까?
1. 하후연
하후연(?-209), 자는 묘재(妙才), 패국 초현(지금의 안휘성 박주시 초성구 일대) 사람이다. 하후연은 동한말기의 명장으로 태복(太僕) 하후영(夏侯嬰)의 후손이다. 중평6년(189년) 십이월, 조조는 진류(陳留)에서 거병하고, 하우현은 별부사마(別部司馬), 기도위(騎都尉)의 직으로 조조를 따른다. 건안5년(200년) 팔월,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전투를 벌인다. 하후연은 행독군교위(行督軍校尉)의 직책을 가진다. 십월, 원소가 패하고, 하후연은 연주, 예주, 서주의 군량운송을 감독한다. 당시 군대내에 군량이 부족하였는데, 하후연은 적시에 군수물자를 보급하여, 조조의 대군은 사기가 높아진다.
건안17년(212년) 정월, 조조는 업성으로 돌아온다. 하후연은 행호군장군(行護軍將軍)의 직으로 주령(朱靈), 노초(路招)등을 감독하며 장안에 주둔하면서, 수천의 무리를 모아 오관도구를 점거하고 난을 일으킨 남산적 유웅(劉雄, 일명 劉雄鳴)을 격파하여 그의 부하를 거둔다. 유웅은 한중으로 도망친다. 건안20년(215년) 삼월, 조조는 장로를 정벌하러 가고, 하후연은 양주에 주둔하던 장수들과 휴정(休亭)에서 조조와 회합한다. 조조가 매번 강족, 호족 수령을 만날 때마다 항상 하후연에게 참석하게 하여 이를 통해 강족, 호족을 위협한다.
<삼국지>등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건안20년(215년) 십일월, 장로(張魯)가 투항하고, 한중이 평정된다. 조조는 하후연에게 행도호장군(行都護將軍)의 직을 맡겨 장합(張郃), 서황(徐晃)등을 지휘하여 파군(巴郡)을 평정한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도호장군이라는 이 직위를 맡은 것은 한중의 장합, 서황등의 장수들이 모두 하후연의 감독과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조위의 한중지구의 전투건은 자연히 하후연이라는 이 종실장군이 책임지는 것이다.
건안21년(216년) 하후연은 식읍 삼백호를 늘여준다. 이전의 것과 합쳐서 팔백호에 이른다. 그후 하후연은 군대를 돌려 무도, 하변등지의 저족, 강족부락을 공격한다. 그리고 저족의 곡량(穀糧) 십여만곡(斛)을 얻는다. 건안23년(218년), 유비는 양평관으로 진군하고, 하후연은 장합, 서황등과 함께 맞이하여 싸운다. 서황은 진식을 격파하고, 장합은 광석에 주둔하여, 유비가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쌍방은 다음해까지 대치한다. 건안24년(219년) 정월, 유비는 정군산전투를 일으킨다. 모두 알다시피 정군산전투에서 황충은 하후연을 죽인다. 이는 한중지전의 중요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유비가 한중의 땅을 탈취하는데 좋은 기초를 쌓은 것이다.
하후연이라는 이 조위의 명장은 이로 인하여 219년 역사의 무대와 작별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하후연의 사망은 자연히 조위의 큰 손실이다. 하후연이 황충에게 피살당했기 때문에, 당시 몸이 이미 좋지 않았던 조조는 부득이 직접 한중을 정벌하러 나서야 했다. 결국 하후연이 피살된 1년후에 조조도 병사하고 만다.
2. 조홍(曹洪)
조홍(?-232), 자는 자렴(子廉), 패국 초현(지금의 안휘성 박주시 일대) 사람이다. 조홍은 삼국시대 조위의 명장으로, 위무제 조조의 종제(從弟)이다. 조홍은 일찌감치 조조가 거병할 때 그를 따라 동탁을 토벌한다. 형양(滎陽)에서 패전할 때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말을 바쳐서, 조조를 위난에서 구해준다. 그는 조조를 따라 사방을 정벌하는데 나서, 연주를 평정하고, 유표를 정벌하고, 축비(祝臂)를 토벌한다. 관도전투후, 본진을 지키며, 장합, 고람의 맹공을 격퇴한다. 한중전투때 유비를 막고, 오란(吳蘭), 임기(任夔)를 참하고, 장비와 마초를 격퇴한다.
진수는 <삼국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천자가 허도를 수도로 삼고, 조홍을 간의대부로 삼는다. 유표를 정벌하는데 무양, 음엽, 도양, 박망에서 격파하여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여봉장군(厲鋒將軍)으로 삼고 국명정후(國明亭侯)에 봉한다. 여러번 정벌에 따르며, 도호장군이 된다.
동한말기, 조홍은 여러번 전공을 세워 조조에 의해 도호장군에 봉해진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조홍은 하후연보다 일찌감치 도호장군의 관직을 받았다. 연강원년(220년),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즉위한다. 이런 기초 위에서 조홍은 위장군이 된다. 그후 표기장군이 되고 야왕후(野王侯)에 봉해지며 식읍 천호를 추가로 받는다. 이전과 합쳐서 2,100호가 된다. 나중에 도양후(都陽侯)고 고쳐서 봉해진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표기장군이라는 관직은 대장군과 대사마에 바로 다음가는 관직이다. 가장 높은 무장의 관직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홍이 표기장군을 맡은 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이전에 조비에게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기 때문에, 황초7년(226년) 조홍의 가족이 죄를 짓자 조비는 이를 기화로 조총을 죽이고자 한다. 당연히 변태후등이 말려서 조홍은 겁난을 피할 수 있었다. 226년 정월, 조홍은 서인으로 내려간다. 오월, 조비가 죽고, 태자 조예(曹叡)가 즉위한다. 그는 조홍을 후장군(後將軍)에 봉하고, 악성후(樂城侯)에 봉하며 식읍 천호를 내린다.
태화4년(230년), 조홍은 표기장군이 된다. 태화6년(232년), 조홍이 병사한다. 그리고 공후(恭侯)로 추봉된다. 비록 위명제 조위가 재위할 때 조홍이 표기장군이라는 관직까지 회복하였지만, 조비의 처벌로 인하여 조홍은 조위의 무장들 가운데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조진(曹眞), 조휴(曹休)가 병권을 장악한 상황하에서, 조홍의 표기장군은 그저 허직(虛職)일 뿐이다. 그래서 조조시기에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던 조홍은 이렇게 조비, 조예에 의해 손발이 묶여버리게 된다. 이는 조위의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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