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회역사(情懷歷史)
효기장군은 고대의 무장 관직이다. 한무제때 이광(李廣)이 효기장군에 봉해진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이장군열전제49>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漢)은 마읍성(馬邑城)으로 선우(單于)를 유인했다. 대군을 마읍의 옆 골짜기에 매복시켰고, 이광이 효기장군으로 호군장령을 이끌었다. 그때 선우가 눈치를 채고 가버린다. 한나라군대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다. 그후 4년이 지나, 이광은 위위(衛尉)로 장군이 되어, 안문관(雁門關)을 나가 흉노를 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비록 촉한과 동오에는 모두 효기장군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위의 역사에는 3명의 효기장군이 있다. 그리고 이 3명은 모두 조위의 종실(宗室)이다. 그렇다면, 조위의 세 명의 효기장군은 도대체 누구일까. 첫번째는 조인(曹仁)이다. 나머지 2명은?
1. 조인
조인(168년-223년 5월 6일), 자는 자효(子孝), 패국(沛國) 초현(譙縣, 지금의 안휘성 박주시) 사람이다. 한말 삼국시기 조위의 명장이고, 위무제 조조의 종제(從弟)이며, 진목후(陳穆侯) 조치(曹熾)의 아들이다. 초평4년(193년), 조조가 원술과 싸울 때, 조인은 크게 적을 베어 공을 세운다. 바꾸어 말하자면, 조조가 처음 거병했을 때, 조인은 이미 조조를 따랐고, 여러차례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건안13년(208년), 조조가 형주를 토벌할 때, 조인은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된다. 적벽대전이후, 조조는 조인을 남군(南郡, 치소는 강릉)에 남겨 지키게 한다.
건안16년(211년),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연(夏侯淵)이 하동으로 출병하자, 관중의 여러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조조가 관중을 정벌하고, 조인이 안서장군(安西將軍)이 되어, 여러 장수를 이끌고 동관(潼關)을 지키고, 위남(渭南)에서 마초(馬超)를 격패시킨다. 하간(河間)의 소백(蘇伯), 전은(田銀)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은 조조에 의해 효기장군에 봉해지고, 7무리의 대군을 지휘하여 소백, 전은등을 평정한다.
<삼국지>등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건안18년(213년), 여러 신하들은 조조를 위공(魏公)에 봉하고, 구석(九錫)을 내릴 것을 청한다. "효기장군 안평정후 조인"도 이렇게 권하는 사람들의 명단에 들어 있었다. 연강원년(220년), 조조가 사망한 후, 조비가 위왕에 즉위한다. 조인을 거기장군(車騎將軍)에 봉하고, 진후(陳侯)에 봉하며, 식읍 2천을 추가로 내려 이전까지 합하여 식읍이 3,500호에 이른다. 나중에 조인은 양양(襄陽)을 지킬 때, 완성(宛城)으로 돌아가 주둔할 것을 청하고, 조비는 동의한다. 황초2년(221년) 조비는 조인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는다. 그리고 조인에게 조서를 내려 반란을 일으킨 장수 정감(鄭甘)을 토벌하여 참하게 하고 임영(臨潁)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며,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한다. 여러 군사를 총지휘하며 오강(烏江)을 지키게 하며 다시 합비(合肥)에 주둔하게 한다.
황초3년(222년), 십월, 손권이 다시 반기를 든다. 조비는 여러 대군을 이끌고 동오를 정벌하러 나선다. 조인을 보내어 보병,기병 수만명으로 오나라의 유수(濡須)로 진격하게 한다(유수구전투). 장제(蔣濟)는 선계(羨溪)를 습격하여, 성공적으로 적군의 주장 주환(朱桓)이 선계로 원병을 파견하게 만든다. 이 전투에서 조인은 병사와 장수를 잃고, 얼마 후 병사한다. 당시 나이 56세이다. 조인이 지휘하던 유수 방향의 위나라군대는 동중랑장(東中郞將) 장제가 대신 지휘한다. 조인은 조정에 의해 충후(忠侯)로 추서된다. 청룡원년(233년) 오월 임신일, 조인은 하후돈(夏侯惇), 정욱(程昱)과 공로로 인하여 조예(曹叡)에 의해 조조묘에 같이 제사를 받는 예우를 누린다. 이는 당연히 조인의 혁혁한 전공에 대한 인정과 포상이라 할 수 있다.
2. 조창(曹彰)
조창(189년-223년 8월 1일), 자는 자문(子文)이다. 패국 초현 사람이며, 삼국시대 조위의 종실, 장수이다. 위무제 조조와 변황후와의 사이에 출생한 둘째아들이며, 위문제 조비의 동생이고, 진왕 조식의 형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조조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조식과 조비의 문장재주는 아주 뛰어나서 삼조(三曹)라고 불리지만,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면에서는 조창을 꼽아야 할 것이다.
<삼국지>등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건안21년(216년), 조창은 언릉후(鄢陵侯)에 봉해진다. 건안23년(218년) 사월, 대북(代北) 오환(烏桓)의 무신저(無臣氐, 能臣氐)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조조는 조창을 북중랑장에 임명하며, 효기장군의 직책을 행사하도록 한다. 효기장군이 된 후, 조창은 성공적으로 반란을 평정한다. 자연히 조조는 그를 더욱 중시하게 된다. 219년, 조조가 유비와 한중에서 전투를 벌일 때, 유비는 양자 유봉(劉封)으로 하여금 전투를 돕게 한다. 이에 대하여 조조도 당연히 약세를 보이지 않았고, 조창에게 명하여 전투에 나서게 한다. 조창은 밤낮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장안에 도착했을 때, 조조는 이미 한중에서 돌아와 있었다. 조조가 장안을 떠날 때, 조창에게 월기장군(越騎將軍)으로 장안에 남아 지키게 한다.
건안25년(220년), 조조가 낙양으로 간 후, 이미 병세가 위중했다. 그리하여 조조는 사람을 보내어 조창을 부른다. 다만 조창이 도착하기 전에 조조는 이미 병사해 버린다. 조비가 한으로부터 황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오른 후, 조창은 제후들과 각자 자신의 봉국으로 가게 된다. 조비는 그에게 식읍 5천호를 추가로 내려서, 이전까지 합하여 1만호에 이른다. 황초2년(221년), 조창은 공(公)에 봉해진다. 황호3년(222년), 조창은 임성왕(任城王)에 봉해진다. 황초4년(223년) 조창은 도성으로 와서 알현한다. 이때 중병을 얻는다. 육월십칠일(8월 1일) 조창이 병사한다. 위왕(威王)에 추봉되니, 향년 35세이다. 이는 조창에게 있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셈이다. 만일 그가 이렇게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조위에 중용되고, 더욱 큰 성취를 거두었을 것이다.
3. 진랑(秦朗)
진랑은 진의록(秦宜祿)과 두씨(杜氏)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진의록은 여포 휘하에 있을 때 원술에게 사신으로 갔고, 진랑은 모친과 함께 하비(下邳)에 남는다. 건안3년(198년), 조조는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공격한다. 성을 함락시킨 후, 조조는 관우의 요청을 거절하고, 두씨를 자신이 거둔다. 그리하여 진랑은 조조의 양자가 되고, 모친을 따라 조조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당시 윤부인(尹夫人)이 데려온 하안(何晏)도 함게 조조의 집에 살고 있었다.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하안과는 달리, 진랑은 언행을 조심했다. 이렇게 하안과 진랑은 모두 조조에게 양자로 거두어지고, 조위의 종실로 취급된다.
진랑이 성장한 후, 조조, 조비의 시기때는 진랑이 관직을 맡지 못한다. 태화원년(227년) 조예가 즉위한 후, 진랑은 효기장군, 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된다. 그리고 자주 조예를 따라 출행한다. 진랑이 조예에게 효기장군에 봉해진 것은 진랑이 조위의 종실 신분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가 확실히 군대를 이끌고 전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청룡원년(233년), 원래 조위에 복속해 있던 선비(鮮卑)족의 보도근(步度根)은 조위와 항상 맞서오던 선비족 가비능(軻比能)과 결탁한다. 병주자사 필궤(畢軌)가 이를 발견한 후 상소를 올려 토벌하나, 결국 패배한다. 오히려 보도근과 가비능은 더욱 힘을 합쳐서 함께 조위의 변방지역을 습격한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위명제 조위는 진랑으로 하여금 부대를 이끌고 이들을 토벌하게 한다. 최종적으로 진랑은 선비족대군을 격패시키고, 가비능과 보도능은 막북으로 패주한다. 진랑이 성공적으로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국지>등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경초2년(238년) 겨울십이월, 위명제 조예의 병이 위중할 때, 조우(曹宇)를 대장군으로 삼고, 하후헌(夏侯獻), 조상(曹爽), 조조(曹肇)와 진랑을 함께 탁고대신(託孤大臣)으로 삼으려 한다. 다만, 조에의 이런 안배는 유방(劉放), 손자(孫資)의 반대에 부닥친다. 유방, 손자 두 대신의 설득으로 위명제 조예는 최종적으로 탁고대신의 인선을 바꾸게 된다. 즉, 사마의(司馬懿)와 조상이 공동으로 조방(曹芳)을 보좌하게 한 것이다.
진랑 등은 관직을 잃었을 뿐아니라, 황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진랑의 최후에 대하여는 사료에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진랑은 삼국역사에서 행적이 묘연해 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위명제 조예가 임종때 탁고대신이 인선을 바꾼 것은 조위의 멸망에 화근을 심은 것이다. 왜냐하면, 조예는 원래 사마의에게 탁고대신을 맡길 의향이 없었다. 다만 사마의가 결국 탁고대신이 되고, 결국 249년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위의 대권을 찬탈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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