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원소가 비록 관도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했지만, 그래도 하북(河北)의 땅은 여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었고, 실력은 여전히 강대했다. 만일 하북의 땅을 원소의 한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면, 조조가 하북의 땅을 차지하는데 아마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소가 죽자, 그의 두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두 형제는 왜 서로 협력하여 공동으로 적을 막아내지 않았을까?
원소의 아들들 중에서, 원소의 자리를 승계할 후보자는 두 명이었다. 즉 원담과 원상이다. 원담이 형이고 원상이 동생이지만, 원상은 인물이 잘 생겼다. 원소의 처인 유씨(劉氏)는 원상을 아꼈고 자주 원소의 앞에서 작은 아들 원상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칭찬한다. 원소도 이 작은 아들이 잘 생겨서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미처 이를 명확히 하기도 전에 그 자신이 죽어버린 것이다. 관례에 따라, 사람들은 원담을 후계자로 옹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 원담은 업성(鄴城)에 없었다. 권력이 큰 대신 심배(審配)등은 원소의 생전 뜻에 따라(아마도 유씨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원상을 후계자로 세운다. 원담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고, 원담은 원소의 지위를 승계하지 못하고, 그저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칭할 뿐이다. 이때부터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고, 하북은 실제로 두 체계로 나뉘어진다. 이때, 조조는 하북을 정벌하고자 했다. 큰 적을 앞두고 형제 둘은 잠시 협력하여 공동으로 조조에 대적한다. 원담은 여양(黎陽)에 주둔하였는데, 원상은 그에게 적은 병력만을 준다. 그리고 봉기(逢紀)를 파견하여 그를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봉기는 원소의 고급모사였고, 발언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상의 사람이고, 원담을 상대하지 않았다. 원담이 병력을 추가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심배등은 상의한 후 주지 않았다. 원삼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심배의 일파인 봉기에게 화를 쏟아내고, 봉기를 죽여버린다.
조조가 황하를 건너 원담을 공격했고, 원담은 원상에게 긴급상황을 알린다. 원상은 일부 병력을 떼어 원담에게 주고자 했으낟, 원담이 이 병력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게 될까봐 우려했다. 그리하여, 대신 심배로 하여금 업성을 수비하게 하고, 자신이 병력을 직접 이끌고 원담에게 증원을 가서 여양에 주둔하여 조조와 대진한다. 건안7년 구월부터 다음해 이월까지 양군은 여양성 아래에서 싸웠다. 그러나, 결국 하북군은 버티지 못하고 업성으로 후퇴한다. 원담과 원상도 업성으로 도망친다. 조조는 양식조달문제로 잠시 하북으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허도(許都)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남진하여 형주의 유표를 공격한다.
이는 원래 두 형제가 새로 군사를 정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원담이 패배하여 평원(平原)으로 도망친다. 원상은 승기를 잡아 추격한다. 원담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되자 신비(辛毗)를 조조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한다. 조조는 이미 형주경계선까지 진격해 있었다. 그래서, 하북의 일에 당장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신비의 말 솜씨는 만만치 않았고, 곽가(郭嘉)등도 거들었다. 이건 좋은 기회라고 말한 것이다. 조조는 그리하여 이해 십월 여양으로 간다. 원상은 조조가 북상한단 말을 듣고 평원을 포기하고 업성으로 돌아간다.
원래 원담을 그저 조조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원상의 수하장수 여광(呂曠), 여상(呂翔)이 조조에 투항할 때, 원담은 몰래 인장을 파서 그들에게 준다. 조조는 원담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투항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혼인관계로 잠시 그를 안심시키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돌아간다. 조조가 물러가자, 원상은 심배를 업성에 남겨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평원의 원담을 치러 간다. 이번에 조조는 평원을 구하러 가지 않고, 직접 업성을 친다. 원상은 업성이 공격받는다는 말을 듣자, 평원을 포기하고 업성으로 돌아간다.
원상과 심배의 계획은 성의 안팎에서 동시에 출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 다 실패하다. 원상은 패주하고, 조조는 그를 쫓아간다. 아직 원상을 포위하기도 전에, 원상은 사람을 보내 조조에게 투항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조조는 거절한다. 원상은 다시 도망친다. 어떤 장수는 조조에 투항하고, 군대 사병들도 도망치고 흩어졌다. 원상은 중산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조조는 원상의 인수(印綬), 절월(節鉞)을 얻었고, 이를 업성의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러자 업성의 군사들은 사기가 무너졌다. 어떤 장수는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이렇게 업성이 함락된다. 수비장수 심배도 생포된다. 원래 원소에게 소속된 병주자사(幷州刺史) 고간(高幹)도 투항했다. 병주까지 조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두 형제는 가만히 있었을까? 아니었다. 조조가 업성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원담은 주변의 성을 공략하여 점령하는 외에 중산에 도망쳐 있는 원상을 공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상은 다시 도망쳐서 형인 유주자사(幽州刺史) 원희(袁熙)에게 간다. 그가 남겨놓은 병사들은 모조리 원담에 의해 거두어진다. 원담은 원래 진심으로 조조에 투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조는 건안10년 병력을 보내 원담을 격패시키고 참살해 버린다. 이렇게 하북의 땅은 모조리 조조의 손에 들어간다. 그후 원상, 원희는 부하의 공격을 받아 전후로 요서 오환(烏丸)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다시 요동으로 도망친다. 결국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피살당한다.
원소의 사후, 두 아들은 짧은 기간동안 협력한 다음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 싸우는데 보냈다. 그리고 서로 생사를 걸고 싸웠다. 만일 하북을 한 사람이 통치했다면, 그 세력은 조조에 비하여 그다지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 둘은 단결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대체로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원담이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서 차라리 조조에 붙을지언정 동생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주군이 되어 하북을 지배하려는 것외에 수하대신들도 각자 자신의 이익을 생각했다. 그래서 원담이 양보하고자 하더라도, 그의 수하들이 용납치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원상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후계자로 된 것은 바로 수하들이 권력과 이익을 얻으려는 행동의 결과였다.
저수(沮授), 전풍(田豊)이후, 하북에는 실권을 장악한 몇몇 대신이 있었다. 즉 심배, 봉기와 신평(辛評), 곽도(郭圖)등이다. 관도지전때, 원소는 대신중 업성을 지키게 남겨두려 했다. 마음 속으로 정한 인물은 심배였다. 누군가 원소에게 간언한다. 심배 가족은 업성에서 세력이 너무 크다고 한 것이다. 나중에 조조가 심배를 죽이고, 그의 가산을 몰수하였는데 아주 많았다. 심배는 적극적으로 원상을 옹립하였는데, 원소가 원래 그런 생각을 했던 이유도 있지만, 옹립한 공으로 자신의 이익을 확대하고 유지하려는 것도 분명히 있었다. 신평등은 심배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원담에게 의탁하여 심배에 대항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둘째는 원소가 남긴 화근이다. 공손찬을 격패시킬 때, 원소는 큰아들 원담을 청주(靑州)로 보내려 한다. 그러나 대신 저수등의 반대에 부닥친다. 저수는 이렇게 말했다: "토끼 한 마리가 길거리를 뛰어다니면, 만명이 그걸 쫓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한사람이 토끼를 잡으면, 토끼를 잡으려던 사람들이 모두 추격을 멈출 것이다. 귀속이 분명해진 이유이다. 하물며 나이가 이제 현명한 아들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이다. 덕행도 점을 쳐서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의 법도이다. 선대의 성패를 교훈삼아 토끼가 누구의 것인지를 정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원소에게 하루빨리 후계자를 정할 것을 권한 것이다. 자식들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도록.
원소는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네 아들에게 각자 하나의 주(州)를 갖게 하여, 그들의 재능을 관찰하겠다." 저수는 나온 후에 탄식한다: "화근은 여기에서부터 시작이구나!" 원소는 둘째아들 원희를 유주자사로 보낸다. 그리고 외조카 고간을 병주자사로 보낸다. 원담을 청주로 보냈지만, 자사로 임명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그저 도독(都督)을 맡도록 했다. 이렇게 임명하자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도독이 자사보다 높단 말인가? 아니면 언제든지 기주(冀州)로 돌아와서 최고권력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아들이 하나의 주씩을 맡는다고 하지만 막내아들 원상은 아직 임명받지 못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생각일지 모른다. 막내아들 원상에게 그의 자시를 물려주려는.
그렇다고 원담을 후계자로 삼으면 하북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든지 원상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원소가 이렇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임으로 인하여 수하대신들이 분열되고 이로 인하여 하북집단이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저수의 건의에서는 누구에게 기울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냥 그에게 하루빨리 정하라고 했을 뿐이다. 그래야 상호간에 명분이 확정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일어난 일을 보면, 원소의 이 두 아들은 모두 손권처럼 특별히 우수하지도 않았다. 아두처럼 특별히 멍청하지도 않았다. 일찌감치 결정을 내려 내부투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되었다. 봉건사회의 법도는 적장자승계제이다. 만일 명확히 해놓지 않더라도, 적장자가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원소가 사람들에게 전달한 정보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니 사람들에게 착각이 생긴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후계자로 만들면 자신이 옹립의 공이 있는 공신이 된다는 것이다. 원래 원소가 살아있을 때도 대신들은 서로를 비난했는데, 원소가 죽자, 원래의 균형이 무너져 버렸고, 하북의 국면은 수습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겉으로 보기에는 원소의 두 아들이 싸운 것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이익집단간에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 집단의 싸움을 멈추지 않은 결과는 조조에게 이득을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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