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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방통(龐統)은 동오(東吳)의 간첩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21. 4. 20.

글: 섭시문사판(攝詩文史版)

 

음모론자들이 보기에 방통이 유비에 귀순한 것은 동오의 사명을 띈 것이라고 한다.

맥락은 대체로 이러하다:

 

"공조(功曹)는 중요한 직무이다. 주유의 공조인 방통을 동오사람들은 왜 스스로 쓰지 않고, 노숙으로 하여금 유비에게 추천하게 했을까? 서천(西川, 사천)을 취하는 것은 제갈량이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실행시에 유비는 망설였고, 제갈량도 아무런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통은 계속하여 유비에게 자신을 데리고 사천에 들어가자고 권유했을까? 익주로 들어간 후, 유비는 왜 방통의 건의를 거의 듣지 않았을까? 방통은 적진으로 돌진하는 무장도 아닌데, 왜 군진의 앞에 섰다가 죽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방통이 유비에게 귀순한 것은 정말 동오인들의 계획인 것일까? 혹은 방통이 정말 동오의 간첩이었을까?

 

방통이 유비에게 귀순한 것은 한 지방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형주(荊州) 남군(南郡)이다. 공조로서 일했다면 부득이 군태수(郡太守)를 얘기해야 한다. 그래서 방통이 남군의 공조였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그는 유비에게 귀순하기 전에 동오의 관리였다는 것이다.

 

먼저 방통과 관련된 군태수를 살펴보자. 주유(周瑜)가 강릉성(江陵城)을 함락시킨 후,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삼았다."

 

주유이전에 남군태수는 분명히 유표(劉表)가 임명했을 것이다.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이 형주 전부를 가지고 조조에 투항했으며, 조조의 주요 장수, 신하들 중에서 아무도 남군태수를 맡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이때의 남군태수는 여전히 유표시기에 임명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주유이후에 정보(程普)가 한동안 남군태수를 대리했다.

 

유비가 강남을 평정한 후, "장비(張飛)를 의도태수(宜都太守)로 삼았다...나중에 남군으로 옮겼다." 남군으로 옮겨서 주둔했다는 것인지, 남군태수로 옮겨갔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고 의문이 남아 있긴 하다.

 

다시 그 후에 미방(縻芳)이 남군태수에 임명된다. 남군을 빌린 후, 손권은 유비를 형주목(荊州牧)으로 추천했다. 이는 유비가 형주목의 자리를 얻은 것은 손권의 승인을 받은 것이고, 유비에게 형주의 관리를 임명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정보라는 강하태수(江夏太守)는 즉시 되돌아가 계속하여 강하태수의 직을 수행했다.

 

다시 방통이 공조에서 유비에게 귀순하여 관직을 받은 것을 얘기해보자.

 

사마휘(司馬徽)는 방통과 얘기를 나눈 후,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를 남주사인(南州士人)의 영수라 칭하고, 그이후 방통의 명성은 점점 유명해진다. 명성을 얻은 후, "남군은 그를 공조로 임명했다."

 

나중에 주유는 "선주(유비)를 도와 형주를 취하고, 남군태수에 임명된다." 주유가 사망하고, 방통은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동오로 간다. 방통은 양양(襄陽) 사람이다. 양양은 남양군(南陽郡)에 속한다. 그가 처음 공조를 맡은 것이 남양군인지 남군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한가지는 확정할 수 있다. 방통이 공조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주유가 남군태수에 임명되기 전이다.

 

<강표전(江表傳)>은 유비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경은 주공근(주유)의 공조이다." 이는 설명한다. 주유가 남군의 태수가 된 후, 원래 남군에 있던 관리들을 인수했다는 것이다. 즉 주유가 남군태수가 된 후에 비로소 방통을 공조에 발탁하여 임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통은 어떻게 유비의 사람이 되었는가?

 

유비가 대리형주목이 되고, 방통은 뇌양령(耒陽令)으로 있었는데, 뇌양현을 잘 다스리지 못해, 면직된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유비가 형주를 접수한 후, 방통이 형주목 유비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비서직 인원들이 너무 많아서, 유비는 방통을 잘 몰랐던 것같다. 그래서 먼저 그에게 실직을 주어서 뇌양현으로 가서 현령이 되게 했다.

 

반드시 설명해야 할 것은 유비의 이 임명은 절대 좌천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를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비는 자신이 차지한 지역이 그다지 넓지 않았으므로, 그 밑에서 실권을 지닌 현령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방통은 제갈량이 아니다. 그저 이론만 있을 뿐, 실무가 부족했다. 그래서 면직당한 것이다.

 

이때 노숙이 나서서 말한다. 그는 유비에게 서신을 뜬다. 방통은 실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일 그에게 치중(治中) 혹은 별가(別駕)같은 류의 직무를 맡긴다면 그는 천리마처럼 잘 달릴 것이다. 유비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이후 제갈량이 같은 말을 했을 때, 비로소 방통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게 된다.

 

한번 얘기를 나눈 후, 유비는 방통을 중용한다. 그를 자신의 곁에 남겨두고, 치중의 직을 맡겼다. 즉 곁에서 일하는 비서이다.

 

얼마 후 방통은 다시 제갈량과 함께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에 임명된다.

 

2년후, 유방(劉璋)은 유비에게 사천으로 들어와 장로(張魯)를 막는 것을 도와달라고 청한다. 유비가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자, 방통이 유비를 설득하고, 그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간다.

 

방통과 동오사람간의 교제를 보면, 당시 주유가 태수로 있는 남군에서 공조를 지내고, 주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동오의 수도로 간 적이 있다. 방통은 유명했기 때문에, 떠날 때 육적(陸績)등이 그를 배웅한다. 방통의 일관된 태도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할 때 그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들 배웅나온 사람들은 아주 기뻐했고 서로 친구가 된다. 그래서 노숙이 방통을 추천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방통은 명성이 점점 커지면서 군에서 공조로 임명되었다. 적벽대전이후 정권의 교체로 주유의 공조가 된다. 그후에 주유가 사망하면서 손권이 남군을 유비에게 주어버린다. 방통은 다시 유비의 부하가 된다.

 

그렇다면 방통은 왜 동오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기실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정권교체이다.

 

원래 집단의 인원은 남아서 계속 새정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주 정상이다. 여포의 수하인 장료, 원소의 부하인 신비, 최염 등등이 그러하다.

 

둘째, 당시 손권, 유비는 연합상태였다.

 

형조의 원래 관료체계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특히 상호간에 이동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연맹관계가 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위층에서 각자 원래의 인원을 그대로 유지하고 바뀌지 않은 원인이다.

 

즉, 방통이 유비의 수하가 된 것은 완전히 정권교체로 인한 부득이한 결과인 것이다. 아무런 주관적인 요소가 없다.

 

특히 당시의 방통은 근본적으로 동오집단의 핵심인물이 아니다. 심지어 골간성원이라 할 수도 없었다.

 

손권이 내심으로 유비가 서천을 취하기를 바래서, 방통을 심어서 그를 따르게 하였다는 것은 역사상 아무런 증거가 없다.

 

실제상황은 손권은 유비와 함게 촉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부 은관(殷觀)은 유비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설득한다. 그래도 손권은 손유(孫瑜)를 병사와 함께 보내지만, 유비가 이를 막았다.

 

손권은 유비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할 수 없이 손유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한다.

 

나중에 유비가 사천에 들어가고, 관우를 형주에 남긴다. 손권은 그 말을 들은 후 대노한다. "활로(猾虜, 교활한 오랑캐)가 감히 나를 속여!" 이는 손권이 유비에게 속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속았다면, 방통이 유비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간 것은 분명 손권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방통의 건의에 대해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그저 중책을 채택했다. 그것은 유비가 안정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방통의 계책은 너무 급진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방통은 왜 군진의 앞에서 죽었을까? 이는 그저 방통이 승리를 거두고 싶어하는 조급한 마음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중전투에서 유비도 그런 행동을 보인 적이 있다. 법정이 유비의 앞을 막아서 비로소 유비가 뒤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방통은 왜 장병들의 공성전에서 앞으로 나가 격려하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게 된 것은 그저 순수한 의외사건이다. 유비가 낙성(雒城)을 공격한지 1년여가 지났고, 오랫동안 야외에 노출되어 있었다. 설마 그는 조급하지 않았단 말인가. 혹은 유비가 그를 앞으로 내보낸 것도 음모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할 것은 방통이 동오의 사명을 띄고 유비에게 갔다는 것은 사서에 아무런 단서가 없다는 것이다.

 

손권은 방통을 접견한 바 없다. 그러면 누가 방통이 이런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안배할 수 있단 말인가? 노숙일까?

 

이렇게 국가급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파견하는데, 노숙은 그저 말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뿐 의사결정자가 될 수는 없다. 말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손권의 뜻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사서에 근본적으로 손권이 방통을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어떤 일은 직접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암시를 남겨둔다. 이런 사례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조조가 서주에서 도살할 때이다. <삼국지>에는 이렇게 썼다: "소과다잔륙(所過多殘戮, 지나가는 곳에 살륙이 많았다)" 방통이 동오에 사명을 띄고 갔다는 것은 아무런 단서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저 추측이라면, 추리소설에서도 그렇게 써내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