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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초선(貂蟬)의 아들이 선비(鮮卑)의 10만철기를 대파했다?

by 중은우시 2020. 11. 21.

글: 문재봉(文裁縫)

 

먼저 얘기할 것은 "초선(貂蟬)"이 원래 인명(人名)이 아니라, 한나라때 시종관원(侍從官員)이 쓰는 관모(官帽)의 장식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검으면서 얇고, 얇으면서 가볍고, 가벼우면서 뚤려 있어 아주 아름다웠다. 후궁에 모자를 관리하는 관직을 별도로 설치했는데, 사람들은 '초선'이라는 말로 이런 모자를 관리하는 여관(女官)을 지칭했다. 나중에는 미녀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쓰이게 된다.

 

다음으로, <삼국지>에는 초선에 관한 여하한 기록도 없다. 가장 먼저 초선이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은 <삼국지평화(三國誌評話)>라는 책이다. 책에 따르면 초선의 성은 임(任)이고, 원래 여포(呂布)의 처였다. 임도(臨洮)의 전란중에 여포와 헤어져서 나중에 왕윤(王允)의 집으로 흘러들어간다. 초선이 향을 사르고 달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왕윤은 연유를 묻는다. 그때 그는 연환계를 구상한다. 그녀를 동탁의 집에 보내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한다. 

 

원나라때 무명씨의 <금운당미녀연환계(錦雲堂美女連環計)>라는 잡극에서도 이 설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내용을 훨씬 풍부하게 만든다. 거기에서는 초선의 성이 임(任)이고 이름이 홍창(紅昌)이라고 한다. 궁안에 들어가서 초선관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초선'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나중에 여포의 처가 되었으나, 전란중에 흩어지고, 왕윤이 그녀를 얻게 된다.

 

<삼국연의>는 위의 두 이야기의 기초 위에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다. 초선에게 설정해준 최초의 역할은 왕윤의 집에 있는 가기(歌妓)였다. 아름답고 총명하여, 왕윤이 친딸처럼 여겼다. 동탁이 포악하여 한나라조정이 무너지려 하자, 스스로 왕윤을 도와 '연환계'를 쓰겠다고 청한다. 자신의 몸을 호랑이에게 미끼로 던져서, 교묘하게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오가며,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주살하겠다고 한다.

 

확실히 위의 셋은 모두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는 동탁의 시비(侍婢)와 사통했다"는 문구를 가지고 멋진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여포전>에 배송지의 주석에서 인용한 <영웅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포는 진궁, 고순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말을 타고 나가서 태조(조조)의 군량보급로를 끊고자 했다. 그런데 여포의 처가 이렇게 말한다: '장군은 스스로 나가서 조공의 보급로를 끊으려 하십니까....첩이 예전에 장안에 있을 때, 이미 장군에게 버림을 받아 방서의 첩이 된 적이 있는데, 지금도 첩은 돌보려 하지 않으십니까' 여포는 처의 말을 듣고는 고민에 빠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에 근거하여, <삼국연의>는 여포가 동탁을 죽인 후, 초선을 첩으로 삼았다고 쓴다. 여포가 조조에 붙잡혀 죽임을 당할 때, 조조는 "여포의 처와 딸을 싣고 허도로 돌아왔다. 삼군에게 크게 상을 내리고, 병사들을 회군시켰다." 즉, 초선은 전리품으로 허도에 데려간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의 잡극 <관공월야참초선(關公月夜斬貂蟬)>에서는 이렇게 쓴다: 유비, 관우, 장비가 하비(下邳)를 물에 잠기게 만들고, 여포를 생포한다. 장비는 초선을 포로로 잡아서, 관우의 침상을 정리하고 이불을 깔도록 보낸다. 관공은 밤에 <춘추>를 읽다가, <춘추>에 나오는 내용이 모두 요녀가 나라를 망치는 이야기인 것을 보고, 초선을 죽여서 화근을 없앴다.

 

아마도 사람들이 '초선을 죽였다'는 것은 너무 잔혹하고, 관우의 이미지에 해가 된다고 여겼는지, 이 극은 다시 고쳐쓰게 된다. <관공월하석초선(關公月下釋貂蟬)>. 즉, 조조가 관우를 회유하기 위해, 초선과 적토마를 같이 관우에게 보내는데, 관우는 적토마만 남기고, 초선은 풀어주어 떠나게 한다는 것이다.

 

어째되었건, 관우와 초선은 서로 관계를 맺게 된다.

 

왜 사람들은 관우와 여포의 처인 '초선'을 연결시켰을까? <위씨춘추(魏氏春秋)와 배송지가 주석으로 <삼국지.관우전>에 끌어온 <촉서(蜀書)>에 기록된 한 가지 사건과 관련이 있다: 관우와 조조는 함께 여포를 공격했는데, 싸우기 전에 관우는 조조에게 부탁을 한다. 성을 함락시킨 후, 여포의 부장(部將) 진의록(秦宜祿)의 처를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하비성을 함락시킨 후, 조조는 진의록의 처를 보고는 색심이 동하여, 마음이 바뀐다. 그래서 진의록의 처를 자신이 거둔다. 민간에서는 '진의록의 처'를 초선이라고 쓴 것이다. 그렇게 하여 후세에 전해지는 희곡에서 '관우가 초선을 첩으로 거두었다'라든지, '관우가 초선을 죽였다'라든지, '관우가 초선을 풀어주었다'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진의록의 처는 전설에 나오는 '초선'의 원형중 한명이다. 조조는 이 '초선'을 얻은 후, 첩으로 삼는다. 당시 이 '초선'은 아들을 하나 데리고 있었다. 즉 그녀와 진의록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이름은 진랑(秦朗)이다. 조조는 그녀와 그에게 잘 대해준다. '초선'을 첩으로 거두었을 뿐아니라, 진랑도 양자로 거두어 매우 총애한다.

 

조조는 일찌기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자랑한 바 있다: "너희는 나처럼 의붓아들을 총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조조가 진랑을 총애했을 뿐아니라, 조조의 아들인 조비도 진랑에게 잘 대해주었다.

 

진랑의 인생에서 전성기는 조조의 손자인 위명제(魏明帝) 조초(曹轈)의 재위기간이다. 조초는 진랑을 아주 좋아했고 뭐든지 그와 상의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호화로운 저택도 지어주고, 그의 아명인 "아소(阿蘇)"라고 불렀다. 진랑의 권세는 신속히 커지고, 재산도 많아진다. '공후(公侯)와 맞먹을 정도였다'

 

위명제 태화6년(232년), 위나라의 대장 소상(蘇尙), 동필(董弼)이 선비족의 우두머리 가비능(軻比能)에게 누번(樓煩)에서 참살당한다. 위명제 조초는 진랑을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임명하여, 선비와 싸우게 한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가)비능은 무리가 강성하여 십여만의 기병을 거느렸다." 선비족은 아주 강력한 적수이다. 다만 진랑은 일거에 선비를 격파하여, 가비능을 멀리 막북으로 쫓아낸다. 그후 수년간 "막남(漠南)에는 선비의 왕정(王庭)이 없었다."

 

이를 보면 진랑은 일반적인 총신, 농신이 아니다. 아주 능력있는 능신이었다.

 

위명제 조초는 죽기 전에 진랑과 연왕(燕王) 조우(曹宇), 영군장군(領軍將軍) 하후헌(夏侯獻), 둔기교위(屯騎校尉) 조조(曹肇), 무위장군 조상(武威將軍) 조상(曹爽), 태위(太尉) 사마의(司馬懿)를 함께 탁고중신(托孤重臣)으로 지정한다.

 

아쉽게도 이후의 정치투쟁에서 사마의가 대권을 장악하고, 진랑은 관직을 파면당하고 쫓겨난다. 그러나, 진랑의 아들은 나중에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아래에서 박사(博士)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