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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유한평(劉漢平): 중국혁명에 투신한 한국인

by 중은우시 2021. 2. 10.

글: 고효양(顧曉陽)

 

1

 

유한평은 한국인이다. 일찌기 필자는 나의 부친의 역사문제를 고발하는 대자보에서 이 이름을 보았다. 대자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한평은 중공 6대중앙위원이고,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시위서기를 지냈다, 1930년대, 필자의 부친은 북평에서 소학교 교원을 지냈으며, 두 사람은 밀접하게 교류했다. 유한평은 직업혁명가이고, 시종 위험하고 어렵게 살았다. 나의 부친은 자주 그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민국시기 소학교 교원의 수입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때부터, 유한평이라는 역사에 잊혀진 이름은 나의 마음 속에 기억되게 된다.

 

유한평은 1937년 봄에 연안(延安)으로 왔다. 당시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의 부인인 님 웨일즈가 거기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연안에는 도서관이 있고, 도서관에는 영문서적이 있었다. 님 웨일즈는 도서대출리스트에 가장 많이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이 김산(金山, 즉, 유한평)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중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아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취재하고 싶다고 요구한다. 그녀는 유한평과 몇주동안 장시간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7권의 노트에 이를 기록한다. 그 사이에 마침 7.7사변이 발생한다. 나중에 그녀는 유한평의 전기 <아리람 - 중국혁명중의 한 조선공산당원>이라는 전기를 1941년 미국에서 출판한다.

 

1938년 10월, 섬감녕변구(陝甘寧邊區, 섬서, 감숙, 영하) 보안처(保安處)는 트로츠키파, 일본특무라는 죄명을 씌워 유한평을 비밀리에 처형한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3살이었다.

 

유한평은 신비한 인물이고, 여러 별명이 있다. 예를 들어, 장치달(張致達, 전해지는 바로는 그의 본명이라고 한다), 장명(張明), 김산(金山), 이철암(李鐵庵)등이 있다. 그는 1905년 평양 교외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다. 일찌기 일본유학을 했고, 나중에 만주로 간다. 소련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에 장기간 거주하게 된다. 14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근 20년을 중국에서 생활하며 짧지만 풍부하고 전설적인 일생을 보내게 된다.

 

1920년대, 상해에는 여러 조선인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일부 유명한 망명지도자들은 조계지역에 거주했다. 유한평은 비록 어렸지만, 거의 모든 사람과 알고 지낸다. 그는 테러주의자집단인 의열단(義烈團)의 지도자들과 관계가 아주 밀접했고, 그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의열단은 비밀조직으로 전문적으로 일본인을 암살했다. 상해에서만 그들은 12개의 비밀무기공장을 가지고, 폭탄을 제조했다. 무기공장을 주관하던 사람은 마틴이라는 독일인이며, 의열다의 핵심구성원이었다. 그는 아무런 주의도 없고, 그저 테러활동에 심취했으며, 독일인과 일본인을 미워했다. 유한평은 또 다른 2명의 유명한 테러리스트영웅인 김약산(金若山)과 오송연(吳松淵)과도 교분이 깊었다. 당시 그는 겨우 16살이었는데 30살의 오송연의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오송연은 명사수였고, 일찌기 상해부두에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한 바 있다.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올 때, 그는 8미터 거리까지 접근하여 총을 들고 쏘았다. 다나카의 앞을 지나가던 한 미국부녀가 놀라서 몸을 돌려 다나카를 껴안는다. 그 결과 총3발은 모두 그 부녀가 맞고, 다나카는 전혀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땅바닥에 쓰러져 죽은 척한다. 오송연은 암살이 성공했다고 여기고 신속히 도망쳤다. 다나카는 당시 육군대신이었고, 나중에 일본수상이 된다. 악명높은 '중국병합'의 '다나카상소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나중에 의열단은 이념의 차이로 3부분으로 나뉜다. 그중 일부분은 공산주의자가 되고, 유한평은 바로 그중의 한명이다.

 

1921년, 유한평은 상해에서 천진으로 가 남개대학에서 공부한다. 당시 남개대학에는 6명의 조선인학생이 있었다. 그중 1명이 바로 김염(金焰)이다. 남계대학 가을운동회에서 김염은 달리기에 참가하여 월등히 앞서같다. 그러자 한 중국인이 말한다: "이건 이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인의 주구이기 때문이다." 김염은 그 말을 듣고, 뛰어 올라가 그를 두들겨 팬다. 그러자 직원들이 김염을 붙잡아 구타했다. 이로 인해 김염과 유한평등 6명의 조선인은 분개하여 퇴학한다. 김염은 나중에 상해로 가서 영화계의 대스타가 된다. 두번 결혼하는데, 첫번째 부인은 왕인미(王人美)이고, 두번째 부인은 진이(秦怡)인데, 모두 중국 최고의 미녀들이었다.

 

1923년, 유한평은 북경에서 청년단에 가입한다. 다음 해, 그는 김정창(金正昌)과 북경조선공산당을 건립한다. 얼마 후, 모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이 조직을 중국공산당에 통합시킨다. 김정창은 일찌감치 조선에서 스님으로 지냈다. 그는 절에서 불법에 정통했을 뿐아니라, 서양철학도 연구해서, 칸트, 헤겔, 스피노자등의 책을 읽었다. 특히 헤겔을 존경하여 헤겔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1925년, 대혁명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도 아주 흥분한다. 속속 그 중심지인 광주로 간다. 유한평도 광주로 갔고,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이 된다. 동시에 중산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운다. 김정창은 이론가이고, 광주에서 신문을 만든다. 다나카를 암살한 오송연은 황포군관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1927년, 광주의 조선인은 800명에 달한다. 소련고문 미하일 보로딘의 주변에는 유한평등 조선인 뿐아니라, 베트남인(호지명), 대만인, 인도인도 있었다.

 

북벌군이 성립되고, 다수의 조선인들은 장발규(張發奎)의 "철군(鐵軍)"에 참여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정잠(程潛)의 제6군등 부대에 소속된다. 그들은 대부분 지식인이고, 용맹하며 겁이 없었고, 지도력이 있었다. 유한평은 그러나 계속 광주에 남아 있는다.

 

4.12정변후, 유한평, 김정창, 오송연등 조선인들은 섭정(葉挺), 장태뢰(張太雷)등이 이끈 광주폭동에 가담한다. 오송연등은 명을 받아 장발규를 잡으려 한다. 그들은 장발규의 부하는 일망타진했지만, 장발규만은 잠옷을 입고 도망쳤다. 유한평은 공농무장부의 업무를 책임졌다.

 

폭동에 실패한 후, 김정창은 광주의 여자친구집에 숨어서 화를 피한다. 유한평, 오송연은 잔존부대를 따라 해륙풍(海陸豊)소비에트 팽배(彭湃)의 휘하로 들어간다. 팽배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고, 유한평은 그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팽배를 아주 존경했다. 만일 팽배가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중국에서 가져본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군중지도자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고, 모택동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1929년, 구사일생으로 유한평은 북평으로 가고, 중공 북평시위서기가 된다.

 

1930년이후, 그는 두번 체포되고, 두번 모두 조선으로 송환된다. 그러나 두번 모두 다시 조선에서 북평으로 밀항해온다. 옥중에서의 혹형은 그의 건강을 해쳤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당이 그를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1차로 되돌아온 후, 그는 조선동포인 한(韓)모의 모함을 받는다. 그가 북평에서 책임자로 있을 때, 한을 조사한 바 있고, 나중에는 한이 책임자가 된다. 그리하여 유한평이 북평으로 되돌아온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도망쳐서 돌아올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낸다. 혹시 일본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특무라는 죄명의 원인이다. 그는 빈곤과 병마에 시달렸고, 고통스러워하고, 분노하고 절망했다. 하루는 그가 칼을 한 자루 가지고 한의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칼을 탁자에 꽂고 말한다: "5분내에, 네가 나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 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서 눈물만 흘렸다. 그는 이것을 한이 두려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부끄럽고 치역스러워 흘리는 것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칼을 그대로 탁자위에 남겨두고 떠난다.

 

그는 살기가 어려워, 시를 쓰고 번역을 하면서 얄팍한 원고료로 살았다. 그중 한 번역서가 출판된 후에, 트로츠키파의 간행물에 광고가 실린다. 이것이 그가 트로츠키파라는 의심을 받게 된 연유이다.

 

제2차 체포떄, 그를 사랑하던 여자 조아평(趙亞平)이 연루된다. 조아평은 하북(河北)사람이다. 그녀는 체포후에 가족이 보석금을 내서 풀려난다. 그리고 유한평이 북평으로 다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결혼한다. 이때가 1934년이다.

 

1935년, 유한평은 석가장에서 가정교사의 일을 잡는다. 부부는 그곳으로 간다. 비록 그는 조직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지만, 혼자서 적극적으로 일했다. 길지 않은 기간동안 도희진(陶希晋, 陶魯笳의 형), 마차청(馬次靑)등을 입당시킨다. 그리고 석가장지부를 건ㄹ비한다. 북방국은 석가장지부를 승인한다. 그러나 유한평과의 관계는 여전히 회복해주지 않았다. 얼마 후, 가르치던 아이가 버릇없이 굴자 가정교사직을 사임하고, 두 사람은 다시 북평으로 돌아간다.

 

그는 혼자서 섬북(섬서 북부)으로 갔고, 거기서 처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2

 

유한평은 키가 크고, 용모가 비범했다.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어렸을 때 상해에서는 큰 뜻을 품고 자신을 단련해서, 남녀관계 ,연애, 혼인은 모두 혁명에 헌신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여겼다. 북평에 와서 한 아가씨가 계속 공략하는 바람에 그는 처음으로 연애를 했었다. 조아평은 그의 일생에서 두번째 여성이었다. 

 

그는 평생 정식 졸업장은 받은 적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그는 평생 공부했다. 일본동경제국대학 예과도 다녔고, 만주에 설치된 조선독립육군군관학교도 다녔으며, 상해 조선인들이 만든 영생학교, 천진 남개대학, 북경협화의학원, 광주 중산대학을 다녔다. 그는 독서를 좋아했고, 시문에 능했으며 재능이 발군이었다.

 

그는 언어분야의 천재였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정통했고, 독일어, 영어, 라틴어도 알았으며 ,몽골어도 약간 알았다. 그는 세계어와 한어의 라틴화를 연구했다.

 

그는 어렸을 때 기독교를 믿은 바 있고, 평생 톨스토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굳건한 공산주의자이면서, 시종 톨스토이의 영향을 벗어나지 않았다. 광주에 있을 때, 그는 항상 톨스토이의 책을 지니고 다니면서 매일 읽었다. 해륙풍에서 그는 지주의 잔혹한 행동을 보고 마음 속으로 참지 못했다. 그가 인민법정의 법관이 되었을 때, 그는 살인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아무런 증거도 없을 뿐아니라, 그저 얼굴이 하얗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법관직을 사직한다. 그는 일찌기 팽배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런 도살은 너무 잔혹하다. 팽배는 계급이론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팽배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의 전율은 시종 사라지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내심의 갈등은 그의 사상을 더욱 깊이있게 만들고, 인격을 더욱 비범하게 만들었다.

 

조아평은 7.7사변후, 기중(冀中, 하북중부)근거지로 가서, 기중구 항일부구회(抗日婦救會) 주석이 된다. 1938년 하룡(賀龍)이 120사단을 이끌고 기중으로 와서 전투를 벌인다. 조아평은 부녀자들을 조직하여 부상입은 병사들을 치료해주고, 물과 식사를 보내주어 부대에 큰 도움이 된다. 나중에 하룡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기중의 군중이 팔백만인데, 너의 병사가 절반이다. 너의 부하는 나보다 많다. 너는 명실상부한 조사령관이다." 그리하여, '조사령관'이라는 별명이 기중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유한평이 피살당한 일을 조아평은 얼마 후에 알게 된다. 그녀는 큰 압박을 받았다. 그후 그녀의 일생은 모두 그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상사인 사립덕(史立德)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김산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해방후, 조아평은 임업부에서 사장(司長, 우리나라의 국장에 해당함)을 지낸다. 그녀는 유한평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일찌기 나의 부친을 찾아와서 방법을 논의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때 그들은 아무 방법이 없었다. 1983년이 되어, 중앙조직부는 마침내 문건을 내려보내, 유한평은 철저히 명예회복되고, 당적도 회복된다. 1994년, 신화사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번역해서 출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