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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오중간첩(五重間諜)" 원수(袁殊)의 말년생활

by 중은우시 2020. 10. 23.

글: 송춘단(宋春丹)

 

1977년 5월, 베이징역. 한 열차가 막 도착했다. 플랫폼에는 32살된 증룡(曾龍)이 약속한 열차칸의 중간위치에서 긴장한 상태로 양쪽 차문으로 하차하는 승객들을 보면서, 이미 22년간 헤어져 있던 부친을 찾았다.

 

그의 부친은 바로 해방전에 국민당 군통, 중통, 왕정위정권, 일본특무기관에 들어가 '오중간첩'이라고 불리던 공산당 정보요원 원수였다. 이는 원수가 1955년 반한년(潘漢年)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허가받은 귀휴였다. 

 

아마고 과거의 직업습관때문인지, 그는 서신에서 증룡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홍기>잡지를 한권 들고, 8살짜리 딸을 데리고 오라고. 서로 알아보기 편하게. 그러나 증룡은 부친을 알아볼 자신이 있어서, 부친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다.

 

열차칸의 승객은 몇명 남지 않았다. 증룡은 돌연 차창가의 한 노인을 발견했는데, 낯이 익어보였다.

"혹시 무한에서 오신..."

"네가 증룡이구나!"

 

그 노인은 창로하고 마르고 왜소하며 두 뺨이 푹 파여 있으며, 안색이 초췌했고, 왼쪽 다리는 약간 절었다. 증룡이 어렸을 때의 기억에 남아 있는 단단하고 눈빛이 강렬하던 부친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22년간 보지 못했으니 "아빠"라는 말이 입에서 차마 나오질 않았다. 그리하여 그후 증룡과 그의 형제자매들은 그를 "라오털(老頭兒)"이라고 부르게 된다.

 

귀래(歸來)

 

1975년 6월, 증룡의 큰누나 마원희(馬元曦)는 돌연 부친 원수로부터 서신을 하나 받는다. 편지는 단 1장이었고, 간단하게 자신은 5월부터 진성감옥(秦城監獄)을 떠나 호북 무한의 대군산소관소(大軍山少管所)로 옮겼으며, 통신을 허가받았다고 한다. 자녀들에게 회신을 해주고, <모주석어록> 몇권을 보내달라고 했다.

 

마원희는 회신하지 말자고 했다. 1달여간 망설인 후, 증룡은 3권의 <모주석어록>을 부쳐준다. 다만 답장을 쓰지 않았다.

 

얼마후, 원수로부터 회신이 왔다. 간절하게 가족들 상황을 알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증룡이 회신을 썼다. 얼마 후 원수로부터 만언가서(萬言家書)를 받는다.

 

서신에서 자신은 답장을 일고 아주 기뻤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다고 적였다. 자신이 부친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해서 부끄럽고 천하에 이보다 더 유감스러운 일은 없다고 하였다. 5명의 자녀들이 이미 일자리를 찾았고, 가족을 이루었으며 그중 3명은 고등교육까지 받았고, 길거리를 유랑하지 않았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증룡은 부친과 4년간 편지왕래를 했다.

 

1976년 7월, 원수는 돌연 서신에서 이미 귀휴를 신청해서, 북경으로 가서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증룡과 형제자매들의 심정은 복잡했다.

 

원수는 5명의 자녀가 있었다. 1940년 첫번째 부인 마경성(馬景星)과 이혼한 후, 큰 딸 원희(袁曦)는 마원희로 개명한다. 항전승리후, 원수는 상해를 떠나 해방구로 가고 이름을 증달재(曾達齋)로 고친다. 유명한 '매국노 원수'는 이때부터 사라진다. 그는 두번째 부인 왕단(王端, 원래이름은 端木文琳)과의 사이에 4명의 자녀도 이때 증소(曾昭), 증요(曾曜), 증룡(曾龍), 증호(曾虎)로 개명한다. 

 

1955년 원수가 체포될 때, 왕단은 이미 그와 이혼했고, 상해에 살았다. 22살의 큰 딸 마원희는 북경외국어학원에서 근무했고, 둘째 딸 증소는 12살, 셋째딸 증요는 11살, 큰아들 증룡은 10살, 막내아들 증호는 9살이었다. 나이어린 아이들은 북경 남장가 근로후통 20호에 산다. 생활은 중조부(中調部)에서 1인당 매달 20위안씩 주는 보조금으로 살았고, 거의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 

 

"기실 어렸을 때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부친이다. 왜냐함녀 나는 계속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체포된 후 몇년간 나는 항상 그를 생각했는데, 그후 점점 생각지 않게 되었다." 증룡의 말이다.

 

증룡은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했다. 부친은 왜 그냥 착실한 신문기자로 살지 않았을까? 신문기자는 아니라도 인쇄소의 직원이 되었으면 그래도 노동자로 칠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이런 직업을 선택했으면서 왜 또 자식은 이렇게 많이 낳은 것일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우리는 정치의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았는가?

 

원수가 북경으로 돌아온 첫 일요일에 일가가 증소의 집에 모인다. 원수는 모두에게 그가 가져온 군사법정 판결문을 내놓는다. 원문은 첨부까지 합쳐서 8페이지였다.

 

1965년 원수는 국민당CC특무, 군통특무, 일본특무, 한간으로 유기징역 12년형을 받았다. 그는 원래 1967년에 만기석방되어야 했다. 그러나, 문혁으로 인하여 다시 8년을 더 갇혀 있었던 것이다.

 

판결문을 보고 증룡과 증호는 깜짝 놀란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읻. 부친이 정말 말 그대로 반혁명분자일 줄은.

 

한번씩 돌아가며 읽고난 후, 구석에 앉아 있던 원수가 입을 연다: "이것은 사실의 한 측면이다. 다른 측면에서 내가 한 모든 일은 당의 지시를 받아서 한 것이다." 

 

대군산농장에서 25일간 휴가를 허락했고, 원수는 자녀, 친척들과 단지 3,4번 만났을 뿐인데, 정확하게 모든 사람의 성격과 특징을 말했다. 이 점을 증룡은 아주 탄복한다. "역시 노련한 특무에 부끄럽지 않다."

 

1978년 여름, 증호는 대군산농장으로 원수를 만나러 가서 3일간 머문다. 증호는 이렇게 말했다. 원수의 일은 채소밭을 돌보는 것이었고, 평방(平房)에 살았다. 방안에는 구독하는 신문잡지가 있었다. 그는 증호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인방이 타도되었으니, 그는 어떤 문제에 대하여 분명히 새로 규정하게 될 것이라고.

 

증호는 말했다. 부친이 과거에 국민당을 위해서 일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일본인을 위해서 일한 것은 매국노이니, 자녀로서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한참을 침묵하더니 원수가 말한다. 자신은 일찌기 가신을 감옥하는 이대장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고: "네가 해방군에서 병사로 있는데, 너의 연대장이 적진으로 돌진하라고 하면, 너는 명령을 위반할 수 있느냐"

 

거무입족지처(居無立足之處)

 

1980년 1월 원수는 세번째로 휴가를 받아 북경으로 온다. 

 

이때, 그는 이미 반신불수상태였다. 치료후에 병세는 약간 호전되었다. 1월 3일의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장수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은 도둑이다!"

 

앞에 두번 북경으로 왔을 때는 원수가 조직에 새로 심사해달라고 신소(申訴)를 냈다. 그러나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이번에는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원수는 연속하여 일부 20여년전의 옛날에 알던 사람들을 만났고, 하연(夏衍), 이일맹(李一氓), 웅향휘(熊向暉)등 옛날 은비전선(隱秘戰線)의 옛전우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도 보낸다.

 

원수는 이번에 북경으로 오기 전에 자녀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증룡은 할 수 없이 그를 자신이 있는 영안리의 8평방미터짜리 작은 빈집에 모셔야 했다.

 

그때는 한겨울이었다. 원수는 진성감옥에 있을 때 뇌혈전을 앓아 손발이 불편했다. 자주 힘을 많이 들여도 난로를 켜지 못하곤 했다. 증룡은 매번 그를 보러 갈 때마다 침대에서 기침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러번 일기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고. "천하가 이렇게 넓은데, 나는 거의 길거리에서 유랑하고 있는 것같다."

 

기자의 눈앞에 있는 이 일기책은 검은색 가죽표지에 붉은 색과 흰색의 두 송이 추국(雛菊)이 있다. 안에는 짙은 남색의 볼펜으로 쓴 글이 있다. 글자는 선명하고, 날짜도 끊어지지 않았다. 날짜사이에는 한줄을 남겼다. 날짜는 굵고 깊게 써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루는 원수가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을 닫아 잠겼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광경은 바로 현재의 정치적 처지이다. 문은 꽉 닫혀 있고, 열쇠는 방안에 있다. 사람은 방밖에 있더서 드나들 수가 없다."

 

1980년 2월 24일, 당시 중조부 노간부국 국장으로 있던 곽달개(郭達凱)는 원수에게 300위안의 의약비를 보내준다. 그리고 그와 근 1시간동안 얘기를 나눈다. 그는 알았다. 그가 쓴 자료가 이미 정식으로 조직에 제출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중조부정책실시판공실에 기록이 넘어왔다는 것을. 그는 그 자리에서 요구한다: "국내에서 나는 이미 쓰레기나 다름없다. 나를 풀어줘서 활동하게 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증룡은 발견한다. 그후의 2주동안 부친은 기분이 아주 흥분되어 있었다. 그는 알았다. 부친은 계속 옛날에 했던 일을 하려는 것이다.

 

2월 29일, 원수는 중조부 부장 나청장(羅靑長)에게 서신을 쓴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9월 28일 그는 최고인민법원의 서신ㅇ르 받는다. 그에게 일부 상황에 대한 보충설명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처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원수는 책을 읽고, 신문을 보고, 글을 쓰고, 라디오를 들어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떤 때는 혼자서 공원을 돌아다니거나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거나, 영화를 보았다. 길거리에서 꽃을 사기도 하고, 길거리음식을 사먹기도 했다. 그는 비용 하나하나를 일기장에 상세히 기록했다.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탄식하기도 했다: "하루종일 먹느라고 바쁘다!"

 

오중간첩

 

1980년 7월 원수와 관로(關露)를 모두 잘 아는 매익(梅益)의 소개로, 원수는 반한년사건에 같이 연루되었으며 감옥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관로와 함께 향산의 동궁2호의 방을 빌려서 살게 된다. 

 

이곳에서 원수의 셋째딸 증요의 남편이며, 장춘광학정밀기계학원에서 일하는 조여보(趙如寶)는 처음 장인인 원수를 만난다. 그는 원수에게 호기심이 많았다. 자신의 이 유명한 장인은 전혀 특무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대학교수같았고, 문인기질이 있었다.

 

1981년 8월, 관로는 방을 돌려달라고 했고, 원수는 다시 향산 남영에서 임차하여 거주한다. 기관정책실행판공실에 1년의 임대료를 선지급했다.

 

원수는 자주 혼자 집에서 작은 흑백TV를 보았다. 그때 TV드라마 <적영18년>이 방송되고 있었는데, 그는 증룡에게 경멸하며 말했다: "백구에서 지하공작을 하면서 저런 방식으로 하면 반나절도 버틸 수가 없다."

 

원수는 일찌기 증룡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은 "방상유명(榜上有名)"한 인물이다. 1946년, 그는 대립(戴笠)에 의해 국민당 군통직속 제3참 참장, 중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해방구로 들어갔다.

 

증룡이 물었다: "방상유명한데도 왜 다른 전범들 처럼 6,70년대에 특사를 받고 일자리를 받지 못했습니까" 원수는 말한다: "나의 상황은 다르다. 나는 공산당의 사람이다."

 

1931년, 당시 중공특무 정보과 과장으로 있던 반한년과 조수 구양신(歐陽新, 가명은 王子春)의 소개로, 20살된 원수는 상해에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특무공작을 시작한다.

 

1932년, 원수는 사촌형이며 장개석의 총애를 받던 가백도(賈伯濤)의 소개로 순조롭게 국민당 중통에 들어간다. 그후 중통의 우두머리 오성아(吳醒亞)의 "간사(干社)"에서 정보고(情報股) 고장을 맡는다.

 

1934년 가을, 단선연락인인 왕자춘이 돌연 실종된다(원인은 지금까지도 불명이다). 이런 긴급상황하에서, 조직을 찾는 과정에서 원수는 공산국제(코민테른) 극동정보국의 비밀정보원이 된다.

 

항전발발후, 두월생(杜月笙)의 소개로, 일본유학을 한 바 있는 원수는 국민당 군통의 우두머리 대립에게 채용된다. 반한년의 동의를 받아, 군통국 상해구 국제정보조 조장, 소장이 된다. 

 

1938년, "이와이공관(岩井公館)"의 추형(雛形)인 일본 외무성 정보부 직속기관인 상해일본총영사관 '특별조사반'이 성립된다. 부영사 이와이에이이치(岩井英一)이 이끌었고, 구성원은 모두 10여명이었다. 기본적으로 모두 일본인이다. 기자의 신분으로 이와이와 정보교환을 해오던 원수도 정보원으로 채용된다. 

 

이렇게 하여 원수는 말그대로 '오중간첩'이 된다. 당시 나이 27살이었다.

 

증룡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중공, 국민당, 일본인의 정보업무는 각자의 특색이 있지 않느나고, 원수는 말했다: 공산당은 조직기율이 엄명하고, 일본인은 일처리가 세심하고, 국민당은 동향등 인간관계를 중시해서 가장 상대하기 쉬웠다고 한다. 원수는 모든 일에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래서 각 세력간을 오가면서도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었다.

 

"엄중한 정치적 착오를 범하다"

 

1982년 8월, 반한년이 명예회복된다.

 

10월 7일, 원수도 마침내 명예회복된다. 이날 중조부와 공안부의 인원이 최고인민법원의 판결문을 보내왔다: 판결문에는 첫째, 본원1965년도형자제15호판결을 취소한다; 둘째, 원수의 무죄를 선고한다; 셋째, 원래 몰수한 재물을 환산한 가격 3,764.49위안을 반환한다.

 

명예회복후, 원수는 이휴간부퇴휴로 정국급(正局級)대우를 받았다. 서원의 중앙직속기관 대원(大院)에 4실1청의 주택을 배정받는다. 그는 더 이상 '증달재'로 불리지 않고 본명인 '증수'를 회복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말했다.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 원수라는 이름은 남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명예회복의 결론은 원수의 공헌을 인정했다: 당을 위해 중요한 전략적 정보를 제곻했다.

 

1940년, 원수는 '흥아건국"대표의 신분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그는 여러 채널의 정보를 모아, 일본에서 간첩활동을 하고 귀국후에 반한년에게 보고한다: "일본은 남진을 하여, 동남아를 쟁패하고자 한다". 1941년 6월, 소련과 독일의 전쟁이 발발한다. 중국과 소련은 일본이 북진하는지에 주목했다. 동쪽 전선에서 소련을 독일과 협공하는 것을 우려했다. 원수는 광범위하게 일본의 여러 군관들과 왕래하고, 최종적으로 '일본은 남진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고, 반한년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연안을 거쳐 소련에 알린다. 소련은 동쪽전선의 40만병력을 모조리 서선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므로 이 정보는 가치가 엄청났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중공에 감사를 표시했다.

 

명예회복후, 원수의 당령(黨齡)은 1946년부터 계산한다.

 

원수는 1931년 반한년의 소개로 입당했다. 1934년 조직관계를 코민테른 극동국으로 옮긴다. 제2차국공합작후, 반한년은 팔로군 주상해판사처주임이 되고, 원수는 몇년동안의 공작경력을 그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극동국에서 '귀대'하고 싶다고 요구한다. 반한년은 다시 그를 기용한다. 이때부터 원수는 반한년과 단선연락을 하며 통전, 정보공작을 한다. 항전승리때까지.

 

1938년 하반년, 원수는 대립이 불러 홍콩으로 가 군통골간회의에 참석하고, 반한년과 비밀리에 만난다. 반한년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는 비록 국공합작기간이지만, 본질적으로 양당은 대립관계이다. 한 사람의 전도는 관건적인 때 결정된다. 우로 가려면, 너는 그들을 따라서 일하고 그들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너는 대립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 되기 어렵다. 군통은 모조리 황포군관학교계통이다. 현재는 네가 결정을 해야 할 시기이다." 원수는 비로소 알았다. 자신의 조직문제가 여전히 결정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말했다: "저의 모든 일은 당신에게 맡겼습니다. 이렇게 저에게 물을 줄은 몰랐습니다. 조직문제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반한년이 말한다: "이후의 행동을 보겠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원수는 생각지도 못했다. 명예회복후 그의 당령을 1946년 새로 입당절차를 한 때부터 계산할 줄은. 한번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이 나를 속였다. 나의 15년 당령을 잘라내 버렸다."

 

그리고, 명예회복결론에도 꼬리가 하나 달려 있었다: "엄중한 정치적 착오를 범했다."

 

1939년, 원수는 국민당 군통의 명을 받아, 지하터널을 파서 76호왕정위정부의 특공본부를 폭파시켜, 미친 듯이 항일운동을 진압하던 이사군(李士群)을 제거하고자 했다. 계획을 추진할 때, 군통 상해참의 참장 왕천목(王天木)이 체포된 후, 배신한다. 그리하여 원수는 체포되었다. 이와이 에이이치는 일본의 '(梅機關)'의 우두머리인 가케사 사다아키(影佐貞昭)를 설득하여, 원수는 일본 외부성 정보요원이라는 것을 이유로, 76호로 하여금 원수를 이와이 에이이치에게 인도하게 한다.

 

1939년 11월, 이와이 이에이치의 요구로 원수는 <흥아건업론>을 써서 각 신문 잡지에 발표하여, 공개적으로 일본인과 합작한다. 왕정위를 견제하기 위해, 이와이 에이이치는 원수에게 전권을 주어 "이와이공관'을 조직하게 한다(즉, '흥아건업운동'본부). 나중에 원수는 왕정위정부에 가담한다. 이렇게 하여 유명한 '매국노'가 된다.

 

그리하여, 원수와 동시에 명예회복된 일부 동지들은 중앙에 서신을 보내, 원수는 체포된 후 배반한 바 있고, 일본에 투항하였으니, 진정한 매국노여서 명예회복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수는 자신이 한 모든 일은 반한년이 지시를 받은 것이었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반한년과 이와이 에이이치의 만남이다.

 

1941년 5월, 원수의 소개로 반한년은 "호월명(胡越明)이라는 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신분으로 이와이 에이이치를 만난다. 쟁점은 이와이 에이이치가 '호월병'의 진실한 신분을 알았느냐의 여부이다.

 

원수는 말한다. 반한년이 이와이 에이이치를 만나러 가기 전에, 반한년의 지시가 없는 상황하에서 그는 선참후주(先斬後奏)하여 이와이 에이이치에 반한년의 진실한 신분을 얘기해 준다. 그후 이와이 에이이치는 '호월명'과 서로 알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이와이 에이이치의 회고록에도 자신은 호월명이 반한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노간부업무를 책임지는 국장 주옥림(朱玉琳)은 증룡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수가 명예회복된 결론중의 "엄중한 정치적 착오를 범했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는 원수가 명예회복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말을 바꾸라고 말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니까. 그러나 원수는 끝까지 말을 바꾸지 않는다.

 

주옥림은 증룡에게 이렇게 말한다. 반한년은 갇혀 있던 동안, 문혁전에는 원수에 대하여 불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문혁후에는 이와이 에이이치가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알았는지에 대하여 여러번 말을 뒤집게 된다.

 

일찌기 중국특과에서 일했던 누적이(樓適夷)는 이 사건의 세부사항을 이렇게 알려준 바 있다

 

왕천목이 배반한 후, 이사군은 원수를 유인하여 체포한다. 원수는 그 일을 모르기 때문에 약속대로 상해 정안로의 한 작은 커피숍으로 갔다. 거기서 의외로 친구인 누적이를 만난다. 원수는 누적이에게 말한다. 내일 이곳에 오면 반한년을 만날 수 있다고.

 

다음 날, 누적이는 약속한 시간에 작은 커피숍으로 갔다. 거기서 원수의 처 마경성을 만난ㄴ다. 그는 그제서야 알았다. 전날 원수가 이곳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을. 반한년은 도착한 후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다' 그리고 마경성에게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주며 그녀에게 이와이 에이이치를 찾아가도록 말한다.

 

그제서야 증룡은 마침내 믿을 수 있었다. '오중간첩'은 원수에 있어서 겉모습이고, 중공의 정보원이야말로 그의 본질이라는 것을.

 

증룡은 원수에게 물어본 바 있다. 반한년의 진실한 신분을 이와이 에이이치에게 얘기한 것은 공산당의 중요인물을 누설한 것이 아니냐고? 원수는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반한년의 진실한 신분을 얘기하지 않으면, 만나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증룡은 다시 원수에게 묻는다: "반한년은 어떤 흥취가 있느냐?" 원수는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 "그는 음모궤계를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말년의 원수는 술을 마신 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일 반한년이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왜 그 개구멍으로 기어들어갔겠느냐."

 

1982년 12월 관로가 집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다.

 

이 일을 듣고 난 후, 증룡은 깜짝 놀란다. "멀쩡한 사람이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원수는 1분정도 침묵하더니 말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서 말했다: "그녀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난언(難言)의 춘추(春秋)

 

명예회복초기에, 원수는 한 때 다시 강호에 나설 생각도 했다.

 

어떤 때는 기관에서 원수를 초청하여 젊은이들에게 정보업무경험을 얘기하게 했다. 원수는 며칠씩 연속으로 강의를 하고서도 피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운이 나는 것같았다.

 

그는 조직에 장강을 고찰하고, 홍콩과 일본으로 가서 계속 활동하고 싶다고 제출한다. 그는 단위에 비서를 보내어 그의 구술기록을 남길 수 있게 해달라고도 요구했다. 그러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혼자서 반한년과 풍설봉(馮雪峰)을 회고하는 글을 써야 했다. 그러나 발표하지는 못한다. 1만여자의 반한년기념글 <홍색소개(紅色小開)>는 나중에 누가 빌려갔다가 행방을 모르게 된다.

 

1983년, 그는 일본소설 <세설(細雪)>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손이 너무 떨려서, 부득이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증룡이 보기에, 원수는 강렬한 사업심이 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걸 좋아했다. 원수는 증룡에게 이렇게 말한다. 상해탄에서 그와 같이 바닥에서 구른 사람이 몇 명 있다. 특무업무는 아주 모험적이고 자극적이다. 자신은 아주 열심히 했다. 그는 자주 말했다: 사람은 반드시 살아 있을 때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래야 이 생에 부끄럽지 않다."

 

1984년 원수의 옛 전우이자 당시 중앙정법위 서기로 있던 진비현(陳丕顯)이 지시를 내려, 셋째 딸 증요 일행은 북경으로 옮겨온다. 증요의 남편 조여보는 이렇게 말했다. 진비현이 지시한 대강의 뜻은 20여년간 억울하게 살아온 노동지가 이런 작은 요청을 하는데 어떻게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주 일요일이면, 일가 3명은 자전거를 타고 원수를 만나러 갔다. 조여보는 원수에게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웃기는 대목에서는 원수가 자주 가가대소를 했다.

 

원수는 일찌기 조여보에게 왕정위정권의 청향위원회에서 일하던 것을 얘기한 바 있다: "실제로 많은 공산당을 잡아왔다. 나는 부사령관의 말투를 가장해서 혼을 내준 후에 풀어주곤 했다. 특히 여자는."

 

항전승리후, 이와이공관은 국민당에 의해 봉쇄된다. 원수는 조여보에게 얘기한다. 그들은 사전에 소식을 들었다. 이와이공관의 자산은 몇 차례로 나누어 모조리 강소북부의 신사군에게 본ㅆ다. 당시의 가치는 1억여달러였다.

 

한번은 원수가 조여보와 얘기하면서 이런 말도 했다, "나같은 사람은 머리를 허리띠에 달고 사는 것이다. 언제든지 머리가 잘릴 수 있다. 나는 아주 운이 좋았다. 국민당특무에게 암살당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자주 자녀들에게 말했다: "나는 일생동안 반한년을 따라 일했다. 모든 공로는 당의 것이다. 내가 현재 돈이 없다고 생각지 말라. 나는 평생 당에 부끄럽지 않게 일해 왔다."

 

이해에 증호등을 데리고 원수는 상해등지를 다닌다. 옛날에 일하던 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상해 보산로 천통암의 건너편에 있는 원래 938호는 바로 이와이공관의 옛 부지이다. 이곳을 지날 때, 원수는 멈춰서서 한참을 머물렀다. 반한년 사건이 발발한 후, 옛날에 원수를 따라 이곳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미 한을 품고 죽었다. 이번에 상해로 갔을 때, 그는 옛날에 자신을 도와 정보업무를 하던 유인수(劉人壽)와 옛날 친구 오군(吳君)도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무석을 간다. 원수는 반한년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양범(揚帆)을 만난다. 1946년 원수는 상해에서 강소북부 해방구로 갔고, 처음 부두에서 맞이해준 사람이 바로 양범이다. 그때 양범은 풍모가 당당했는데, 지금은 이미 두 눈이 실명하고, 혼자서는 생활할 수도 없었다. 이를 본 원수는 마음이 심란했다.

 

양범과 헤어져, 원수는 반한년의 고향 의흥(宜興)을 지나간다. 거기서 반한년의 여동생 반옥금(潘玉琴)을 만났다.

 

원수가 마지막으로 반한년을 만난 것은 1955년이다. 그가 북경반점으로 가서 반한년을 만났다. 반한년은 감상적이 되어 말했다: "정보업무를 한 사람은 결말이 대부분 좋지 않다. 이는 중국이나 외국이나 다 똑같다." 며칠 후, 반한년은 체포된다. 1달후, 원수도 체포된다. 반한년은 명예회복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1977년 4월 호남노동개조농장에서 병사한다.

 

원수를 보자 반옥금은 아주 격동하여 한때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했다. 반한년은 젊어서 집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나중에 가족은 그가 상해에서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들었지만, 한번도 고향집을 도운 적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사건이 터진 후 가족들이 연루되었다고 한다. 떠날 때 반옥금은 달걀을 삶아서, 원수와 증호에게 쥐어 주었다.

 

떠나는 길에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원수는 나중에 반옥금의 집을 떠난 후의 심정을 이렇게 기술했다: "마음이 아주 적막했다"

 

원수는 배를 타고 호북의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1주일간 머문다. 1911년 음력 3월 29일, 그는 이 몰락한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1984년 가을, 원수는 뇌혈전이 재발한다. 근 1년의 시간을 들여, 인생 최후의 글 <극흔중인강남로(屐痕重印江南路) - 남유잡기(南遊雜記)>를 쓴다.

 

"수십년이 지났다. 각자 모두 말할 수 없는 세월이 있다. 다만 오늘날까지, 모구 이미 그 기구했던 옛날일을 더 이상 꺼내려 하지 않는다."

 

문인풍모

 

증룡이 보기에 부친은 일생동안 상해시기의 문인풍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해에 있을 때, 원수는 지취금미(紙醉金迷)의 생활을 지낸다. 도박을 좋아하는 외에, 아편도 하고, 거의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증호는 원수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상해에 있을 때 '돈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때 원수는 오성아, 이와이 에이치치등과 정보공작을 했고, 월수입은 600위안이상이었다. 그는 매월 절반이상의 수입을 왕자춘에게 당비로 냈다. 그러나, 원수는 나중에 증룡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가 봤을 때 왕자춘은 일년 사계절 아주 호화사치스럽게 살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불만을 갖기도 했다.

 

항전승리후, 원수는 대련으로 간다. 박고당(博古堂) 사장이라는 신분으로 자신을 위장한 후, 홍콩과의 비밀무역업무에 종사한다. 그는 많은 골동품을 소장했다. 도자기, 서화가 많았다. 1955년, 체포되었을 때, 대부분의 재물을 압수된다. 남은 물건은 문혁때 증룡이 찢고 태워버렸다. 남장가 사합원내의 4칸의 방에는 서적이 가득 있었고, 대부분은 원수가 감옥에 들어간 후, 기부한다. 명예회복후 압수되었던 물건을 돌려받는데, 그중 많은 것은 유명인의 서화였다.

 

원수는 일찌기 증룡과 일본문학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문학의 특징은 증룡이 말하는 것처럼 "침민(沉悶)"한 것이 아니라, 담담한 애수, 함이불로(含而不露)의 감상(感傷)이다. 이는 일본민족의 특징이다. 함축, 견인, 취약, 경망. 이것을 모두 갖추었다. 증룡이 느끼기에 이 평가는 원수의 내심과 아주 닮았다.

 

고설옹(顧雪雍)은 일찌기 원수를 기념하는 글을 쓴 바 있다. 고설옹의 외숙부인 운일군(惲逸群)은 일찌기 중공 지하당원이었다. 반한년에 의해 이와이공관으로 파견되어 원수의 일을 도운 바 있다. 운일군의 회고에 따르면, 왕정위시기의 한 설날에 원수는 예년처럼 많은 친구들을 그의 집으로 불러서 새해를 축하했다. 모두 객청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2층의 침실에서 걸어내려오다가 계단을 중간쯤 내려와서는 갑자기 멈추고 통곡을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시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두 그에게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얼굴을 바꾸다보니, 심리가 왜곡되어, 희비가 무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원수는 증룡에게 얘기한 바 있다. 자신은 조가루(趙家樓)에서의 생활이 아주 그립다고.

 

그때는 1949년이다. 이극농(李克農)은 원수를 대련에서 북경으로 부른다. 중공 정보총서 아주처 처장이 되었다. 업무장소는 북경 남소가의 '조가루'이다. 즉 5.4운동때 불에 탄 조여림(曹汝霖)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원수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고, 저녁에 돌아왔다. 왕단과 이혼한 후, 그는 아예 조가루에서 살았다. 거의 종일 책상에 앉아서 일했다. 이렇게 감출 것도 눈치볼 것도 없는 나날은 그의 생활에서 얻기 힘든 편안한 시기였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학교를 마치거나, 여름방학, 겨울방학이면, 증룡, 증호 형제는 조가루로 가서 부친과 함께 살았다. 겨울에는 방에 커다란 당자탄화분(搪瓷炭火盆)이 있었다. 그래도 약간 추웠다. 원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일했다. 혹은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과 같이 놀아주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저 주말에 그들을 데리고 나가 같이 식사를 했을 뿐이다.

 

증호는 기억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 항상 부친이 커피를 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을.

 

감정생활

 

증룡은 감추지 않고 말했다. 부친은 일생동안 여인이 많았다고.

 

원수는 그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나의 일생을 말하자면, 질책을 받을 만한 점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사생활이 문란했다." 증룡은 말한다. 원수는 프로이드의 성본능학설을 믿었다. 사람의 행위는 모두 성의 욕망에 지배를 받는다고.

 

원수는 키가 작고, 용모는 보통이다. 다만 사교장소에서는 물만난 고기같았다. 증룡은 일찌기 모친이 하는 말을 들었다. 원수는 상해의 교제화(交際花, 사교계의 꽃) 호혜기(胡慧琪, <로맨틱소망사>중 '노오'의 원형임)와 좋아하는 사이였다. 그는 또 사회주의청년학원교수 진경지(陳瓊之)이 원수에 대한 인터뷰기록에서, 원수가 일찌기 남니(藍妮, 일찌기 손중산의 아들 손과의 둘째부인)와 지나치게 친밀하게 지낸 바 있다고 하였다. 국민당 특무 영인(英茵)도 원수와 친밀하게 접촉한 바 있다.

 

증룡은 원수에게 물어본 바 있다: "그렇게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다니, 조직에서 뭐라고 하지 않았나요?" 원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할 때면, 그들은 아주 엄숙하게 들었고, 뭐라고 말하진 않았다."

 

원수는 여러번 증룡에게 배우 왕영(王瑩)과의 첫사랑을 얘기해주곤 했다. 문혁때 왕영은 박해를 받아 죽었고, 향산에 묻혔다. 원수는 향산의 동궁2호에 살 때, 증룡과 증호에게 왕영을 묘지를 찾아보라고 한 적이 있다.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원수가 잊지 못한 사람은 또한 증룡의 모친 왕단이었다.

 

1941년 원수가 마경성과 이혼한 후, 왕단과 결혼한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증소, 증요, 증룡, 증호가 연이어 태어난다. 해방초기, 왕단은 중조부에서 일한다. 그러나 기관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부부는 자주 싸웠다. 1953년 원수와 이혼하고 상해로 간다. 원수문제에 연루되어, 문혁때 왕단은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명예회복후, 원수는 왕단이 죽은 경위를 듣고는 통곡을 했다. "정말 멍청하다. 그녀가 만일 죽지 않았다면, 분명히 나와 재결합했을 것이다." 그는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한다.

 

원수는 1977년 제1차 귀휴때, 증룡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짝을 찾아서 같이 살고 싶다고.

 

1981년의 어느 날, 향산 남영의 이웃이 증룡에게 얘기한다. 원수가 집안의 20살된 보모와 그렇고 저런 사이같으니, 주변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는게 좋겠다고. 증룡은 아주 화가나서, 원수에게 화를 크게 낸다. 원수는 한쪽에 앉아서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어느 일요일, 조여보가 그를 보러 온다. 증요는 마침 원수의 얼굴을 씻겨주고, 수염을 깍아주고, 얼굴에 기름을 발라주며, 옷도 깨끗하게 갈아입혔다. 조여보는 뭐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원수는 쉿 하면서 쑥스럽게 웃었다. "내가 데이트를 하러 간다. 넌 신경쓰지 말라."

 

원수는 말년에도 만난 상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같이 살지는 못한다. "그는 가정의 따스한 환경을 바랐던 것같다." 조여보의 말이다.

 

1986년의 어느 날 원수는 증룡에게 말한다: "나는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증룡은 깨달았다. 부친이 아마 세상에 살아있을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것같다고.

 

건강악화

 

1985년에 들어서면서, 원수의 몸상태는 갈수록 나빠진다.

 

두번이나 중풍으로 뇌조직에 손상을 입는다. 그리하여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는 희노가 무상했고, 어떤 때는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또 어떤 때는 돌연 곡을 하고 소리질렀다.

 

1985년 하연이 <나심구몽록(懶尋舊夢錄)>을 출판한다. 거기에는 원수가 1935년 '괴서인안(怪西人案)'으로 체포될 때 변절하여 자수한 사실이 노출된다.

 

1935년 5월, 상해에서 '괴서인'사건이 벌어진다. 제3인터내셔널 극동정보국의 책임자 화이돈(華爾敦, 본명 Yakov Grigorievich Bronin)이 체포된 후, 시종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괴서인'이라고 불렸다. 군통은 그의 신분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몸에서 노트 하나를 찾아낸다. 거기에 원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원수는 그로 인해 체포된다(8개월후 출옥한다). 그후, 하연은 자신이 하마터면 유인되어 체포될 뻔했다고 여기고, 원수가 변절했다고 의심한다.

 

1980년 원수가 제3차로 노동개조공장에서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증호는 그와 함께 하연을 만난 적이 있다. 돌아오는 길에 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해야할 말은 모두 분명히 했다. <나심구몽록>을 보고는 원수가 아주 화를 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겨우 서면자료를 써서 조직에 이 일을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한다.

 

노간부국의 국장 주옥림은 증룡에게 말했다: "조직은 사실에 근거하여 말한다. 하연은 체포되지 않았다. 조직은 자연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간부는 증룡에게 이런 말을 했다. 1954년 간부심의때 원수에 대한 정치결론은 자신이 내렸다고 했다. "1935년에 체포된 것은 무슨 큰 일이 아니다. 원수는 큰 공을 세웠다. 작은 잘못은 적지 않지만, 그것은 문인들의 그런 것이다. 먹고 마시고 여자를 좋아하는 류의 것이다."

 

원리의 노간부국은 자주 활동을 조직했다. 바둑, 브릿지. 원수에게 참여할 것을 권했드나 한번도 가지 않았다. "그도 외로웠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매국노니 반도니 하는 말을 하면 사람들 속에서 불안을 느꼈던 것같다" 증룡의 말이다.

 

많은 옛 동지들은 원수의 사건에 대하여 아주 동정적이었다. 한 노간부는 증룡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수가 세운 공로는 우리들보다 훨씬 크다."

 

1986년이후, 원수의 몸과 정신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뇌혈전, 백내장, 고혈압, 당뇨병으로 여러번 입원한다. 그의 눈으로는 신문을 볼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는 붓을 들 수 없었다. 하루종일 휠체어에 앉아서 지냈다. 이전에 그는 일기를 쓰고 시를 썼었다. 그는 자기가 보려고 시를 쓴다고 했다. 당시에 그는 종일 명상을 하며 지내야 했다. 한번은 그가 증룡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진성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는 어떤 때는 정신이 흐릿했다. 한번은 그가 누적이를 찾아가서 만났는데, "내 생각에 우리가 진경지(그를 인터뷰했던 사람)를 발전시켜 끌어들일 수 있겠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우리가 발전시킬 수 있을 것같다."

 

그는 중앙직속기관원내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약방을 처방해 주었다: 큰 배로 용납하여, 천하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입을 열어 항상 웃어서, 세상의 웃기는 사람을 웃어주어라(大肚能容, 容天下難容之事; 開口常笑, 笑世間可笑之人)

 

'관등(關燈)'

 

1986년의 어느 날 원수는 일가족을 집에 모으고 돌연 유언을 공표한다.

 

유언은 변호사의 공증을 거쳤고, 주로 3가지이다; 첫째, 남장가 근로후통 20호원의 집은 모두 증요가 소유한다. 둘째, 집안의 모든 물품은 증호가 소유한다. 셋째, 모든 서적은 마원희의 딸 장효단(張曉丹)에게 남긴다.

 

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녀가 성장한 후, 부모자녀관계는 사회관계이다. 증룡은 어려서부터 증수와 함께 살았다. 원수가 막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증룡이 그를 가장 많이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말년에 부자간은 오히려 멀어진다. 원수는 심지어 한때 그와 부자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증룡은 말한다. 자신은 편안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살마이고, 부친은 사업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간의 관게는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는 관계이다. 

 

1987년 초, 원수는 자녀들에게 이사와서 자신과 같이 살자고 말한다. "나는 얼마 더 살지 못한다. 같이 시끄럽게 떠들며 살자." 그러나 그의 수시로 변하는 성격에 자녀들은 그와 같이 살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일이 바쁘기 때문에 아무도 옮겨오지 않았다.

 

나중에 증룡은 증요가 권해서 옮겨갈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원수에게 일이 터진다.

 

당시 그는 보모를 쫓아냈고, 혼자서 침대에 이틀간 누워 있었다. 그후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대퇴골이 부러진다. 증룡은 나중에 이렇게 추측한다. 이 거동은 자살하려 했던 것같다고.

 

증요가 발견한 후, 원수를 309병원에 입원시킨다. 마원희와 증소는 이미 미국으로 건너가 있었다. 원수가 입원한 12일동안, 증룡, 증요, 증호가 돌아가며 간호했다.

 

하루는 아침 4시경, 증룡이 권해서, 1주일동안 먹지 못한 원수는 억지로 우유를 약간 마신다. 증룡이 그에게 작은 그릇으로 한 그릇 정도를 마시게 해준다. 다 마시고 나자, 원수가 말했다: "관등(關燈, 불을 끄다)". 말할 때 이미 숨이 미약했다.

 

증룡은 돌연 생각이 났다. 원수가 두번째로 북경에 가족을 만나러 왔을 때, 부자 둘은 같이 영안리의 작은 집에 거주했다. 그때는 그가 성년이 된 후 부친과 함께 잠을 잔 첫날이었다. 원수가 새벽 4시에 침대에서 일어나서, 그는 계속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원망하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일어나시면 저는 아직 잠을 충분히 못잤잖아요. 불꺼주세요." 원수는 불을 껐었다.

 

증룡이 손을 뻗어 불을 끄려고 했다. 그때 원수가 그의 손을 잡아 끌어 입을 맞춘다.

 

다음 날 저녁 7시, 증호는 증룡과 교체한다. 증룡이 집으로 돌아와서 잠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증호가 전화를 걸어왔다. 부친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현재 응급조치중이라는 것이다.

 

심야 새벽 0시 30분, 원수는 세상을 떠난다. 향년 76세이다.

 

이날은 11월 26일이다. 큰 눈이 내렸다. 원수의 유체를 병실에서 영안실로 옮길 때, 바람도 그치고 눈도 그쳤다. 정원의 눈들은 은빛의 꽃을 피운 것같았다.

 

원수가 죽은 후, 7,8권의 일기장은 대부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보모는 증룡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수가 죽기 반년전에 물건들을 태우는 것을 보았다고.

 

자녀들은 부친에게 회고록을 쓰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쓰지 말라" 증호는 가끔 원수의 예전 간첩생애를 묻곤 했다. 그러면 그는 신비로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건 당의 기밀이다.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