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계화인주간(世界華人週刊)
대자선가 텐자빙(田家炳)은 일생동안 200여곳의 학교에 기부를 했고, "텐자빙빌딩(田家炳樓)"은 중국 전지역에 세워져 있다. 누군가 이 자선가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한 사람 이름을 얘기했다. 바로 촹시핑(莊世平, Chuang Shih-ping)이다.
촹스핑은 어떤 사람인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부호"라 불리는 그는 홍콩 금융계의 거물이다. 생전에 자가용도 없고, 자택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가치가 2000억위안에 달하는 2개의 은행을 국가에 헌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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촹시핑은 얼마나 부자였던가? 한번 수치를 보도록 하자.
그는 76살에 은퇴했다(1986년). 그때 그가 창업한 남양상업은행(南洋商業銀行)의 자산은 개략 733억홍콩달러였다. 또 다른 마카오남통은행(澳門南通銀行)의 자산은 2,000억홍콩달러를 넘어섰다. 지금으로 보더라도 명실상부한 부호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이렇게 그를 평가했다: "차오샨(潮汕, 차오저우와 샨터우지역)은 중국혁명에 공헌한 2명의 경제계의 인재를 배출했는데, 한 명은 이론의 수타이신(許滌新)이고, 한명은 실천의 촹시핑이다."
촹시핑을 경제계의 인재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지나치지 않다. 남양상업은행은 바로 그가 1만달러를 가지고 창업한 은행이다.
신중국성립초기, 모든 것은 백폐대흥(百廢待興)의 단계였다.
비록 여러 곳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자원, 인재, 자금이 크게 부족했다. 게다가 서방국가는 중국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어, 국내경제발전상황은 좋지 못했다.
촹시핑은 홍콩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외국인이 대량의 국유자산을 장악하는 것과 외환업무는 거의 국제적인 은행들이 독점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그는 스스로 은행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중앙정부가 홍콩에 은행을 설립하여, 국내외경제활동의 소통이 원활하도록 하고, 화교와 대륙과의 연결을 도모하려는 생각과 일치했다.
이상은 아주 아름다웠으나, 현실은 참혹했다. 돈이 없었다. 이는 촹스핑이 은행을 만드는데 첫번째 걸림돌이었다. 비록 그는 무역업무에 여러 해동안 종사했지만, 이윤은 대부분 전선의 항전을 지원하는데 보냈고, 가지고 있는 재산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촹시핑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방법을 통해 자금을 모았고, 정부의 지원도 받아냈다. 결국 1만달러를 모아서 은행을 창업한다. 1949년 12월 14일, 남양상업은행이 홍콩 센트럴 Des Voeux Road Central 167호에 정식개업한다. 개업당일, 은행의 옥상에는 홍콩전체에서 최초로 오성홍기가 게양된다.
촹시핑은 동남아 화교의 돈으로 사업했다. 당시 영국은행은 홍콩금융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를 뚫고 기적을 창조해낸다.
그후 그는 다시 마카오남통은행을 창업한다. 이를 통해 국제은행이 중국외환업무를 독점하던 국면을 완전히 타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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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달러로 은행을 창업하는 것을 촹시핑은 해냈을 뿐아니라,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다. 남양상업은행이 운영되는 동안, 중국최초의 신용카드를 발급했고, 또한 Master Card국제조직에도 가입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하이의 힐튼호텔, 베이징의 홀리데이인 호텔, 다롄의 푸라마호텔은 모두 남양상업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건설되었다.
시가총액이 방대하고, 발전잠재력이 풍부한 두개의 은행을 가지고도 촹시핑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은퇴후 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두 은행을 국가에 헌납한다. 그가 당초 은행을 설립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건도 달지 않고, 지분도 갖지 않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 일해왔던 것이다.
촹시핑을 아는 사람은 그가 2천억홍콩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기부하기로 한 결정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게서는 억만장자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자가용을 산 적이 없다. 출퇴근은 걸어서 하거나 아니면 전차를 탔다. 그리고 한번도 자신의 집을 산 적이 없다. 주소는 은행에서 배정해준 것이고, 100평방미터도 되지 않는 숙사였다; 의복도 낡은 것을 그대로 입고 다녔다.
가족들에게도 그러했다. 촹시핑에게는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는데, 그들이 자라는 동안에, 촹시핑은 그들에게 반복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 하고, 조국을 사랑하도록 가르쳤으며, 한번도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금융관련분야에 종사하려는 것을 막았다.
아들 좡룽쉬(莊榮敍)는 보통의 트럭기사이다. 인터뷰떄 스스로 '홍콩사회 최하층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처인 린잉핑(林影平)은 말년에 치매를 앓았는데, 경제적으로 한계가 있고, 게다가 주위나 국가에 부탁하고 싶지 안아, 촹시핑은 처를 더욱 싼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하다가 사망한 후 바로 매장한다.
그는 리카싱(李嘉誠)과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이지만, 한번도 자신의 일로 인하여 부탁한 적은 없다.
촹시핑은 재산을 가졌다고 하여 자신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시종 자신은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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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족에 대하여 이렇게 인색했던 촹스핑이 국가발전과 다른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아주 시원시원하게 도왔다. 거의 부탁하면 다 들어주었다.
이런 국가에 대한 소박하나 치열한 애국심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뿌리를 내렸고, 일생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었다.
촹시핑이 태어났을 때는 중국이 군벌혼전의 시대였다(1911년). 국내에 각종 세력이 들고 일어나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이런 배경하에서 성장한 촹스핑은 일찌감치 현상을 바꾸고 조국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베이징에서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해야할 일이 생겼다고 여긴다. 그리고 즉시 버마, 태국등 동남아로 간다. 그리고 현지 화교들의 힘을 모아서 국내의 대일항전전선에 물자와 인재를 보낸다.
26살때, 촹시핑은 이미 태국지역 화교항일연합회의 상임위원이 된다. 그는 사업을 이용하여 국내외의 애국인사들을 엄호하고,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운남-버마도로의 건설에도 참여한다.
동남아에서 항일활동을 하던 7년동안, 촹시핑은 여러번 일본군의 지명수배범이 되었다. 2번 붙잡히고, 1번 구금되었다. 그리고 친척들과도 5년간이나 서로 떨어져 산다.
위험과 곤란 속에서도 촹시핑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국민당에 협력하지 않고, 공산당과 함께 했다.
1945년 항전승리가 눈앞에 다다고자, 촹스핑의 스승인 수타이신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중국을 건설하려면 화교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너는 화교친구들이 많으니, 해외로 나가 장사를 해라. 우리에게 싸울 줄 아는 인재는 부족하지 않고, 정치할 인재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사업을 할 인재는 부족하다."
촹시핑은 스승의 건의를 따라, 소련 주충칭상무대표처로 가서 제약, 영화드라마, 해산물등 분야의 계약을 체결하고, 1만달러를 가지고 은행을 창업했다.
1979년, 촹시핑은 우난셩(吳南生, 초대 선전시위서기)을 도와 선전특구를 기획한다. 그리고 선전에 남양상업은행 선전분행을 세워 특구건설을 적극 지원한다. 그후 우난셩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특구를 건설하는데 촹사장은 나의 스승이었다.
1986년, 촹시핑은 직접 기획하여 샨터우대학(제1기)를 완공한다. 건축물에는 차오샨 현지특색을 남겨두고서, 현대적인 분위기도 가미했다; 그리하여 '대학의 꽃' '세외도원현대가'라는 별칭도 얻는다. 이는 촹시핑이 특구건설에 참여하는 기간동안 광동동부지역에 대학교가 설립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지에 인재를 보내기 위해 대학을 건설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단지 샨터우대학은 리카싱이 투자하여 설립한 것으로만 알고 있고, 촹시핑이 한 노력은 잘 모르고 있다.
"나무를 십년 것은 십년대계이고, 인재를 기르는 것은 백년대계이다. 한세대, 한세대 계속 이어가야 결국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샨터우대학의 초대 교장은 촹시핑의 스승인 수타이신이 맡는다. 샨터우대학은 사적기금(리카싱)이 지속적으로 돈을 출연해서 만든 공립대학이다. 지금은 이미 국가발전을 위해 10만의 동량을 배출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으로 돌아왔다. 인수인계식에서 이 86세의 노인은 감개무량하여 오열하며 말했다. 47년동안 계속 홍콩에서 오성홍기를 내걸었다. 처음에 함께 국기게양식을 했던 친구들은 모두 죽었다. 지금 마침내 직접 조국이 홍콩을 넘겨받는 것을 보니, 내가 해야할 일은 옛날 친구들의 영전에 알려주는 것이다; 숙원을 이루었다!
2007년 6월 2일, 촹시핑은 세상을 떠난다. 향년 96세이다. 특구는 국장의 기준으로 장례식을 거행한다. 장례식에서 리카싱, 둥젠화등 홍콩금융계의 거물들이 그의 관을 운구했다. 국학대가 라오종이(饒宗頤)는 직접 만련을 썼다: "만인추앙혜택심(萬人追仰惠澤深), 일노공훈방국중(一老功勛邦國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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촹시핑에게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에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며, 스스로의 고통은 스스로 삼키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은 나서서 도와준다. 그들은 시종 국가이익을 우선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다.
촹시핑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그는 항일도 했고, 창업도 했고, 대학도 만들었고, 지방정부를 도와 선전특구도 만들었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곳이면 그는 바로 달려갔다. 업적을 이룬 후에는 다시 필생의 모든 얻은 것을 국가에 바쳤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한푼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의 일생은 명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저 서양인들에게 너무나 많이 당해와서, 한번 갚아주고 싶었다. 중국인이 국제무대에서 강성해지고, 지위를 얻고, 존엄을 갖게 하고 싶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면 나는 죽어도 좋다. 이 목적이 달성되면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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