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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C의 내분: 장상이가 들어오고, 량몽송이 떠나다

중은우시 2020. 12. 26. 19:45

글: 지식산권이상국(知識産權理想國)

 

장상이(蔣尙義 Chiang Shang-Yi)와 량몽송(梁孟松, Liang Mong-Song)은 모두 명문학교를 졸업한 이공과의 기술자들이다. 다만, 량몽송은 연구개발역할이라면, 장상이는 관리역할에 더 가깝다. 량몽송과 장상이가 발명가로서의 특허수량을 보면 차이가 비교적 크다. 그중 량몽송은 수백건의 특허를 발명했고, 장상이는 그저 수십건의 특허를 발명했을 뿐이다.

 

량몽송은 두번이나 '욱'해서 사직을 했다. 첫번째는 2009년 2월 TSMC의 연구개발부총재가 되지 못하자 '욱'해서 사직한 것이고, 두번째는 2020년 12월 장상이가 SMIC에 들어오면서 '욱'해서 사직한 것이다.

 

여기사 장상이와 량몽송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자.

 

장상이. 1946년생, 1968년 국립타이완대학 전자공정학 학사, 1970년 프린스턴대학 전자공정학 석사, 1974년 스탠포드대학 전자공정학 박사. 일찌기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HP에서 근무한 바 있고, 1997년 타이완으로 돌아와 TSMC의 연구개발부총재를 맡았다.

 

2006년에 1차은퇴를 하나, 2020년 다시 복귀한 장중머우(張忠謀)의 요청으로 다시 복귀하나, 2013년 재차 은퇴한다. 2016년-2019년에는 SMIC의 독립동사(사외이사)로 있었고, 그후에 노광기를 저당잡히고 공장이 황폐해진 HSMC에 들어간다. 그후 2020년 12월 15일 SMIC의 부동사장 겸 집행동사로 들어온다.

 

량몽송. 1952년생, 본과와 석사는 타이완국립성공대학에서 마치고, 박사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분교에서 받는다. 일찌기 AMD에서 근무했고, 1992년 타이완으로 돌아와 TSMC에 입사한다.

 

2009년 2월 TSMC를 퇴사한 후, 한국 성균관대학교에서 2년간 교수로 있다가 삼성전자에 입사한다. 2017년 10월 계약이 이 만기된 후, SMIC로 가서 집행동사 및 공동CEO가 된다. 2020년 12월 사임한다.

 

장상이는 량몽송의 상사 혹은 상사의 상사이기는 했지만, 량몽송의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다. 량몽송의 스승은 FinFet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첸밍후(胡正明, Chenming Calvin Hu)이다.

 

첸밍후는 량몽송의 박사지도교수이고, 이전에 TSMC에서 CTO로 근무한 바 있다. 그는 무어법칙을 수십년 연장하고 TSMC를 세계제일로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다만 그는 장상이나 량몽송처럼 기업에서 일하지 않고, 퇴직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것을 선택한다.

 

량몽송은 TSMC가 엄청난 힘을 쏟아 경업금지와 상업비밀침해로 소송을 제기당한 인물이다. 또 다른 한명은 SMIC의 창업자인 장루징(張汝京,  Richard Chang)이다. 장상이는 TSMC로부터 법률적인 소송을 당하지 않았다.

 

장상이는 발명가로서 신청한 특허가 20여건에 이른다.

 

첫번째 특허신청은 1978년(32세)이고, 특허신청인은 미국회사인 AT&T로 되어 있다. 이 시기의 근무경력은 장상이의 이력에 나오지 않는다.

 

1989년-1997년, 장상이는 HP에서 여러 건의 특허를 신청한다. 장상이가 1997년 TSMC에 입사했기 때문에, 장상이가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일할 때에는 특허신청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상이가 TSMC로 온 후에는 오직 1건의 기술방안에 대한 특허신청만이 있다. 그것은 2006년으로 바로 장상의가 1차은퇴하는 그 해이다. 이 특허는 먼저 미국에 신청되고, 그후에 타이완과 중국에 신청된다.

 

장상이는 TSMC에서 일할 때는 자체연구개발로 IBM의 구리연결기술을 벗어나는 시기(2000-2003)였는데, 그가 발명자로 특허신청은 하지 않았다. 이는 일정한 정도에서 장상이의 역할은 연구개발이 아니라, 관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부에서는 장상이를 TSMC의 '연구개발6군자'중 하나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량몽송은 발명자로서 신청한 특허가 400건을 넘는다. 

 

최초의 특허신청은 1985년(33세)이다. 특허신청인은 AMD회사이다. 동시에 1986년 발명가로서 여러 건의 특허를 신청한다. 

 

1991년, 량몽송은 발명자로서 특허를 신청한다. 특허신청인은 Taiwan Mosel Electronics Co., Ltd(臺灣茂矽電子股份有限公司)이다. 이 회사는 1987년에 성립되었고, 창업자는 미국에서 귀국한 천정위(陳正宇)이다. 1992년 12월 1일에도 특허를 신청했다.

 

량몽송이 TSMC에서 발명자로 신청한 최초의 특허는 1993년 7월 22일이다. 량몽송은 TSMC에서 400여건의 특허에 기여한다. 그중 1996년에만 특허신청수량이 85건에 달한다. 그리고 1995년-2009년까지 매년 특허신청수량이 두자릿수이다. 그중 2002-2004년은 각각 34건, 42건, 48건이고, 그후에도 매년 30건이 넘었다.

 

량몽송의 특허신청량의 연도별 분포를 보면 TSMC의 발전과 발걸음을 같이 한다. 비록 TSMC에는 린번젱(林本堅, Lin Burn-Jeng), 위전화(余振華), 쑨위안청(孫元成) 및 양광레이(楊光磊)라는 4명의 연구개발 군자들이 있었지만, 량몽송도 연구개발의 기재이다. 그것은 삼성전자와 SMIC에서 충분히 보여주었다. 런번젱은 EUV노광기기술의 아버지로 나중에 ASML의 EUV노광기를 만들어 낸다. 위전화는 TMSC에서 랭킹1위의 발명자이고, 쑨위안청은 량몽송을 이긴 인물이다. 

 

량몽송이 TSMC를 떠난 것은 그의 실적이 최하5%에 들어서 도태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TSMC가 2015년에 제기한 경업금지 및 상업비밀침해금지소송의 재판에서, 량몽송은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사무실에서 몇달동안 완전히 무시되었다. 할 일도 없었고, 모두가 나는 탈락했고 냉대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직원식당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이전의 동료를 만나는 것이 겁났고, 이전의 동료도 나를 만나는 것을 겁냈다. 나는 아주 창피하다고 여겼고,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내가 TSMC에 그렇게 많은 공헌을 했는데, 그들은 결국 나를 이렇게 대했다. 나를 냉궁(冷宮)같은 사무실로 보내버린 것이다."

 

량몽송이 TSMC를 도와 IBM을 추월하게 하고, 삼성을 도와 짧은 몇년만에 TSMC를 추월하게 해주고, SMIC를 도와 3년내에 십여년이 걸려야 완성할 기술적 임무를 완성해낸 것을 보면, 량몽송은 연구개발의 기재이다. 다만 아마도 TSMC의 고위층이 말하는 것처럼, "량몽송은 기재이다. 다만 그의 능력은 깊고 좁다. 쑨위안청은 프로세스통합을 전체적으로 책임진다. 능력은 비록 량몽송처럼 깊지 않겠지만, 그는 더욱 뛰어난 대국관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장중모우가 당초에 량몽송으로 하여금 '무어추월계획'을 책임지게 한 것은 량몽송의 기술적인 습성과 개성을 단련시켜, 량몽송이 후계자로서의 전면적인 능력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량몽송이 이를 참지 못하고 사직을 선택한 것이라고.

 

SMIC의 동사장도 량몽송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량몽송에게 성격을 폭발시킬 기회를 준 것은 아마도 SMIC 동사장이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찌 되었건 이는 양패구상이다. 가장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은 SMIC이다. 당연히 그 상처는 중국의 칩산업 전반에 영향을 준다.

 

량몽송은 기술특허가 아주 많은 발명가이다. 아주 강력한 기술적인 특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량몽송은 우리들로 하여금 애플의 보츠니악과 반도체의 아버지 쇼클리를 떠올리게 한다. 모두 세계최고의 기술자들이었지만 보츠니악은 이미 잡스를 양해하고 편안히 지낸다. 그러나 쇼클리는 죽을 때까지도 '실리콘 8명의 배신자'를 용서하지 못했다.

 

SMIC에서 관리역할을 할 사람이 들어오고, 연구개발역할을 할 사람은 떠났다. 이것이 SMIC의 전환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실패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