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입관(入關)후의 청나라 여러 황제의 딸들과 마찬가지로, 강희제 현엽(玄燁)의 딸들도 요절한 경우가 많았고, 수명이 짧았다. 강희제에게는 20명의 딸이 있는데, 요절한 딸이 12명으로 비율이 60%에 달한다. 20명의 딸의 평균수명은 16.75세이다. 12명의 요절한 딸들의 평균수명은 4.08세이다. 8명의 성년이 된 딸들의 평균수명은 35.7세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의 수명은 이렇게 짧았던 것일까?
순치제 푸린(福臨)의 딸들과 비교하면, 강희제의 딸들의 수명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순치제에게는 6명의 딸이 있는데(양녀 제외) 5명의 요절하여, 비율이 83.3%에 달한다. 6명의 딸들의 평균수명은 10.17세이고, 유일하게 성인이 된 둘째공주도 겨우 33살까지밖에 살지 못했다.
더 나아가 청태조 누르하치와 청태종 홍타이시의 딸들과도 비교해보기로 하자.
누르하치에게는 8명의 딸이 있는데, 7명이 성인이 되었고, 평균수명은 53.88세이다.
홍타이시에게는 14명의 딸이 있는데, 모두 성인이 되었고, 평균수명은 37.71세이다. 그중 황장녀와 황오녀는 비교적 일찍 출생하여 입관전에 이미 몽골귀족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들의 평균수명은 50.2세이다. 이는 누르하치의 8명의 딸들의 평균수명(53.88세)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황육녀부터 황십사녀까지는 천총7년(1633년)에서 숭덕6년(1641년)까지 태어났는데, 청나라의 입관때 이들 9명의 나이는 4살에서 12살까지이다. 그녀들의 평균수명은 겨우 30.08세밖에 되지 않는다. 앞의 5명의 언니들보다 훨씬 짧다.
이를 보면, 청나라초기 4명의 황제의 딸들의 건강상황과 수명의 장단은 관외냐 관내냐에 따라 차이가 컸던 것같다. 누르하치의 딸들은 모두 그가 후금국을 건립하기 전에 태여났고, 천명연간에 성장했다. 이 단계에서, 후궁제도를 포함한 각종 전장제도도 완비되어 있지 않았다. 봉건윤리사상의 영향도 비교적 적었다. 황녀들은 구속도 거의 받지 않고, 마음대로 뛰어놀았다. 이런 요소들이 그녀들의 성장과 발육에 좋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홍타이시의 앞의 5명의 딸들의 생활환경도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누르하치의 딸들과 마찬가지로 수명이 비교적 길었다.
청나라의 입관후, 황제의 딸들은 출가하기 전에 모두 구중궁궐에서 자랐다. 기본적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 황자들은 어려서부터 말타고 활쏘기를 하며, 수영까지 했고, 조금 자라면 자주 황부를 따라 외출하고 사냥도 다녔다. 그래서 시야를 넓히고, 신체를 건장하게 할 수 있었다. 공주들은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그녀들은 궁궐의 한 곳에 갇혀 지내며, 윤리강상과 궁내의 번잡한 예절의 속박을 받았다. 그래서 대부분 몸이 약하고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졌다.
청나라초기에는 천연두가 유행했는데, 공주들의 요절과 단명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다. 천연두의 위해는 공주와 황자간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강희제의 황자들중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비율과 수명을 보면 모두 공주들보다 훨씬 높다. 강희제에게 35명의 황자가 있는데, 요절한 사람이 15명으로 43%이다. 35명의 황자들의 평균수명은 32.77세이다. 요절한 황자의 평균수명은 3.87세이고, 20세이상 성년이 된 황자들의 평균수명은 54.45세이다.
청나라가 입관후의 황제의 딸들에게 요절한 비율이 높고 평균수명이 짧은 원인은 아주 복잡하다. 위에서 얘기한 것은 그저 일부의 측면이다.
강희제의 8명의 성년이 된 딸들 중에서, 6명이 몽골왕공에게 시집간다. 비율이 높기로는 청나라입관후의 역대 황제들 중 최고이다. 이뿐아니라, 강희제의 손녀와 종실, 각라의 딸들중 몽골에 시집간 경우도 적지 않다. 그녀들은 모두 민족단결을 강화하고, 조국통일을 촉진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홍타이시는 일찌기 14명의 딸들 중에서 10명을 몽골에 시집보낸다. 강희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대부분의 딸들을 몽골왕공과 혼인시킨다. 확실히 조상의 방식을 본받은 측면이 있다. 그외에 강희제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 적모인 효혜황태후는 모두 몽골귀족집안 출신이다. 강희제가 이렇게 딸들의 혼사를 안배한 것은 어른들의 뜻에 따른 것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청나라의 당시 상황상 필요하기도 했다. 이러나 조치는 만주와 몽골의 연맹을 공고히 했고, 통치를 강화했다. 이것이 아마도 강희제가 중점을 둔 목적이었을 것이다.
몽골로 시집가는 것은 강희제의 딸들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여진족은 만주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전에 오랜 기간동안 몽골족과 이웃해서 살았다. 교류가 밀접했고, 문화적으로 몽골족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서로 같은 자연환경에, 두 민족의 습속도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았다. 이는 피차간에 통혼하는데 좋은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강희제가 딸들을 시집보낼 때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청나라의 입관전에는 만주와 몽골 귀족간의 생활수준이 차이가 크지 않았다. 누르하치의 딸들과 홍타이시의 딸들이 자랄 때는 모두 말을 타고 활을 쏘았으며 신체적 자질도 좋았다. 몽골초원에 가서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강희제의 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들으니 비교적 높은 만주 한족의 문화소양을 익혔고, 체질이 비교적 약했다. 게다가 자금성내에서 편안하게 살다보니, 초원귀족의 생활과는 차이가 컸다. 이런 요소로 인하여, 그녀들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약했고, 몽골로 시집간 후에 여러가지 곤란한 일들을 겪으면서 심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강희제는 비교적 자상한 부친이었다. 딸들을 멀리 몽골에 시집가면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취한 초지는 딸들의 혼인연령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딸들이 결혼후의 변한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할 수 있게 하려 했다. 그래서 현엽의 8명의 공주의 혼인연령은 모두 18세에서 22세까지이다. 평균 19.12세이다. 누르하치의 7명의 딸들의 평균혼인연령은 15.3세였고, 홍타이시의 14명의 딸들의 평균혼인연령은 13.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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