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주삼태자(朱三太子): 강희제가 가장 꺼려했던 이름.

by 중은우시 2018. 12. 26.

글: 문재봉(文裁縫)


모두 알고 있다시피 청성조(淸聖祖) 강희제(康熙帝) 현엽(玄燁)은 업적이 많은 황제이다. 8살에 등극하여, 14살때부터 친정을 하고, 어린 나이에 만주제일용사라고 불리던 권신 오배(鰲拜)를 처치하고, 성년이 된 후에는 전후로 삼번(三藩)을 평정하고, 대만을 수복하였으며, 갈단(噶爾丹)을 친히 정벌하고, 야크사(雅克薩)를 보위하여, 청나라 흥성의 기반을 다졌고, 강건성세(康乾盛世)의 국면을 개창했다. 그리하여 후세학자들로부터 '천고일제(千古一帝)'라고 칭해진다.


대만학자 백양(柏楊) 선생은 내심으로부터 찬탄하여 말하기를, "현엽대제, 이 중국역사상 가장 영명한 군주중의 한 명은 젊고 기세넘쳐서 유방의 활달하고 대범한 흉금과 이세민의 사람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지혜를 갖추었다."


그러나, 바로 이 천고일제가 60년에 걸친 통치기간중에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다. 이 두려움은 한 사람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매번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어지럽고 좌불안석했다.


그가 도대체 누구인가? 왜 강희제는 그에 대하여 이름만 들어도 얼굴색이 변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는 바로 명사종(明思宗) 숭정제(崇禎帝) 주유검(朱由檢)의 다섯째아들인 주자환(朱慈煥)이다. 숭정제는 모두 7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둘째, 여섯째, 일곱째 아들은 요절하고, 황장자 주자랑(朱慈烺), 황삼자 주자형(朱慈炯), 황사자 주자소(朱慈炤), 황오자 주자환(朱慈煥)이 남았다. 주자환은 넷째인 주자소와 나이가 같고, 동부동모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와 주자소를 합쳐서 셋째라고 불렀으며, '주삼태자(朱三太子)'라고 부른다.


갑신지변때 16살의 태자 주자랑, 13살의 황삼자 정왕(定王) 주자형과 12살의 영왕(永王) 주자환은 이자성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이자성은 이들을 괴롭히지 않고, 대범하게 태자 주자랑은 송왕(宋王)에, 주자형과 주자환도 공(公)의 작위에 봉한다.


그러나, 이자성이 산해관에서 패배하면서, 대순정권은 북경에서 도망친다. 주자환 형제도 도망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들 형제 3명은 혼란한 와중에 서로 흩어지게 되는데, 주자환은 대순군의 모(毛)씨성의 장군을 따라 하남으로 도망쳐서 성과 이름을 숨기고 1년여동안 농가에서 생활한다. 1년동안 청정부에서 '유적(流賊)'을 수색하는 강도가 점점 강해지자, 모씨성의 장군은 그를 버리고 도망친다. 그후부터는 독자적으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주자환은 구걸하면서 조적인 봉양(鳳陽)으로 간다.


봉양에서 주자환은 왕(王)씨성의 명왕조때 급사중을 지낸 사람에게 거두어진다. 왕씨집에서 살면서 성을 '왕'씨로 고치고 이름까지 왕사원(王士元)으로 한다. 편안하게 5,6년을 지냈는데, 왕씨집안에 변고가 생긴다. 집안이 만하면서 주자환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이 해에 주자환은 이미 19살이다. 한 절에 들어가서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나날을 보낸다.


수년후, 주자환은 집집마다 다니며 탁발을 하면서 절강중부지역까지 전전한다. 거기서 호(胡)씨성의 여요(餘姚)사람을 만나게 된다. 호씨는 주자환의 학문과 재주에 탄복하며 그에게 환속을 권한다. 그리고 딸을 그와 결혼시킨다.


이때부터 주자환은 여요의 왕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간다. 주자환 본인은 무슨 반청복명의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난세에 살아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만 주자환의 존재는 청나라정권에게는 시종 위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옹립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주삼태자'는 아주 호소력있는 기치가 된다.


순치12년, 주주지(朱周祗)라는 서생이 '주삼태자'라고 하면서 강소북부에서 반청활동을 조직한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피살당한다. 


순치13년, 직예(直隸) 진정(眞定)이 파산한 상인이 자칭 '주삼태자'라고 하며 명나라를 광복하면 관직과 작위를 주겠다고 역속하며 비밀리에 자금을 모아서 반청의사들과 연락하다가 사실이 누설되어 참형을 당한다. 


순치16년, 한 강호인사가 '주삼태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곳곳에서 사기행각을 벌였다. 


강희12년, 오삼계가 운남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낙방수재 양기륭(楊起隆)은 자신이 '주삼태자'라면서 북경에서 무리를 모아 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실패하고, 양기륭은 도망친다. 청나라조정은 여러번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양기륭은 이로 인하여 '삼번'의 우두머리에 바로 다음가는 특급지명수배범이 된다.


강희16년, 복건 영춘현의 사람인 채인(蔡寅)이 자칭 '주삼태자'라 하며 수만의 무리를 모아서 거병하고, 비밀리에 대만의 정경(鄭經)과 연락하여 장주(漳州)를 공격한다. 그러나 해등공(海登公) 황방세(黃芳世)에 의해 천보산(天寶山)에서 섬멸된다.


같은 해 육월, 하남 자성(柘城)에서 누군가 '주삼태자'라고 하며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에 진압된다.


강희18년, 섬서 한중, 흥안 일대에서 누군가 스스로 '주삼태자'라고 칭하며 반청 반란을 일으킨다. 나중에 무원대장군 도해(圖海)가 격패시키고 체포한다. 


강희38년, 강남이 김화상(金和尙)이 70여세된 노인을 '주삼태자'라고 옹립하며, 태호에서 무리를 모아, 강희가 남순할 때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체포되고 주살당한다. 


강희46년 십일월, 강소 태창주와 절강 사명산에서 거의 동시에 폭동이 일어난다. 두 곳의 수령은 모두 '주삼태자'라고 한다. 


여러 해동안, '주삼태자'의 이름을 걸고 반란이 일어나니 강희제에게는 그 이름이 악몽과 같았다. 매번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강희제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같았다. 그러다보니 강희제는 마음이 조급해저셔 관원들에게 빨리 진압하고 체포하라고 엄명을 내리게 된다. 관청에서 도대체 몇 명의 '주삼태자'를 붙잡았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이미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매번 붙잡은 것은 모두 가짜 '주삼태자'였다. 강희는 실망하고 기운이 빠져서 침식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이번에는 성과가 있을까? 진짜 주삼태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실제로 진정한 주삼태자 주자환은 사명산(四明山)에 있었다. 주자환이 여요의 호씨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후, 6남2녀를 낳는다. 다만 그는 시분이 노출될까 우려하여 여요에 상주하지 못하고, 사명산 일대를 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사명산에서도 '주삼태자'사건이 발생하니, 주자환은 더 이상 사명산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급히 처자식을 데리고 영파(寧波)로 간다. 자계현(慈溪縣)의 섭(葉)씨형제는 은연중에 주자환의 신분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의 넷째아들 주임(朱任)을 납치한 다음 그에게 '대사'를 도모하자고 한다. 그러나 주자환은 화를 내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다시 이름을 바꾸어 진해현으로 도망친다. 건물주인인 장월회(張月懷)는 분수를 지키며 살려는 사람이 아니어서 '주삼태자'의 명의로 반청활동을 전개하고자 한다. 주자환은 두려움에 다시 가족을 데리고 호주(湖州) 장흥현(長興縣)으로 간다.


강희제는 '주삼태자'에 대하여 두려우면서도 원한을 품는다. 그래서 계속 수색을 강화하도록 하다. 영파, 진해 등지에서도 계속하여 찾아다닌다. 엄밀한 수색망 속에 주자환 일가는 마침내 행적을 드러내게 된다. 가련한 처와 딸 6명은 모두 목을 매어 자진하고, 3남 1손자는 모조리 체포된다. 그러나, 주자환 본인은 도망쳐 빠져나갔다. 그는 다시 산동성 문상현으로 갔다. 


강희45년, 절강동부에서 화상 장념일(張念一)이 '주삼태자'를 자칭하며 거사를 일으키다 체포된다. 관부는 장념일이 입에서 주자환의 행적을 알아낸다. 그리하여 강희47년 사월 산동 문상현으로 가서 주자환을 체포한다. 주자환은 북경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는다. 관부에서 묻기를, "조정에 너에게 박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너는 왜 모반을 하느냐?" 답하기를, "나는 금년 75세이고, 혈기가 이미 쇠했다.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다. 삼번의 반란때도 반안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아무 일도 없는 시대에 반란을 일으킬 리 있겠는가? 그리고 소위 모반자들은 반드시 성을 점거하고, 양초를 준비해야 하며, 군인과 말을 구해야 하고, 무기도 만들어야 한다. 내가 그중 어느 하나라도 한 적이 있는가?"


이치대로라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자신의 마음의 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굳이 "주모는 비록 모반의 일은 없지만, 모반의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주자환과 그의 자손을 모조리 죽이게 한다. 주자환은 능치처참되고, 자손은 옥에서 병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참입결(斬立決)된다. 주자환이 죽자, '주삼태자'라는 이름도 이어서 사라진다.


그런데, 강희60년(1721년) 대만의 주일귀(朱一貴)가 반란을 일으키며, 여전히 '주삼태자'를 내세운다. 재위60년의 강희제는 한번도 '주삼태자'라는 이름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