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개풍문사(凱風文史)
강희60년(1721년) 11월, 강희제는 금교령(禁敎令)을 내린다. 여기서 금지하는 종교는 바로 '천주교'이다. 이때부터 2백년강 이어지는 '예의지쟁(禮儀之爭)'이 정식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이 분쟁을 일으킨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라, 천주교 로마교황청이었다.
드라마 <효장비사>를 본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강희제와 그의 부친인 순치지는 모두 천주교를 옹호했다. 비록 두 황제는 천주교를 믿지 않고, 천주교도도 아니지만, 그들은 천주교와 신부를 우대한다. 순치제때 독일국적의 천주교 신부 탕약망(湯若望)은 심지어 중국인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직무가 국운을 좌우하는 사천감(司天監)의 책임자로 앉힌다. 품계는 1품이다. 그외에 강희제는 강희31년(1692년) 용교령(容敎令)을 내린 바 있다. 천주교의 중국에서의 전파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친밀했던 관계가 왜 파열되었을까? 그리고 강희제는 친히 금교령을 내리게 되었을까? 이것은 천주교 로마교황이 내린 패도적인 교령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강희제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중국인민들도 참을 수 없었다.
1704년(강희43년) 로마교황은 중국천주교신자에 대한 금지령을 반포한다. 금지령에는 여러 항목이 있지만, 그중 가장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모든 중국천주교도는 일률적으로 공자에게 제사지내서는 안된다. 심지어 곁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구경하고 있어도 안된다. 선비들은 공묘에서 공자에게 스승의 예를 행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 모든 중국천주교도는 자신의 조상에 제사를 지내서는 안된다. 묘소를 찾아가서 예를 행해서도 안된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금지령도 명백히 중국의 전통에 반한다. 심지어 '경천(敬天)'과 같은 글자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등이 있었다.
로마교황은 왜 이런 황당한 금지령을 내리게 되었을까? 천주교도가 보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 이외에(1704년의 금지령에서는 중국의 신도들이 '상제(上帝)', '천(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왕왕 그것을 비천주교적인 의미로 쓰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신앙도 모두 이단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단은 무엇인가? 이는 두 사람을 통해서 이해해야할 것같다.
1704년의 금지령이 반포된 후, 교황은 다시 1715년에 다시 한번 반드시 이 금지령을 준수하도록 명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당에서 축출하겠다고 한다. 한 명은 갈릴레이 갈릴레오이다. 그는 17세기 이탈리아의 과학자인데,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온도계, 망원경을 모두 그가 발명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 찬동하였는데, 이 이론은 성경의 세계와 우주에 관한 이론과 달랐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에서 종신감금의 형에 처해진다. 또 다른 사람은 지오르다노 부르노이다. 역시 지동설에 찬동하여 참혹하게 죽는다. 그는 교회에 의하여 불에 타 죽는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이단'으로 불리웠다.
마찬가지로, 공자를 숭배하고, 조상에게 절을 하는 중국인도 모두 그때의 천주교인들이 보기에 '이단'이었다.
강희제가 처음 이 금지령을 들었을 때는 그것이 교황(강희제는 그를 敎化王이라고 불렀다)의 명령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여러번 사람을 로마교황청에 보내어 로마교황에게 확인하게 한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교화왕은 이치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짐이 글을 보냈는데 아직 회신이 없다. 어찌 이렇게 이치에 닿지 않는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짐은 분명히 교화왕의 진짜 교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천진한 강희제는 모르고 있었다. 교황은 그가 보낸 사신을 억류했다가, 몇년이 지난 후에야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과정을 보면, 1704년의 금지령은 일찌감치 천주교의 편협하고,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일찌기 1645년 즉 순치2년에, 당시의 교황은 일찌기 중국의 천주교도들에게 유사한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비록, 중국에서 활동하는 서로 다른 서방국가의 교단이 여러개 있었고, 그들간에는 심지어 자신의 로마교황청과 본국에서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상호간에 다툼이 있었고, 그리하여 금지령을 집행하는데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모든 서방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천적인 편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천주교외의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모두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1704년의 교황금지령이 나오게 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교황은 황제가 아니다. 그는 천주교의 최고사제이다. 사제는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이다. 천주교의 주교들은 모두 사제이다. 그를 교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순수히 명나라 후기 소수의 무지한 중국인들이 미화(美化)한 결과이다.
강희60년(1721년)에 이르러, 강희제는 로마교황의 금지령을 완전히 알게 된다. 이전에 가졌던 로마교황에 대한 신뢰와 인내심은 모두 바닥이 난다. 강희제는 아주 분개하여 말한다: "이 금지령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서양의 소인배들이 어찌 중국의 큰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강희제가 보기에, 중국인은 유가사상을 신봉하지 않는 천주교를 용납하는데, 천주교는 어찌 자신의 교도들이 중국의 전통을 신봉하지 말라고 하는가. 심지어 가장 기본적인 중국의 윤리조차도 금지하다니, 어찌 이치를 모르는 소인배가 아니던가.
그후 로마교황청은 금지령을 강화한다. 1742년, 교황은 내부에서 금지령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전에 누군가 금지령의 원칙에 영향을 주지 않는 전제하에서 약간 신축성있게 조정하자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천주교는 중국문화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더욱 멀리 가버렸다. 그리하여, 강희제이후 중국황제는 모두 기본적으로 강희제의 정책을 따른다. 천주교는 중국에서 불법의 형식으로 전파될 수밖에 없었다.
"예의지쟁"은 청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실제로 끝이 난다. 다만 로마교황은 시종 이 논쟁이 끝났는지 여부에 대하여 정식으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최종적인 전기는 일본의 중국침략전쟁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전기때도 다시 한번 천주교 로마교황청의 무지와 무덕을 드러낸다.
1931년, 일본이 중국의 동북삼성을 침략하여 점령한다. 그리고 1934년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를 데려다가 만주국을 세운다. 그리고 천주교이 대표로서, 로마교황청은 중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을 승인한다. 그러나, 만주국은 공자를 존중했다. 이는 로마교황청으로 하여금 '예의지쟁'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표명할 것인지의 문제로 된다.
1939년, 당시 로마교황은 명령을 발표한다. "교도들이 공자제사의식에 참가하는 것을 윤허한다. 교회학교에서 공자의 초상과 위패를 놓아둘 수 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도 허용한다. 만일 교도가 반드시 미신색채의 공공의식에 참가해야할 때는 반드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죽은 자 혹은 그의 유상, 패위의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은 허용되고 적당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숭배, 조상제사에 대한 금지령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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