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진나라는 진이세(秦二世)로 멸망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삼세(秦三世)를 언급하기도 한다. 진삼세라고 불리는 사람은 바로 자영이다. 그러나 그는 조고를 죽이고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일 이외에 다른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를 진삼세로 언급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그가 즉위하기 전에 이미 진(秦)이 스스로의 지위를 낮추어 황제의 칭호를 취소하고, 진왕(秦王)으로 자칭하였으며, 통일전의 각 제후국과 같은 지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각국으로부터의 적대감을 약화시키고, 당시 제후들이 참여한 의군의 공격을 중단시키고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황위를 가지고 따진다면 진나라는 확실히 진이세로 끝난 것이다.
진한교체기 혹은 초한전쟁의 전날, 이 자영은 실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또한 수수께끼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인물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앞에 호해가 몽염과 몽의형제를 죽이려 할 때, 그가 나서서 말린 것을 제외하고, 그의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아주 기이한 일이다.
이 사건은 "사구정변'이후에 발생했다. 호해는 조서를 위조하여 황장자 부소(扶蘇)를 죽인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후 몽씨형제를 죽인다. 이때 자영이 나서서 극력 말렸다. 그는 그렇게 하다가는 군신간에 틈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원문을 이러하다:
"신이 듣기로 옛날 조나라의 왕이 좋은 신하 이목(李牧)을 죽이고 안취(顔聚)를 기용했다. 연왕희(燕王喜)는 형가의 음모를 써서 진나라와의 약속을 어겼다. 제왕건(齊王建)은 대대로 내려오는 충신을 죽이고, 후생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 세 임금은 모두 예로부터 내려오던 것을 바꾸어 나라를 잃고,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친 경우이다. 충신을 주살하고 절제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다. 신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사기.몽염열전>에 기술되어 있다. 그 의미는, "조왕, 연왕과 제왕은 모두 충신을 죽이고 간신을 기용했다. 그 결과 국가가 멸망했다. 몽씨형제는 진나라의 대충신이다. 그런데 네가 그들을 죽인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충신을 죽이고 소인을 기용하게 되면 조정내의 여러 신하들이 서로 시기한다. 그리하여 외부에 있는 장병들이 투지를 잃게 된다."
다만, 조고(趙高)가 통제하고 있던 호해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몽씨현재는 그의 황위를 엄중하게 위협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몽씨형제는 조고의 사적(死敵)이다.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그래서 몽씨형제가 죽임을 당한 것은 대진제국이 동량지재를 잃은 것이다.
이는 자영이 진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유일하게 등장한 부분이다. 후세에는 자영이 사사된 부소의 아들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어서 호해는 조고의 의사에 따라,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모조리 죽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
나는 호해가 그의 모든 형제자매만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자녀에 대하여 어떻게 처치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치대로라면 이들 특히 진시황의 후손들은 모두 황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 당연히 모두 죽여야 햇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는 일이다.
궤이한 것은, 자영은 이 겁난을 피했다는 것이다. 더더욱 불가사의한 일은 조고가 그의 부친을 죽였으면서, 다시 그를 진왕으로 세워서 위기국면을 돌파하려 했다는 것이다. 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그 원한이 하늘에 닿고 불공대천이다. 설마 조고가 그걸 모른단 말인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이 조고는 그렇게 총명한 사람인데, 머리가 돌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영이 부소의 아들인지에 대하여 크게 의문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것은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영의 신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주류의 견해는 자영은 진시황의 형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기. 이사열전>에 이런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조고는 스스로 하늘이 허락하지 않고, 여러 신하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황제(始皇弟)를 불러, 옥새를 넘겨준다. 자영(子嬰)이 즉위한다. 병을 앓아서, 병을 핑계로 정무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환자(宦者) 한담(韓談) 및 그의 아들과 모의하여 조고를 죽인다."
이것은 명확하게 자영이 진시황의 동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의문스러운 점이라면, <사기>에는 또한 명확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2명의 동모이부의 형제 즉 그의 모친 조희가 노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일찌감치 진시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동생인 성교(成蟜)도 모반으로 피살당했다. 그런데 어디서 또 다른 동생이 나타난단 말인가?
<사기>에는 모순되는 기술이 많다. 이는 사마천을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진나라는 분서갱유와 나중에 항우가 함양을 불태워버린 것을 거치면서 전적이 거의 사라졌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로는 진실한 역사를 모조리 환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마천에 대하여 관용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자영이 진시황의 형제라고 직접 언급한 사료는 없다. 다른 곳에서 약간의 정보는 찾을 수 있다. <사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영이 조고를 죽일 때, 두 아들과 모의하여 일을 성사시킨다. 그렇다면, 그의 두 아들도 성년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시황은 50세때 사구에서 죽었다. 부소의 나이는 당연히 35살 정도일 것이다. 호해는 3년정도 재위했다. 만일 자영이 아들과 함게 모의를 했다면, 그는 부소와 나이가 거의 차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몇살이 더 많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자영은 부소의 아들일 수는 도저히 없다.
부소의 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혹은 진시황의 형제이건 아니든 간에, 분명한 것은 호해의 황위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였고, 심지어 호해의 자매들까지도 모조리 죽였는데, 왜 자영은 건드리지 않았을까?
이는 자영이 호해의 황위를 위협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황실의 적친(嫡親)이 아니었을 것이고, 매우 겸손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피살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도살을 피하고, 조고에게 왕으로 모셔져 진왕에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진황실의 적친이 아니기 때문에, 진왕조의 포악함에 책임을 그다지 지지 않을 수 잇었다. 그래서 그는 쳐들어오는 반란군에 환상을 품을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살려줄 것이라고 여기낟. 최소한 투항하는 행위로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반란군이 함양으로 쳐들어올 때, 조고는 호해를 죽인 후, 자영을 임금으로 올린다. 그리고 진왕으로 고쳐 부른다. 자영이 즉위한 후 5일째 되는 날, 신속하게 조고와 그의 삼족을 멸한다. 한달여가 지난 후, 유방에게 투항한다. 옥새와 병부를 들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자영은 "흰수레와 흰말에 목을 묶고, 황제의 옥새와 부절을 받들고, 치도의 곁에 서서 항복했다." 이렇게 유방이 함양으로 진입하도록 한다. 그는 46일간 재위했고, 진제국은 멸망한다.
자영은 인애롭고 절제할 줄 알았다. 사람들의 눈에 인자한 사람이었고, 명성이 좋았다. 유방은 그를 상당히 존중한다. 두 사람은 무릎을 맞대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진나라와 깊은 원한이 있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항우가 입성한 후, 즉시 자영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다. 진나라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자영은 진왕조의 멸망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재위한 기간은 실제로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약간의 병사는 남전의 전투에서 모조리 잃는다. 함양부근에는 거의 쓸 수 있는 병사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선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모주석도 말한 바 있다. "싸워서 이길 것같으면 싸우고, 싸워서 이길 수 없을 것같으면 도망쳐라" 함양은 사방이 트여 있다. 수비할만한 험준한 요새는 없다. 성벽조차도 없다. 당시 시황제는 아마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쳐들어올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비성곽제(非城廓制)"의 국면을 채용한다. 그래서 당시의 함양은 성벽이 없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것은 막을 병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영은 함양을 도망칠 수는 없었을까? 당현종처럼, '촉지(蜀地)로 서행(西幸)"하여 사천에 몸을 숨겼다가 재기를 도모할 수는 없었을까? 서태후도 팔국연합군이 쳐들어오니 바람보다 빠르게 도망치지 않았던가.
자영에 있어서, 이는 그저 이론적인 가설일 뿐이다. 비록 파촉의 땅은 일찌감치 대진제국의 후방기지가 되었지만, 그 당시는 정보가 빠르게 유통되지 않았다. 그래서 파촉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일찌감치 반란군에 점령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당시 당현종이 안사의 난때 사천으로 가려고 결정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경우라 할 수 있다.
함양의 사방은 상황이 불명확했다. 그들이 보기에, 일찌감치 반란군에 둘러싸여 있어서 도망칠래야 도망갈 곳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하늘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는데,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진왕조는 호해의 멍청한 짓으로 일찌감치 인심을 잃었다. 자영이 등극한 후, 여러가지 어지러운 일들도 아직 처리되지 못했다. 진나라의 모든 능력있는 신하와 장수는 일찌감치 조고에게 죽임을 당했다. 짧은 한달여동안 근본적으로 이런 국면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이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렸다기 보다는 실로 아무런 힘이 없어서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진나라는 진이세 호해에게서 망한 것이고, 자영은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영이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린 것만은 아니다. 무관(武關)을 지키는 진나라장수가 유방에게 투항한 후, 그는 사람을 모아서 요관(墝關)을 지키게 했다. 이는 최후의 노력이다. 다만 그의 수하에 이미 그럴듯한 장수와 병사는 없었다. 게다가 함양은 지킬 성벽이 없었다. 그러니 유방수하의 정예병력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유방이 요관을 우회하여 뒤에서 공격하자, 진나라병사들은 오합지졸이 되어 흩어져 버리고, 나머지는 투항한다.
자영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때를 잘못 만났다. 비록 역사에서 진나라멸망의 책임을 그에게 지우지는 않았지만, 진왕조는 그의 손에 망했다. 이는 타툼없는 사실이다. 그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중국역사상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황제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다.
요즘 고대역사드라마가 유행하고 있다. 진한시대를 묘사하는 내용도 비교적 많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점이라면 거짓으로 꾸며내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영이 항우에게 피살당한 것은 항우의 여자, 그 유명한 우희가 그를 사랑하게 되어서 항우가 부득이 자영을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희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이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그 작가는 아마도 사람의 눈길을 끌만한 소재를 찾지 못했던 것같다. 그래서 말도안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항우가 여후와 사랑에 빠졌다든지, 우희가 혼외애인으로 그리는 기발한 내용을 보면, 자영과 우희간의 사랑이야기는 별 게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일반인들에 있어서, 역사지식을 얻는 것은 많은 경우 오락프로그램으로부터이다. 예전에 무대의 희극때문에 진세미의 억울한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그리고 목계영의 영웅담이 나타난 것처럼.
나는 정말 걱정된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황당무계하고 그저 군중에 영합하는 엉터리로 만든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진실한 역사로 자리잡지나 않을지, 그건 정말 역사의 비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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