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림지청(靑林知靑)
모두 알고 있다시피 영정(嬴政)의 제왕생애는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진왕(秦王)과 시황제(始皇帝). 그는 일생동안 모두 5명의 승상을 임명했다: 그중 모두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두 명이다. 여불위(呂不韋)와 이사(李斯). 그 외에 왕관(王綰)과 외상(隗狀)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다. 사서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있는 외에 우리가 지금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바로 창평군이다. 그가 일찌기 진나라의 승상이었다.
중국역사상의 승상은 많다. 특히 송나라때는 더욱 그러하다. 다만 대다수는 황제의 권한을 나눠서 승상에 상당하거나, 혹은 승상의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상(相)"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진나라의 승상은 달랐다. 오직 1명이다. 말그대로 1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이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에서 그 사람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해야 한다. 그러나, 창평군은 그럴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서에 그는 거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증발이다. 이력으로 소개할 만한 것이 없다. 우리는 그저 사서에 흩어진 기록중에서 창평군에 대한 개략적인 윤곽을 잡아볼 수 있을 뿐이다.
창평군의 부친은 초왕의 아들인 웅원(熊元)이고, 일찌기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진시황의 부친 이인(異人)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있던 것과 같다. 웅원은 진나라에서 진왕의 왕실여인을 부인으로 취하여 창평군을 낳는다. 그러나, 그가 9살때, 부친은 초나라로 귀국하여 초고열왕(楚考烈王)에 오른다. 그러나 창평왕은 그 부친의 이전 직책을 이어받아 모친과 함께 계속 진나라에 머물며 인질로 있었다.
일찌기 진나라는 아주 비참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역사상 진목공(秦穆公)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제후국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진류공(秦謬公)이라고 불렀다. 이 글자 한 자의 차이에서 우리는 알 수 있듯이 중원제후국은 진나라를 아주 무시했다. 너는 기껏해야 주왕의 말을 기르던 자가 아니냐. 필마온(弼馬溫)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런데 감히 '공(公)'을 칭하다니. 그래서 그 당시 중원제후국들은 진나라와 같이 어울려주지 않았다.
그래도 진나라와 사이가 좋은 곳을 찾자면 초나라였다. 왜냐하면 중원제후국의 눈에 초나라도 오랑캐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모두 구석진 곳에 있는 미개한 나라이다. 그리하여 이 두 중원제후국이 무시하는 국가들끼리 자연히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초나라는 조정에 거의 모두 본국귀족을 기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진나라는 비교적 개방적인 용인정책을 쓴다. 인재를 중시여기지, 출신지는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나라의 인재들이 본국에서 기용되지 못하면, 속속 진나라로 와서 재능을 펼친다. 예를 들면, 위(衛)나라의 상앙(商鞅)과 초(楚)나라의 이사가 있다.
이 창평군도 진장양왕 시기부터 진나라 정계에 진출한다. 당연히 이는 당시 아직 살아있던 미융(芈戎)의 질녀인 진시황부친의 양모 화양부인(華陽夫人) 때문이다. 이 '미'성에서 우리는 알아볼 수 있듯이, 초나라귀족의 성씨이다. 우리가 본 TV드라마 <미월전>에서 느꼈겠지만, 진나라의 조정과 궁중에는 초나라출신들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기실 진나라에서, 각종 외척세력이 많았다. 영정이 귀국했을 때, 최대의 세력은 당연히 조나라이다. 왜냐하면, 그의 모친이 바로 조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도와준 여불위는 위(衛)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공하고 생활한 것은 조나라였다. 영정 본인도 조왕이 호송해서 귀국시켜주었다. 당연히 그외에 한나라와 기타 국가의 외척세력도 있었다.
조나라의 외척세력을 얘기하자면, 한 사람을 얘기해야 한다. 노애(嫪毐)이다. 그는 대명자자한 인물이다.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이름을 잘못 읽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이 아주 낯설 것이다. 이 이름은 아주 기이하지 않은가? 필자는 아주 이상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성이 노(嫪)인 사람은 그 혼자뿐이다. 그리고 이름을 애(毐)라고 지은 사람도 그 혼자 뿐이다. 그가 정말 이 이름으로 불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의심이 든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분석한다. 이는 애칭 '노애(老愛)'의 음역이라고. 하하. 이것도 설중 하나이다. 필자도 전혀 믿지는 않는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자는 근본적으로 이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때 일반적인 백성은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노애'라는 것은 특별히 어떤 공능이나 인물을 대표하는 것일 것이다. 사마천이 이 두 글자로 그를 가리킨 것일 것이다.
그는 가짜태감이었다. 왜냐하면 성능력이 독보천하여서 여불위가 그를 궁으로 들여보낸다. 그를 대신하여 영정의 모친 조희를 상대하게 한 것이다. 그는 조희의 총애를 깊이 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중할 줄 몰랐고, 외부(外府)에 사람을 거두어 키운다. 나중에는 영정이 외출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노애의 반란을 진압한 공신이 바로 창평군이다.
과정은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다. 반란이 평정되면서, 조나라의 외척세력도 모조리 제거된다. 이어서 여불위는 승상에서 파직된다. 창평군이 승상에 임명된다. 조정의 외쳑세력중 초나라세력이 독보적이 된다.
우리는 모두 한 가지 괴현상을 알고 있다. 진시황은 황후가 없었다. 그에게는 20여명의 자녀가 있었다. 다만 그의 황궁내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황후도 창평군과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영정에 의해 깨끗이 지워졌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잔존한 몇 가지 문구나 여러가지 기괴한 현상을 보면,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영정의 황후는 분명히 초나라여인이었다. 창평군은 공자 부소의 외삼촌이다. 장남 부소의 몸에는 초나라의 혈액이 흐르고 있다.
아마도 모두 초나라와 진나라 두 나라는 원수지간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초회왕(楚懷王)이 바로 진나라에서 죽지 않았던가? 기실, 그것은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키려는 발걸음을 내디딘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두 나라의 관계가 아주 복잡했고, 미묘한 관계였다.
"초수삼호(楚雖三戶), 망진필초(亡秦必楚)" 진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과연 항우와 유방이라는 초나라사람들이었다. 당초 진승이 대택향에서 반란의 기치를 들때, 그가 내건 구호는 항연(項燕)외에 또 다른 더욱 호소력있는 인물을 내세운다. 그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이지만, 진공자 부소의 기치를 내걸어 민중들을 단결시켜 진나라에 항거하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손중산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부의의 이름을 내건 것과 같다. 괴이할 수밖에 업삳.
이는 기실 측면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반영한다. 바로 부소와 초나라의 관계이다. 부소가 왜 거짓조서를 받은 후, 진위를 판별하지 않고 자살한 원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정이 육국을 멸망시키는 전쟁을 시작할 때, 먼저 제거해야하는 것은 조정의 각국을 대표하는 외척세력들이었다.초나라를 멸망시키려면, 먼저 창평군같은 사람부터 제거해야 했다.
영정이 왕전(王翦)으로 하여금 육십만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게 할 때, 창평군은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그는 마침내 기울어가는 초나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항연의 추대로 초왕에 오른다. 그리고 초국인민을 이끌고 진나라에 항거한다. 이렇게 되니 진시황과 조정에서는 군신관계였지만, 전쟁터에서는 너죽고 나살기의 적수가 된다. 다만 마침내 진나라군대를 당해내지 못해, 전쟁에서 화살을 맞고 죽는다.
창평군의 반란은 영정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찌기 신임하고 중용했던 조정중신이 그의 적이 된 것이다. 이는 오만한 영정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창평군이 죽은 후, 그는 사서에 그와 관련한 모든 기록을 삭제한다. 여기에는 그 초나라 황후도 포함되어 있다.
초나라는 진나라에서 외척세력이 제거된 후에도 초나라의 피가 흐르는 부소는 장성으로 쫓겨가서 변방을 지켰다. 그러나 부소는 마음 속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자의 자리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부친은 언젠가 그에게 독수를 내릴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일찌감치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서가 내려오자마자,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직접 자결하여 끝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진승이 나중에 그의 이름을 걸고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킬 줄은. 확실히 그는 초당(楚黨)이다.
이 창평군은 역사에서 소멸되었다. 기실 우리가 현재 보기로, 그의 이 칭호도 아주 기이하다. 그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와 비슷하지 않은가? 무슨 평원군, 맹상군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창평군은 아마도 나중에 육국의 후인들이 그에게 붙여준 칭호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기록했든지간에, 나라가 멸망하면서, 모든 문헌자료는 모조리 진나라에서 거두어 간다. 영정이 명을 내려서 삭제하면, 후인은 그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게다가 나중에 분서갱유도 있었다. 모든 것이 안개 속에 갇힌 것이다.
사마천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사기>를 쓸 때, 자료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흔적을 찾아내서, 우리에게 약간의 사료를 남겨주었다. 진상은 그도 잘 몰랐다. 그래서, 사마정의 <사기색은>에서는 창평군의 신세에 대한 단서를 찾을 때, 그저 이렇게 적었을 뿐이다, "창평군. 초의 공자이다" "사료에서 이름이 실전되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그저 약간의 정보를 가지고 이런 인물을 그려볼 수 있다. 맞는지 아닌지, 합리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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