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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진(秦)왕조의 마지막 왕 자영(子嬰)은 누구의 아들일까?

by 중은우시 2019. 6. 26.

글: 일합쾌락인생(壹哈快樂人生)


천고일제 진시황은 중국역사상 최초로 통일왕조를 이룬 제왕이다. 그러나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시피, 진왕조는 3세만에 망한다. 기원전207년 유방의 대군이 함양성 아래로 쳐들어왔을 때, 진삼세(秦三世) 자영은 성 밖으로 나와서, 역사상 최초의 봉건왕조의 멸망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삼세 자영의 신세내력은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어떤 사람은 자영이 진시황 영정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영이 기실 진시황의 동생이라고 한다. 도대에 자영의 신세내력은 어떻게 된 것일까?


자영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진이세 호해(胡亥)의 등극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조고는 몰래 진시황의 유조를 위조하여, 황장자 부소와 대장 몽염을 자살하게 한다. 이때 자영은 사적으로 호해를 말렸다. 그러나 호헤의 사람됨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자영의 권고를 전혀 듣지 않는다. 자영은 아주 지모가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호해가 마구 황족을 죽일 때도 살아남았다. 나중에 도광양회하여, 등극한 후에는 직접 조고를 주살하고, 진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준비흘 한다. 역사상 어떤 사람은 만일 진나라가 항우, 유방등에게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자영의 손에서 더욱 잘 발전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다만 역사는 어쨌든 역사이다. 자영도 진나라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비록 유방이 자영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항우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자영의 신세내력에 관하여, 모두 3가지 추측이 있다. 첫째는 자영이 호해의 조카라는 것이다. 즉 부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주로 <진시황본기>에서 연원한다. 거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입이세형지자공자영위진왕(立二世兄之子公子嬰爲秦王)"(진이세 즉 호헤의 형의 아들인 공자영을 진왕으로 세우다) 여기에 '형의 아들'이라는 것은 즉 호해의 형인 부소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본ㄴ다. 당시 호해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영을 황위 승계인으로 삼은 것이다. 이 주장은 찬성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둘째 견해는 자영이 진시황의 동생이라는 것이다. <이사열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고자지천불야(高自知天弗也), 군신불허(群臣弗許), 내소시황제(乃召始皇弟), 수지새(授之璽)"(조고는 스스로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여러 신하들도 허락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진시황의 동생을 불러서 옥새를 준다.) 여기에 나오는 '시황의 동생'이 바로 자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자영이 바로 진시황의 동생이라고 본다. 그러나 만일 자영이 정말 진시황의 동생이라면, 호해가 죽었을 때, 최소한 자영은 이미 40여세가 되어야 한다. 이런데도 조고가 계속하여 자영을 자신의 허수아비로 삼으려 했다면, 현실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으로 이것은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세번째 추측은 바로 자영이 호해의 형이라는 것이다. 이 일파의 견해는 <육년연표(六年年表)>에서 "고입이세형자영(高立二世兄子嬰)"(조고가 진이세 호해의 형인 자영을 세웠다). 그 의미는 조고는 진이세 호해의 형인 자영을 새로운 진왕으로 옹립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추측에는 의문점이 있다. 진이세가 즉위한 후, 먼저 한 것은 바로 자신의 형제중 황위에 위협이 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진시황의 황자들은 거의 모두 진이세 호해에게 주살당한다. 자영은 역사상 무슨 중대한 질병이 있다거나 장애가 있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만일 정말 진이세의 형이라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 추측도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위의 세 가지 견해가 비굦거 주류의 견해이다. 그러나 모두 헛점이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자영은 바로 진시황의 조카라는 것이다. 즉 진시황의 동생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당시 진시황은 모두 3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 중 2명의 진시황의 모친 조희(趙姬)가 노애(嫪毐)와 사통하여 낳아서, 나중에 노애의 난때 죽임을 당했다. 남은 동생은 성교(成礄)뿐이다. 성교는 진장양왕의 아들로서, 장안군(長安君)에 봉해졌고, 나중에 영정이 성교로 하여금 조나라를 공격하게 할 때 성교는 반란을 일으켜 조나라의 둔류(屯留)에 남는다.


나중에 진군이 둔류를 공격한 후, 성교의 부하는 연좌로 모조리 참수된다. 둔류의 백성들 조차도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나 성교는 조나라의 군왕에 의해 요(饒)에 봉지를 받고, 일생동안 진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영이 성교의 아들이라고 보는 이유는 바로 <이사열전>에서의 "제자영(弟子嬰)"을 '동생의 아들 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시황의 동생 중에서 아들을 낳았을 사람으로는 성교밖에 없다.


나이로 추정해보더라도, 성교는 개략 기원전 256년경에 태어났고, 당시 진나라의 남자들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아 혼인을 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자영은 개략 기원전 240년에 출생했다. 그래서 나이로도 들어맞는다. 성교는 기원전239년 조나라에 투항했고, 이때 자영은 이미 2살이 되었는데, 아마도 진나라에 남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호해와 동년배이다. 나이는 호해보다 약간 많다. 이렇게 추단해보면, <육국년표>에서 "조고가 진이세 호해의 형 자영을 세웠다"는 것에서 호해의 형이라는 것은 그의 사촌형을 말한 것이 아닐까? 여기에 진이세는 자신의 형제자매는 모조리 죽여버렸으므로 그저 자영만이 나서서 진이세에게 말ㅇ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진이세에게 아무런 권력의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는 자영이 기실 진시황의 동생인 성교의 아들이고 '영영(嬴嬰)'으로 불리워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