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문학일반

노사(老舍): "인민예술가"인 그는 왜 '문혁'때 비투를 받고 자살해야 했을까?

중은우시 2021. 1. 15. 13:34

글: 정문(鄭文)

 

노사는 1949년이후 중국에서 최초로 '인민예술가'의 영예칭호를 받은 사람이고, 공인된 신시대의  '창작표병(創作標兵)'이었다. 그러나 그는 왜 돌연 자살해야 했을까? 그는 모택동 및 중국공산당과 무슨 관계였을까?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노사의 본명은 서경춘(舒慶春)이고, 부친은 만주족으로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할 때 순국했다. 그리하여 일가족은 모친이 바느질과 빨래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노사는 북경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 교장, 교육국 관리를 지낸다. 그후 영국 런던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노장의 철학(老張的哲學)>, <조자왈(趙子曰)>, <이마(二馬)>등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점차 명성을 얻게 된다. 1936년에는 그의 대표작 <낙타상자(駱駝祥子)>를 발표한다.

 

항전시기에 노사는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 상무이사 겸 총무부주임이 되어, 대니적으로 일상업무를 책임지고, 대외적으로 '문협'을 대표한다. 실실직으로 '문협'의 실제책임자가 된다. "노사는 친구들을 잘 사귀는 것으로 사방에 유명했고, 그는 '소명인(素名人)'(풍옥상의 말)으로 정치적 배경이 없었다. 여하한 문에게의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이런 위치는 그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작가들을 단결시켜 항전선전과 문예번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이로 인하여 모택동 및 주은래등 공산당원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1939년 9월, 노사는 전국위로총회 북로위문단에 참가하여 연안으로 간다. 거기서 모택동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모택동은 위문단을 접견했는데, 노사등 책임자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모택동은 노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주은래의 친구이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이다. 항전을 위하여 우리 함께했다...." 9월 10일 환영연회에서 모택동은 환영사를 하고, 노사는 즉석연설을 한다. 오백소(吳伯蕭)의 회고에 의하면 노사는 모택동과 건배를 하면서 술잔을 부딛칠 때 진심으로 찬탄했다고 말한다: "모주석은 오호사해의 주량을 가지고 있어, 나와 비교할 수 없다; 나 한 사람은 모주석 곁의 수억인민군중중 하나이다." 돌아오기 전에, 모택동은 다시 위문단과의 좌담에 참가했고, 노사등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당시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노사는 주은래와 교류가 더욱 많았다. 노사가 '문협'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은래의 지지때문이었다. 노사가 '문협'의 업무를 주관한 것은 주은래가 지도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노사선생은 주은래과 여러번 접촉했다. 이는 그로 하여금 중국공산당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고, 최종적으로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 '공산당의 충실하고 신뢰할만한 친구가 되었다'" 1949년 7월, 제1차 문대회(文代會)가 개최될 때, 노사는 미국에서 방문학자로 창작하고 있었다. 주은래는 주변의 작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노사가 빠졌다. 그를 빨리 돌아오게 해달라." 그리하여, 주은래의 창의로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주양(周楊), 정령(丁玲), 조옹(曹禺), 전한(田漢)등 30여명이 연명으로 노사에게 귀국해달라는 요청서신을 보내게 된다. 노사는 요청서신을 받은 후 즉시 귀국한다.

 

다른 좌익작가들과 다른 점이라면, 노사는 원래 공산당 및 그 신앙에 대하여 그다지 많이 접촉하거나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일찌기 기독교도였다. 오랫동안 본질적으로 자유작가였다. "1946년이 되어, 노사는 조옹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다. 그는 이미 '자유주의자, 무당파, 그가 분투하는 것은 중국의 자유와 인민의 복리'라는 것을 인정받는다." 다만 1949년이후 노사는 빠르게 변신한다. 그는 귀국후체 가장 먼저 <모택동선집>을 찾고, 진지하게 모택동의 <연안문에좌담회상의 말씀>을 읽는다. 그후에 북경문련주석, 중국작가협회 부주석등의 직위를 맡는다. 그리고 금방 신중국의 성취를 칭송하는 <방진주(方珍珠)>, <인민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영광스럽다>, <신사회는 하나의 대학교이다> <태평가사(太平歌詞)>, <용수구(龍鬚溝)>, <홍대원(紅大院)>등 '칭송' 글을 쓰고, 이를 통해 '인민에술가'라는 영예칭호를 받는다. 그리고 시대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낙타상자>, <사세동당(四世同堂)>등의 저작을 수정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호풍(胡風), 정령, 풍설봉(馮雪峰)등을 비판하는 각종 문예계의 활동과 각종 명절행사에 참여한다. 호풍은 노사의 오랜 친구이자, 그가 '문협'을 주재할 때의 친밀한 동료였다. 그러나 노사는 <"호풍반혁명집단을 성토"하는 것을 옹호한다>, <호풍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인민에게 타기(唾棄)된 쓰레기를 청소하자> <모두 전투에 참가하자>등의 글을 써서 호풍을 성토한다. 호풍이 "20년동안, 나는 그의 문제는 단지 마음이 편협하고, 안중무인인 것뿐이라고 여겼다. 서무(舒蕪) 선생이 발표한 '호풍신찰(胡風信札)'을 보고 나는 비로소 원래 호풍은 단지 마음이 편협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그는 그의 소집단 이위의 사람을 모두 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혁명을 진압하려면, 문단의 폭군이 되어야 한다."

 

노사는 또한 직접 모택동을 숭배하는 약간의 글도 발표한다. 예를 들어 그는 1952년 <모주석은 나에게 새로운 문에생명을 주었다>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먼저, 나는 태도를 결정했다; 나는 모주석의 말을 들어야 하고, 모주석을 따라가야 한다! 모주석의 말을 듣는 것은 영광이다! 만일 내가 진보를 추구하지 않고, 여전히 노작가로 자처한다면, 모주석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고,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나는 모주석의 지시 속에서, 스스로의 새로운 문에생명을 찾아냈다." 1954년 8월, 그는 <모주석, 나는 당신을 뽑았다>라는 글에서는, "나는 멍하게 당신의 빛나는 이름을 보았다.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내가 50세이후에 청춘을 되찾게 해주었다. 마치 고목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1954년 9월 그는 산문 <가장 영광스러운 때>에서 이렇게 감격해서 썼다: "정말, 누구든 평생 이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노동이 행복한 이 날을." 

 

노사는 모택동과 더 많이 교류했다. 모택동은 노사가 창작한 <용수구>, <십오관(十五貫)>등의 희극을 관람했다. "좋은 화극(話劇), <용수구>같은 것은 나도 보았다." 그리고 노사로 하여금 최고국무회의에 참가하도록 초청하기도 했다. 1960년 4월 전인대 2기 2차회의의 휴식시간에 모택동은 돌연 노사의 곁으로 걸어와 그와 '강희제의 공헌'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다. 모택동은 강희제의 가장 큰 역사적 공헌은 오늘날 우리국가가 보유한이 영토를 차지한 것이고, 두번째 역사적 공헌은 그의 통일전선정책이며, 세번째 대단한 점은 그가 상벌이 분명한 용인제도를 썼다는 것이라고 했다. 모택동의 강희제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만주족인 노사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노사는 나중에 부인과 함께 장사로 가서 모택동고거를 참관하기도 한다.

 

노사는 시대에 순응하는 동시에, 기실 스스로 견지하는 것도 있었다. 에를 들어, 그가 1957년에 쓴 <자유와 작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작가자신들의 조직으로서 작가협회는 작가들의 곤란을 해결해줄 의무가 있다. 다만 작가의 자유에 간섭할 권리는 없다." 그는 주은래등이 건의를 듣지 않고 <차관(茶館)>등의 창작을 고집했고, 또한 모택동이 그에게 쓰라고 한 <강희대제>도 쓰지 않았다. 근 '좌'적인 것에 대하여는 거부감이 있었다. "일상업무에서, 노사는 '좌'경적인 거동에 맞서는 경향이 강했다. 문련의 젊은 여간부가 붉은 색의 외투를 입었다가 지적을 당한 일이 있었다. 노사는 전문련대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붉은색은 혁명을 대표하지 않는가?  그런데, 붉은 외투를 입은 것이 어떻게 자산계급이 된단 말인가?" 설사 그가 비판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나중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령은 '우파'로 몰린 후 제3차문대회에 참가했는데, 노사만이 그녀에게 다가가 악수하고 물었다: "어떠냐? 잘 지내는가?" "노사는 사회주의건설을 옹호했다. 다만 그는 그후의 창작주제는 역사의 반성과 대조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3개의 '공백의 원단'을 지낸 후, 노사는 이미 미묘하게 태도가 변해 있었다. 그 안에는 그의 강한 호기가 있었다. 실패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대표적인 성과물은 <차관> <정홍기(正紅旗) 아래에서>이다."

 

그러므로, 노사의 당시 정치에 대한 태도가 '진심'인지 아니면 '부연(敷衍)'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아마도 둘이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떤 때는 진심으로 믿었고, 어떤 때는 그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필요에서 그저 따른 것이고, 어떤 때는 양자가 모두 겸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학자인 서덕명(徐德明)은 <도본노사전>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각종 사회활동에 참가했고, 이를 통해 자신은 이미 자산게급 개인주의를 극복했다고 증명했다. 그는 단지 내심으로 독립적인 지식인의 냉정한 사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사는 자신의 <팔년소득(八年所得)>에서 어렇게 솔직히 털어 놓았다: "너희는 아마도 내가 69세의 자산계급노인이라고 여길 것이다. 한편으로 혁명이 성공하기를 원하면서, 한편으로 항상 혁명의 발걸음을 쫓아가지 못하는. 우리같은 노인은 우리의 행위에 대해 사죄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왜 이렇게 하는지 설명하고, 자신의 미래를 찾아가는 젊은이들을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것이다." 

 

1966년 '문혁'이 발발한 후, 노사는 모순등 작가들과 연합하여 노사가 모택동에 보내는 서신을 집필하여,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가하겠다고 하며, 스스로 급여를 1/3에서 절반으로 깍겠다고 말한다. 노사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시대의 '창작표병'이었던 그가 '혁명의 대상'이 될 줄은. 그는 죽기 1달여쯤 전에 파금(巴金)에게 이런 말을 한다: "친구들에게 얘기해달라. 나는 문제없다." 그러므로, 1966년 8월 23일 홍위병이 북경시문련을 찾아와서 사람을 잡아내어 비투를 할 때, 원래 대상자에 들어있지 않던 노사는 자신이 문련주임이므로 앞장서서 나섰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얻어맞는다. 그후 파출소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다음 날 '현행반혁명'이라는 팻말을 들고 오라고 요구받는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는 처인 호지청(胡摯靑)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믿는다. 모주석, 주총리는 나를 이해할 거시다. 인민은 나를 이해할 것이다." 다음 날, 노사는 태평호공원(太平湖公園)에서 거의 하루종일 <모주석시사(毛主席詩詞)>를 읽다가 호수에 투신하여 자살한다.

 

노사가 비투를 받은 것은 우연한 원인도 있다. 그가 스스로 앞장서서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연성도 있다. 그는 언젠가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좌익문예계는 원래 노사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았다. 그의 <묘성기(猫城記)>는 공산당의 맹목적인 폭동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어 일찌감치 죄익비평가들로부터 엄중한 비평을 받은 바 있었다. 그가 1949년 작협 부주석에 당선될 때도 일부 해방구에서 온 문학공작자들로부터의 반대가 있었다. 그는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1960년 북경시위 문화부는 노사를 비판할 준비를 했었고, 비판자료도 모두 인쇄되었다. 단지 나중에 비판명단에서 삭제되었을 뿐이다. 노사는 사후에 '인민에게 자결했다'는 '증명서'를 얻는다. 1967년 8월 북경시문련 <향태양> 혁명조반병단이 편집한 <양개사령부의 투쟁으로 본 북경시문련이라는 페퇴피구락부>에는 '반동학술권위' 노사에 관한 자료가 적지 않다. 노사는 비록 1949년이후 스스로를 개조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자신의 '쟈유' 본성은 고치질 못했다. 하물며 그 시대에는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액운을 벗어날 수 없었다.

 

노사의 자살은 '이념이 운명을 결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도로서 자아희생의 '사여(舍予)'정신이 있다. 그리고 중국문인이 가장 숭상하는 "사가살불가욕(士可殺不可辱,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는 기개도 있다. 그는 일찌기 <노신선생서거2주년기념>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한 사람의 정력과 재능이 영원히 그의 바램과 계획과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생 최대의 고통이다. 그 고통이 갈수록 깊어진다는 것은 분명히 알면서도 앞으로 나가서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그야말로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