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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진사경(陳嗣慶): 우리집 둘째 삼모(三毛, 싼마오)

by 중은우시 2022. 9. 2.

글: 진사경(陳嗣慶)

 

나의 딸 진평(陳平)의 원래 이름은 진무평(陳懋平)이다. "무(懋)"는 집안에서 그녀 대의 항열자이고, "평(平)"자는 그녀가 태어난 해는 전쟁이 빈번하고 부친으로서 이 세계에 전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아이에게 "평화(和平)"의 사명을 준 것이다. 나중이 이 아이는 글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어떻게 해도 "무(懋)"자를 쓰지 못했다. 매번 이름을 쓸 때면 모두 가운데 글자를 빼버리고 자기를 "진평"이라고 했다. 그뿐아니라, "진(陳)"자의 왼쪽 변을 오른쪽으로 옮겨서 오른쪽에 썼다. 그렇게 되니 부친으로서 나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은 것은 23살때였다. 나중에 나는 그의 동생들에게서도 모두 "무(懋)"자를 빼버렸다.

 

한해는 그녀가 다시 혼자 결정해서 자신으 "Echo"라고 불렀다. "이건 부호이고 이건 숭양(崇洋)이다" Echo라는 이름을 여러 해동안 썼다. 어느 해인가 나에게 묻지도 않고 다시 "삼모(三毛)"로 바꿔 버린다. 삼모로 바꾼 것은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녀의 말로는 자기가 집안의 둘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인데 왜 삼모인지, 그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단지, "삼모에는 역경의 괘가 숨어 있다. 그래서..." 나는 놀라서 이름 짓는데 점까지 친단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먼저 지은 후에 역경을 봤더니 의외로 그런게 있어서 나도 깜짝 놀랐다"고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 모든 집의 둘째는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르다고 들었다. 삼모도 그런 말에 동의했다. 그녀의 이유는 이러했다: "둘째는 마치 가운데 끼워져있는 크래커와 같다. 부모가 보는 것은 아래와 위의 것이고, 중간에 끼어있는 것이 기실 맛이 좋은데, 잘 살펴보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뛰쳐나와 말썽을 부리면서 관심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삼모는 평생 부모를 원망했다. 그녀는 스스로 집에서 냉대를 당했고, 발버둥치면서 살았다고 말한다. 이 점에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그래도 그녀는 끝까지 그렇게 주장한다. 기실 우리가 부모로서 그녀에게 괴롭힘을 당해왔다. 그녀느 19살반에 집을 떠나 20년간 돌아오지 않았다. 귀국할 때 항상 우리가 너무 잘먹고 있다고 욕했고, 자주 우리가 그녀에게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모르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이 그녀에게는 그냥 펜을 들어 써내려가면 되지만, 우리에게 편지 하나 쓰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삼모는 어떤 때는 집에 매일 한통씩 써서 보냈다. 무슨 남자친구얘기, 새로 산 옷얘기, 누구랑 싸운 얘기, 심지어 고기 한 점을 먹어도 편지에 써서 보고한다. 우리야 그녀의 편지를 받으면 당연히 위안이 되지만, 그녀의 그런 서신 '대공격'은 20여년동안 휴전이 없었다. 나중에는 방식도 다양해져서, 우리는 견디기 힘들었다. 회신도 모두 애걸해서 쓴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항상 편지에 "너희는 어때? 어떻게 지내? 뭘 먹고, 입고, 사랑하고, 즐기는지 알려줘. 내가 향수를 달랠 수 있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회신했다: "우리는 평안하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녀는 이런 천편일률적인 회신을 가지고 우리가 그녀에게 냉담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번은 귀국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친 적이 있다. 우리가 이십년동안 편지가 너무 간단했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집안의 사정을 추측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다른 일은 다 내려놓고 매일 자기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요구했다. 돈을 보내달라고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삼모는 어려서부터 아주 독립적이었고, 아주 냉담했다. 그녀는 여자아이들이 노는 놀이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놀지도 않았다. 두살때, 우리가 충칭(重慶)에 살던 집 부근에 황폐한 묘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무서워서 가지를 않는데, 그녀는 항상 묘 옆에서 진흙놀이를 했다. 그리고 명절때 양을 잡는 것에 그녀는 크게 관심을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양을 도살하는 과정을 주시했다. 다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고, 얼굴에는 일종의 만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충칭에서는 큰 물항아리를 주방 바닥에 묻어놓는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 근처로 가지 못하게 했다. 삼모는 말을 죽어라 듣지 않았다. 하루는 어른들이 식사를 하는데, 돌연 물을 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물항아리는 아주 깊었는데, 이 아이는 두 손을 바닥에 대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가 물보다 키가 약간 더 커서 발로 수면을 치는 소리를 냈던 것이다. 우리가 그녀를 끄집어 냈을 때, 울지도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입에서 물을 쏟아냈다.

 

그후로 자잘한 사고들이 계속 발생했지만, 스스로 해결했다. 한번은 자전거를 타다가 부주의하여 쓰지않는 우물에 빠졌다. 그때는 이미 대만으로 이사왔을 때였다. 그녀는 스스로 방법을 찾아서 기어올라왔다. 두 무릎은 까져서 뼈가 보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희!  살 속에 한층 기름이 원래 지방이구나. 보기 좋은데!"

 

삼모가 13살때,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옥진(玉珍)을 따라 병동(屛東) 동항(東港)으로 간 적이 있다. 어선을 타고 소유구(小琉球)까지 갔다. 이건 겁나지 않는데, 겁나는 일은 그녀가 동항에서 한 사관학교학생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16살이라고 속였다. 이렇게 그녀는 일생에서 첫 남자친구를 사귄 것이다! 그녀가 정말 16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여러 곳의 남자친구들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주 대범했다. 집안에 앉아서 폼을 잡고 있으면, 남자친구가 그녀를 찾아온다. 그녀는 모두 부모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나가지 않았다. 이 점은 부모로서 아주 자랑스러웠다. 딸이 인기있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니까. 나는 그녀를 제지한 적은 한번도 없다.

삼모와 부모

나의 딸이 문화대학 철학과의 학생이 되었을 때, 그녀는 열심히 연애하고, 죽어라 글을 읽고, 성실하게 가정교사를 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우계부재래(雨季不再來)>를 썼다. 우리 딸의 첫사랑인 그 좋은 청년은 부친으로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는 나의 딸을 격려해주었고, 부모가 줄 수 없는 딸의 남녀간의 일을 나의 딸은 그 남자친구를 통해서 사랑의 긍정적인 의미를 발휘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때의 그녀는 조용하지 않았다. 울고 웃고, 멍하니 있기도 했다. 사랑에 빠진 여자아이라면 오히려 정상이 아닌가. 그때 그녀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일이 결과가 있든 없든 신경쓰지 않는다. 과정이 결과이다. 최대한 하고, 모든 결과는 성장의 과정이다. 해보자." 그녀는 한번 실족한다고 하여 천고의 한으로 남기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실족인가? 그녀는 용기가 있었고, 나는 안심했다.

 

나의 둘째딸은 대학을 3학년 1학기까지만 하고 타향으로 떠난다. 그녀는 멀리 가겠다고 고집했다. 원인은 역시 그 남자친구이다. 삼모는 그와 죽어라 사랑했고, 두 사람은 모두 고통을 겪었다. 그녀가 포기한 이유는: 상대방에 끝까지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만일 대만에 남아 있으면, 스스로 참을 수가 없을 것같다. 떠나는게 좋겠다.

 

삼모가 집을 떠나는 날, 주머니에는 미화5달러짜리 현금, 700달러짜리 수표 한장이 있었다. 여러해 전이기는 하지만 실로 많지 않은 돈이었다. 나의 부친으로서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돈을 받고, 나와 모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에 오를 때, 그녀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웃으면서 가족들을 한번 쳐다봤다. 비행기에 오를 때 우리는 멀리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갔고,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이때 나는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마음은 허전했고, 삼모의 모친은 난간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딸은 몸을 돌려 손한번 흔들어 주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그때 나의 딸 내 눈에는 어린 딸은 마음이 다 부숴졌을 것이다. 

 

삼모는 스페인에서 3달간 벙어리, 귀머거리로 지낸다. 반년동안 보내온 편지에서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어라 언어를 배웠다.

 

반년후, 삼모는 마드리드대학에 입학한다. 서신에는 그녀의 첫사랑 남자친구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이를 보면 그들은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 것같았다.

 

1년후에 오는 편지는 달라졌다. 그녀는 말했다. 여학생기숙사에는 저녁에 스페인남학생들이 와서 창밖에서 노래를 부른다. 마지막 한 노래는 특히 그녀에게 불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옛 사랑을 잊은 것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무를 알았다. 신천지를 개척하고 친구를 사귄다. 학업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중세신학자 세인트 토마스의 저작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을 뿐이다. 그녀의 당시 스페인어실력으로 그런 허풍을 떨다니. 누구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그녀다 보내오는 편지의 내용은 우리와는 요원한 것이었다. 그녀가 "현대시" "예술사" "스페인문학" "인문지리"를 공부한다고 했다. 내 생각에 그녀는 확실히 공부하는 것같은데, 그러나 글자 중간중간에 커피숍에 앉아 있는다든지, 춤을 춘다든지, 히치하이킹을 해서 여행을 했다든지, 오페라를 들었다든지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부모에 미안하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기실 나는 그녀가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을 보고는 내심 기뻤다. 다음 해 삼모는 파리, 뮌헨, 로마, 암스테르담을 간다. 그녀는 집에 여비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간단해. 흰빵을 먹고, 수돗물 마시면 충분해." 우리는 그녀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모는 우리에게 미안해 했고, 담배끊으면 죽을 것같다고 했다. 우리는 죽지 말라고 하고, 그녀는 계속 피운다.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단지 많이 건너뛰었을 뿐이다.

 

삼모의 결혼을 돌연 우리에게 통지했다. 받았을 때는 이미 결혼한 뒤였다.우리 일가족은 그저 대만에서 외식을 한끼 하면서 북아프리카에 있는 그녀의 결혼을 축복했다. 이때 나는 딸의 편지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녀는 냉정하고 즐거웠다. 물질적으로는 아무런 원망이  없었다. 정신적으로는 활발하면서 침잠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녀가 사전에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 둘째는 스타일이 독특해서, 일반적인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름조차도 자기가 마음대로 짓는데 우리가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중 5년반동안은 딸이 귀국하지 않았다. 이유는 "비행기표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그녀가 마침대 돌아왔다. 첫날 새벽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모친에게 자신도 못느끼는 사이에 스페인어로 말했다: "지금 몇시야?" 그녀는 세번이나 얘기했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제서야 손으로 이빨 닦는 시늉을 했다. 이빨을 다 닦은 후에 중국어로 말한다: "좋다. 머리가 돌아왔다. 이제 중국어로 말할 수 있다" 딸에게 이빨닦는 게 아주 중요했나보다. 이빨을 다 닦고나더니 유려한 중국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한번은 바퀴벌레 한 마리가 주방에 보였다.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걸어'간다!" 우리가 말했다. 그때는 '기어'간다고 하는 거라고.

 

삼모가 나중에 어떻게 중국어로 글을 써서 투고했는지는 하늘만 알 것이다. 그녀의 오자는 각 신문사에서 모두 유명해졌다.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집담당자들에게 "오자 하나를 고칠 때마다 1NT달러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스페인어도 잘하지는 않았지만, 얘기를 하면 사람들을 웃기고 울릴 수 있었다.

 

삼모의 일생에서 가장 특이한 점이라면, 금전에 대한 태도이다. 그녀는 힘들게 살기도 하고, 가난하게 살기도 했다. 그래도 숫자개념이 없었다. 돈을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 힘든 때에는 그녀가 정말 간장에 밥을 비벼먹었고, 돈이 있으면 그녀는 죽어라 책을 사모으고, 여행을 했다. 그녀는 멍청하다고 할 수도 있고, 멍청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같다. 그녀의 주머니에는 잊고 있는 돈들이 들어 있었다. 우연히 입었다가 돈을 만지게 되면, 급히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말했다. 다행히 책보는 걸 좋아해서 인생이 재미없지는 않다고. 그녀가 가장 아까워하는 것은 먹는 것이었다. 먹는 것을 낭비라고 했다. 누군가 그녀를 좋은 식당에 초청해서 식사를 사면, 돌아와서 항상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 분이 나에게 식사를 사지 않고, 그 돈을 주었다면 나는 더 감사했을텐데. 아쉽다."

 

딸이 글을 쓸 때면 아주 집중했다. 매번 고도로 집중해서 쓸 때면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된다. 잠도 자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가족도 몰라본다. 아무 것도 몰라본다. 다만 반드시 물을 많이 마신다.이 일을 그녀도 알고 있다. 한번은 바닥에 앉아서 등받이도 없는 방석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칠일밤낮을 눕지 않았고, 다 쓰고 나서는 쓰러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보내줘"라고 말하면서. 그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면서, 헤헤 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모친에게 묻는다: "오늘이 며칠이예요?" 다른 사람들은 별 것아니라고 생각하는 글을 그녀는 생명을 걸고 썼다. 그저 '재미'때문에.

 

책이 나오면 그녀는 다시 쳐다보지 않는다. 그녀는 또 말한다: "과정이 바로 결과이다" 그녀의 서가에 귀국후 1년반만에 이미 2천권이 넘어섰는데, 서가에 그녀의 자신의 작품은 한권도 없었다. 

 

삼모의 책은 우리 집안사람들도 보지 않는다. 절대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책은 우리 집안의 '외교'에는 유효했다. 삼모의 큰동생은 사업을 하는데, 매번 새 책이 나올 때마다, 큰동생은 여러 권을 사서(그는 누나의 책은 보지 않는다. 고룡의 무협지를 읽는다), 사업상의 선물로 쓴다. 여기로 한권 보내고 ,저기로 한권 보내고. 작은동생의 딸은 어려서부터 책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녀도 고모의 책은 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고모의 책은 선물로 선생님에게 드리기는 좋다는 것을. 우리 집안의 큰딸은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외에 의상점도 하나 열었다. 당연히 여동생의 책은 '옷을 사면 끼워주는 선물'이 되었다. 삼모의 엄마는 더욱 통이 컸다. 매번 딸의 새책이 나오면, 엄마는 만나는 사람마다 선물했다. 마치 안팔리는 겨울의 우유처럼, 억지로 상대방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집안에서 삼모의 책은 별다른 지위가 없다. 삼모는 다른 사람의 책을 아주 중시했다. 매번 좋은 책을 읽고나면, 다음 날 화제는 그게 얼마나 좋고, 얼마나 뛰어난지를 얘기하면서 가족들에게 같이 보자고 한다. 우리 집안 사람들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가족들에 대한 열정을 우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하루종일 그 책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같지만, 기실 그렇지 않다.

 

나의 외손녀는 아주 근검절약하는 타입이지만 장효풍(張曉風), 석모용(席慕蓉)의 책은 반드시 사가지고 온다. 한번은 삼모의 새 책이 나왔는데, 외손녀에게 읽고 감상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그 아이는 고모를 보면서 "너?"라고 말해서, 삼모가 좌절한다. 또 다른 손녀도 재미있다. 전날 저녁에서야 비로소 삼모 고모의 국적이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이번에 삼모도 크게 놀라서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 삼모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중시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딸이 귀국하여 정착한지 16개월이 되었다. 그녀의 중국어도 발전이 있을 뿐아니라, 민남화(대만말)도 유창해졌다. 어떤 때는 객가 친구들을 방문하고 이틀후에야 타이페이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녀의 생활이 점점 '통속'적이 되고, 삼교구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전체 대만섬에 있는 사람들을 다 만났다. 그녀가 다닌 길은 평생 대만섬에 산 사람들보다도 많았다. 그녀는 일가족의 가이드가 되어 대만 곳곳을 놀러갔다. 무슨 구불구불한 산업도로, 깊은 산 속에서도 그녀는 투숙할 곳을 찾았다. 다음에 다시 갔을 때는 산동네사람이 그녀를 아예 양딸로 삼았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도 그녀는 주머니가 텅 비어 있으면서도 시미유염(柴米油鹽)을 잘 구해왔다. 한참 지난 후에 돈을 가져다 주면 상인은 웃으면서 말한다: "급할 것없는데..." 딸은 그들과 함께 어울려 화목하게 지냈다. 우리 아파트의 관리인은 그녀가 들어오면 먹을 것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어떤가? 한밤중에 밤참을 만들어 접시에 담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관리인을 찾아서 "빨리 드세요. 뜨거워요. 창문은 닫고." 그녀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딸은 비록 타이페이시에서 생활했지만, 사는 것은 시골스러웠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건 공허하다고 하면서 야시장에 서서 빙수를 먹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에는 손가락을 펴서 나와 그녀모친에게 보여주었다. 손가락에 낀 것은 금빛찬란한 네모난 반지로 위에는 '복(福)'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그녀모친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촌스럽다는 생각은 안드니?" 그녀는 말한다: "헤. 그건 두 분이 몰라서 그런 거예요."

 

나는 생각한다. 삼모는 평생 활발한 마음을 견지한 사람이라고. 그녀의 낙엽귀근은 편협한 민족의식이 아니다. 그녀는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은 너무 신비하고 너무 풍부하다.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곳에 사는 걸 좋아할 것이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이 민족을 좋아한다. 이건 그녀의 출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삼소저'(그녀는 사람들이 그녀를 이렇게 부르는 것을 제일 듣기 좋아한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중국의 생활예술에 융화해 들어간다. 나는 마음 속으로 복잡하지만 기쁨을 느낀다. 딸은 이 사회의 모든 괴이한 현상을 맛보고, 화를 내지 않을 뿐아니라, 마치 계토동롱(鷄兎同籠)의 재미를 즐기는 것같다. 그녀는 타이페이에서 차를 운전하는데 매번 집으로 돌아오면 이렇게 소리친다: "재미있어. 재미있어. 전체 타이페이가 방대한 장난감같다. 이리저리 숨으면서, 훈련반응하고, 인성을 증가시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대우(羅大佑)의 <초급시민(超級市民)>이라는 노래이다. 그녀가 부르면 모두 감동한다. 타이페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멋진 대도시이다. 누군가 일단 타이페이시의 사람들이 냉담하다는 말을 하면, 삼모는 바로 한마디 한다: "어디가? 네가 먼저 웃지 않고서, 남을 뭐라고 해?"

 

나의 딸을 지금 조금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아주 좋다. 모두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삼모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천주교의 중국화에 아주 찬동한다. 성모마리아의 앞에 향로를 놓아둔 것을 보고는 좋아했을 뿐아니라, "종이돈을 불살라서 그녀에게 사랑을 표시해야지."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에 대하여도 그녀는 완전히 인정했다. 단지 젊은 세대가 중국고전문학을 읽지 않는 점에 대하여 그녀는 우려가 있었다. 중국문학을 선양하는데 대하여 그녀는 굳건한 의지가 있었다: "타이페이성당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런 정신"

 

여기까지 말하고 있는데, 나의 딸은 원고지 옆에 닝보의 토속음식 "창해(搶蟹)"를 놔두고 있다. 청해(靑蟹)에 술과 소금을 넣어서 만든 것으로 날것으로 먹는다. 그녀는 닝보사람들도 입에 넣지 않을 음식을 한 조각 입에 넣고는 몇 마디 내 말을 적고 있다.

 

나는 갈수록 중국화되어가는 딸을 보면서, 그녀가 일찌기 이 땅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라졌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현재의 그녀는 아주 편안해 보인다. 마치 평생 우리의 이 좁은 아파트에서 생활했던 것처럼.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의 적응력은 아주 좋구나. 정말 탄복할 만하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를 흘겨보며 천천히 말했다: "나는 더 강해질 수도 있어. 내년에는 직업을 바꾸어서 회계를 해볼테니까. 분명 완전히 새로운 세상일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