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乾隆帝)의 형제들

중은우시 2020. 11. 27. 14:23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건륭제는 중국고대의 유명한 제왕이고, 강건성세를 만든 황제이다. 그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생산을 발전시키며, 인구를 늘였고, 동란을 평정하며 국가의 주권과 이익을 보호했다. 선조들의 기초 위에서 민족의 조화로운 발전을 더욱 공고히 했다.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괜찮은 몊이다. 그렇다면, 건륭제가 즉위한 후,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건륭제의 여러 형제들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그의 부친부터 얘기하기로 하자.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건륭제의 부친은 옹정제이다. 그는 비록 13년간 재위했지만, 완벽하게 강희와 건륭의 사이를 이어주었다. 그는 청나라에서 가장 업적이 많은 황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그가 황위를 부정한 수단으로 얻었다고 말하여, 생애에 오점을 남겼다. 그를 얘기하려면 부득이 저명한 '구자탈적(九子奪嫡)'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강희제는 아들이 많았지만, 늦게까지도 후계자가 확정되지 못했다. 그의 아홉명의 아들은 모두 황위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비록 최종적으로 황사자인 윤진(胤禛)이 황제로 등극하지만, 일찌기 그와 후계다툼을 벌였던 형제들은 모두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이게, 혹은 암중으로 그에 비협조한다. 권력투쟁의 승리자로서, 옹정제는 자연히 부인지인(婦人之仁)은 없다. 옹정4년(1726), 그는 가장 큰 적수였던 황팔자 윤사(胤禩)를 "아치나(阿其那)"로 개명시킨다. 그 뜻은 짐승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윤사를 지지했던 형제들도 모두 감금된다. 이들 동년배들 외에 또 한명의 황자가 처벌을 받았다.

 

그 황자의 이름은 애신각라 홍시(弘時)이다. 강희43년(1704)에 태어났으며, 옹정제의 황삼자(皇三子)이다. 서열이 황사자(皇四子) 홍력(弘曆) 즉 건륭제의 셋째형이다. <청사고>에 따르면, 홍시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그저, "홍시는 옹정5년 방종불근(放縱不謹, 방종하고 근신하지 않음)으로 종적(宗籍)을 삭탈당하고, 작위를 받지 못했다." 이 '방종불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사람이 방종한다는 이유만으로 종적을 박탈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관방사서외의 다른 자료도 참고해볼 수 있다. 옹정4년(1726), 황제가 내린 성지에 일찌기 "홍시는 사람됨이 궁정에 절대 남겨놓을 수 없다. 그를 윤사의 아들로 삼는다. 윤사는 죄를 지어 황대(黃帶, 황족임을 나타내는 허리띠)를 찰 수 없고, 옥첩(玉牒, 황실의 족보)에서도 이름을 없앴다. 홍시가 어찌 황대를 찰 수 있겠는가. 그가 차고 있는 홍대를 풀고, 윤도(允祹)에게 넘겨라. 윤도는 그를 길러주고 제약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홍시가 궁정에서 쫓겨나서, 윤사에게 넘겨주어, 윤사의 아들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옹정제는 윤사와의 사이가 가장 나빴다. 홍시가 그에 연루되어 죄를 입었고, 그의 양자로 간다. 이는 명확한 신호이다. 즉 홍시가 윤사와 일당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하여 일설에는 윤사가 옛날의 팔기귀족이 공동으로 회의를 하여 국가대사를 논의하는 조제(祖制)를 회복시키고자 했다고 한다. 이 조제가 실행될 때는 친왕귀족들이 모두 국가중대사에 참여할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온 후에 이 제도는 점점 약화된다.

 

당시 후계자가 되는데 실패했던 윤사는 이런 방법으로 옹정제의 권위를 약화시키고자 했다. 다른 친왕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조제를 회복하자고 창의하려 했다. 이 사건에서, 홍시는 아마도 부친의 반대편에 섰던 것같다. 그래서 연루되어 처벌을 받고, 부친의 분노하에 윤사의 아들로 가게 된다. 비록 사실의 진상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홍시는 숙부 윤사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확실하다.

 

윤사에게 양자로 간 다음 해, 홍시는 종적을 박탈당한다. 이는 옹정제가 일찌감치 그를 외인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얼마후 홍시는 우울증 속에서 병사한다.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그는 옹정제에 의해 사사되었다고도 한다. 결국, 건륭제가 즉위한 후, 그는 신분을 회복한다. 원래 홍시는 나이도 건륭제 홍력보다 많고, 측푸진(側福晋) 소생이어서, 이치대로라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다만 결국 그는 줄을 잘못 서서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건륭제의 다른 형제들을 보기로 하자. 건륭제의 큰형인 홍휘(弘暉)는 8살때 병으로 죽는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그를 단친왕(端親王)에 추봉(追封)한다. 둘째형인 홍윤(弘昀)은 조금 더 오래 살았다. 그래도 10살때 요절한다. 그 뒤로 또 다른 황자 홍반(弘盼)이 있다. 그러나 그는 두살때 죽었으므로 형제서열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건륭제의 셋째형은 바로 위에 언급한 홍시이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종적에 복귀된다. 그러나 추봉은 해주지 않았다.

 

건륭제의 다섯째동생은 홍주(弘晝)이다. 옹정제때, 그는 묘강(苗疆)사무를 처리한 바 있고, 약간의 공을 세웠다. 다만 옹정이 죽은 후, 그는 '의절참망(儀節僭妄)'한다. 일설에는 그가 건륭의 우대와 종용을 받아 욕심이 팽창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일설에는 그가 일부러 잘못을 범해서, 건륭제가 그를 경계하지 않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명철보신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건륭제의 여섯째동생은 홍첨(弘瞻)은 건륭이 즉위할 때 겨우 4살이었다. 그가 7살이 되었을 때, 두 아들이 요절하여 후사가 없던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에게 양자로 가서, 그의 작위를 이어받는다. 사후에 홍첨은 시호 '공(恭)'을 받아, 다라과공군왕(多羅果恭郡王)이 된다. 그외에 건륭제에게는 복의(福宜), 복혜(福惠), 복패(福沛)의 세 동생도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여 서열에 오르지는 못한다. 그래서 여기에 별도로 언급하지는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