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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乾隆帝): 전형적인 중국식 지도자

by 중은우시 2022. 2. 23.

글: 인신공분(人神共奮)

 

1. 당신과 '지도자의 사고방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양주(揚州)에는 "사가법기념관(史可法記念館)"이 있다. 해방전에는 "사공사(史公祠)"라고 불렸다. 그 안에는 항청명장(抗淸名將) 사가법의 의관총(衣冠塚, 시신이 묻힌 것이 아니라 옷과 갓을 묻은 곳)이 있으며, 건륭제가 직접 지시하여 만든 것이다. 건륭제는 사가법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추서하고, 사가법의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고풍양절(高風亮節)을 찬양했다.

 

이 시호는 흥미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사가법은 항청민족영웅이다. 1645년, 청나라군대가 양주성으로 쳐들어오자, 회양독사(淮揚督師)인 사가법은 청나라에 투항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성이 함락된 후 자결한다. 청군은 양주에서 중원으로 쳐내려온 후에 가장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는 점으로 인하여 보복을 실시한다. 십일간이나 살인, 방화, 약탈을 벌인다. 역사에서 "양주십일(揚州十日)"이라 불리는 불행한 사건이다.

 

사가법은 청나라초기이래 민족영웅의 이미지로 반청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자연히 청나라조정측의 입장에서는 '언급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100여년이 지난 후, 건륭제는 직접 그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 되었을까? 

 

당연히, 입장을 바꾼 이유는 기실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청나라의 통치가 이미 안정되었고, 만주족과 한족의 갈등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등등이다. 그러나 이 일을 건륭제가 한 것은 아주 재미있다. 왜냐하면 그는 청나라황제들 중에서 '문자옥(文字獄)'을 일으키기 가장 좋아했던 황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와 방법은 일맥상통한다. 예를 들어, 건륭제는 우리가 '중국식 지도자'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식 지도자에게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특징이 건륭제에게 집중되어 있다. 우수한 지도자이건 엉망인 지도자이건. 체제내이건 체제외이건. 

 

잠시 '사공사'에 대해서는 놔두고, 건륭22년(1757년)의 '직보'로 인해 발생한 대사건을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이 사건은 아주 복잡하다. 부정부패, 만한갈등, 행정체계, 문자옥, 파벌투쟁등등의 문제가 모두 얽혀 있다. 본문초입에서 '지도자의 사고방식'을 얘기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만일 당신이 건륭제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해보자.

 

2. '직보'로 인해 발생한 대사건

 

이 해에 막 준가르의 반란을 평정한 건륭제는 기분이 좋아져서 두번째로 '강남'으로 내려간다. 누가 알았으랴 서주(徐州)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흥을 깨는 일이 벌어진다.

 

건륭제를 맞이한 관리중에는 이미 은퇴한 전 포정사이자 하남 하읍(夏邑) 관적의 관리 팽가병(彭家屛)이 황제에게 하남순무(河南巡撫) 도륵병아(圖勒炳阿)에 대한 보고를 올린다. 그가 하남 4개현의 심각한 수재를 감추어, 백성들이 조정의 재해구호조치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도륵병아는 당연히 극력 부인했다. 현지에 자그마한 홍수가 발생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 읽어보고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다. 만일 당신이 건륭제라면, 이 일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처리했을까?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의 생각은 이러할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말이 다르면, 제3자로 하여금 조사팀을 꾸려서 조사하게 하자.

 

그렇게 대답했다면 당신은 황제가 될 기본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 건륭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이것은 '정치적 공격'사건이라고 본 것이다. 그 배후에는 더욱 큰 음모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여기에 건륭제는 팽가병에 대하여 선입견이 있었다. 그는 건륮에가 아주 싫어하는 옹정제때의 중신(重臣)인 이위(李衛)의 일당이다. 바로 이런 관계로 인하여, 건륭제가 등국한 후, 팽가병은 계속하여 현재의 부성장급 직위를 돌다가 결국 은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전황제시절의 옛일까지 건륭제는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처리결과는 이러했다. 도륵병아와 팽가병으로 하여금 '조사후 사실대로 보고할 것'을 명한다. 실제로는 인사갈등을 덮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건륭제는 황제로서의 책임감이 약간은 있었다. 비록 조사팀을 따로 보내지는 않았지만, 암중으로 자신의 심복인 '보군통령아문'의 원외랑 관음보(觀音保)를 보내어 살펴보게 한다.

 

몇달 후, 관음보가 돌아와서, 건륭제에게 오는 길에 사온 두 어린아이를 보여준다. 아이 하나를 사면 아이 하나를 딸려보내주었고, 가격은 겨우 5백문이었다. 하남 4현에 확실히 심각한 수재가 발생했던 것이고, 도륵병아가 허위보고를 한 것이다.

 

사실은 드러났다. 확실히 '은퇴한 관리'가 백성들을 위하여 황제에게 직접 보고를 한 것이다. 통상대로라면 당연히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조사하게 될 것이다.

 

관음보는 역시 건륭제 신변에서 일하는 인물이니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보고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2명의 어린아이를 사와서 증거로 내민 것이다. 자신은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사건은 과연 이후 파란을 일으킨다. 몇달이 흐른 후, 건륭제가 강남을 실컷 돌아다니고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서주에 들른다. 그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하남관리들이 재해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에 대한 전문용어가 있다. "조민틈어도고혼(刁民闖御道叩閽)". 언뜻 듣기에도 폄의사(貶義詞)라고 할 수 있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유원덕(劉元德)이라는 백성이 '고혼'을 했고, 현지관리들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니 교체해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에서 잠시 멈추고, 독자 여러분들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 두 건의 사건이 발생했다면, 팽가병은 오로지 공적인 마음으로 이번 일을 벌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지도자가 되기에 아직 수련이 많이 필요하다.

 

백성들이 황제의 어가를 막자, 오히려 건륭제는 확신한다: 당연히 보고는 사실이다. 다만 이는 여전히 보고를 명목으로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사건이다. 이 두 사람은 분명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보라. 다음 번에 당신이 지도자에게 무슨 보고를 한다면, 증거가 많으니 이는 확실한 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분명 지도자는 네가 무슨 딴 생각을 품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약간의 흔적을 남겨서 지도자가 스스로 발견하게 해야 한다. 특히 건륭제같이 "극도의 자신감, 극도의 의심증'을 지닌 지도자인 경우에는.

 

이렇게 보면, 건륭제가 이 사건을 처리하는 핵심은 바로 "막후에서 이 사건을 일으킨 자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어가를 막은 유원덕을 심문하게 한다. 과연 배후에서 지시한 인물이 나왔다. 그런데 그는 팽가병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황제가 맡긴 임무를 완성하지 못한 셈이 된다. 사건처리담당자는 자연히 황상이 생각하는 '막후인물'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계속 심문한다.

 

며칠이 지나서, 새로운 진술이 나온다. 유원덕은 이렇게 진술한다: 팽가병이 황상이 온 것을 보고 고향마을에서 자신은 '백성들을 위하여 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유원덕은 그 말을 듣고서 비로소 '고혼'할 것을 생각했다. 이어진 내용이 핵심이다. 자신은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할 말을 팽가병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제 확실하지 않은가? 만일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역시 아직도 황제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건륭제는 한눈에 조사결과는 윗사람의 의도에 맞추기 위해서 짜맞춘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래서 그는 "재조사"를 지시한다.

 

왜 건륭제는 이 사건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까? 한번 정리를 해보면서, 건륭제의 생각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3. 건륭제는 '어가를 막고 억울함을 호소한' 백성을 어떻게 대했을까

 

건륭제의 생각은 사건처리에서 단서를 엿볼 수 있다. 관음보의 보고를 들은 후, 건륭제는 이런 성지를 내린 바 있다: "....이 현의 건륭11년부터 20년까지 미납된 3천오백여냥의 세금을 은혜를 베풀어 면제한다." 유의할 것은 재해구조가 아니고, 관리에대한 조사도 아니고, '짐이 은혜를 베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주현의 관리는 백성의 부모이다. 그런데 자식인 백성이 부모인 관리를 공격하는데, 짐이 어찌 일방적인 한편의 말만 들을 수 있겠는가." 결국 건륭제의 뜻은 내가 강남에 온 것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기 위함인데, 이들 '고혼자'들은 그 기회를 틈타 부모인 관리들을 공격하니, 이는 아주 나쁜 짓이다.

 

건륭제의 처리의견은 '중국식 지도자'의 보편적인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바닥층의 상황을 알고 싶어하지만, 또한 '바닥층의 상황을 보고받았을 때" 사건이 자신의 통제범위를 벗아나게 되지 않을가 겁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말로는 민의를 듣겠다, 바닥층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걸핏하면 어가를 막는 '조민'이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보'하는 부하들을 싫어하는 것이다.   

 

황제는 그저 정보만 알고 싶다. 그래서 그런 채널을 좋아한다. 하나는 관음보 같은 심복을 시켜서 알아보게 하는 것이고, 둘은 암중으로 조사해서 알아낸 정보이고, 셋째는 지방관리중에서 소수의 심복들이 직접 밀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민'이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직보를 하는 신하'가 가져온 정보는 왕왕 '사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는 왕조의 근본질서를 어지럽히게 된다는 것이다.

 

건륭제의 성지에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백성들은 자신의 분수를 지켜 현지 지방관리의 지시를 잘 따르라. 만일 지방관리가 무능하면? 그것은 당연히 '상사가 알아서 조사해서 처리할 것이고, 중하게 조치할 것이다" 

 

건륭제와 같은 류의 지도자들이 직장에 오면 그것은 바로 전형적인 '중국식 지도자'이다. 그의 의식 속에서, 부하들이 범하는 잘못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술적인 잘못이다. 예를 들어 실적이 미달한다든지, 제품품질이 부적격이라든지, 관리비용을 낭비한다든지. 다만 그 해악정도는 그가 보기에 통제가능한 것이고, 단지 개별사건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다른 하나는 조직적인 잘못이다. 부하들간의 결당영사(結黨營私, 소집단을 만들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한다), 상호뒷발잡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런 시스템적인 리스크야말로 자신의 대국적인 통제권을 잃게 만들 수 있다. 그런 행위가 여하한 규칙에 어긋나지도 않고, 심지어 많은 직원들로부터 환영받는 것이라 하더라도.

 

유원덕이 어가를 막고 '고혼'한 때로부터 이 사건의 중점은 이미 "조민(刁民, 나쁜 백성)을 엄히 방비하는 것", "통치질서유지"가 중점으로 된다. 그래서, 사건처리관리는 윗사람의 뜻을 받들어 '고혼을 지시한 죄'가 팽가병에게 있다고 심문결과를 보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지도자의 뜻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뜻은 이러하다. 네가 내 생각을 살펴서 처리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직접 얘기해서는 안된다. 건륭제는 '고혼을 지시했다'는 죄명을 팽가병에게 씌우면, 오히려 팽가병을 충신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사건의 재조사를 지시한다.

 

얼마 후, 팽가병의 보고로 관직을 잃었던 도륵병아가 다시 기용된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팽가병사건을 처리하게 한다. 그러면서 건륭제는 특별히 지시한다. 사적인 원한을 공적인 권한을 이용해서 갚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4. 건륭제가 진정으로 원한 죄명은?

 

옥중의 팽가명은 사건을 계속 끌면서 종결시키지 않으려는 것을 보고, 그리고 자신의 보고로 관직을 잃었던 도륵병아가 다시 자신에 대한 심리를 맡게 된 것을 보고, 황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되느니 아예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팽가병은 '자인'한다. 자신이 사적으로 '명말야사(明末野史)'를 소장하고 있다고. 사건담당관리는 즉시 압수하러 간다. 그러나, 팽가병의 아들은 일찌감치 모든 서적을 불태워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왕 왔으면 그냥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도륵병아는 '조건에 맞지 않으면, 조건을 만들어내면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집안에서 팽씨족보 1권을 찾아내고, 이를 '광망패역(狂妄敗逆)"의 증거로 삼는다.

 

족보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이 <대팽통기(大彭統記)>라는 족보는 팽씨성의 조상을 황제(黃帝)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건륭제는 그가 신하로서 스스로 제왕의 후예라고 주장하다니, "이는 황상을 눈에 두지 않는 것이고, 사람으로서 용납받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판단한다.

 

이것이야말로 건륭제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다. 문자옥. 이단사상에 대한 처벌과 관리를 숙청하는 것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건륭제때 문자옥의 수량이 아주 많아서 전체 청나라의 75%를 차지한다. 매번 문자옥이 있을 때마다 배후에는 모두 '팽가병사건'과 유사한 억울한 사정이 있다.

죽여라! 건륭은 가을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팽가병에게 자진을 명한다. 다만 그의 아들은 '부친을 위하여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한다. 

 

5. 지도자가 진정으로 신임하는 사람은?

 

다시 이슈를 직장으로 되돌려 보자. 그리고 지도자의 속마음을 알아보자.

 

모든 지도자들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조직발전의 목표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그 자리에 안정적으로 앉아있어야 한다는 목표이다. 그들이 보기에, 개인의 목표가 실현되어야 조직의 목표도 실현될 수 있다.

 

국유기업의 경영자이건, 민영기업의 오너이건, 아니면 고위지에 앉아 있는 직업경영자이건, 많건 적건 모두 이런 심리상태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일처리에서 모순적인 모습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 지도자들은 반드시 제도와 조직구조를 통하여 조직의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직질서를 해치는 여하한 방식은 그것이 숭고한 명목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들이 경계하게 된다. 대다수의 부하들이 잘못한 것은 모두 개별사건으로 처리한다. 이를 통해 전체 경영진에게 영향이 미치는 것을 막으려 한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지도자들은 대부분 부하를 진정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사적인 욕심이 있고, 부하의 비통상적인 행동을 보이면 그들은 부하의 진정한 의도를 추적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신뢰의 기초는 없지만, 지도자들은 부하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은 권한을 나누어 서로 다른 부하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서로 견제하게 만든다. 그 댓가는 바로 조직의 효율저하를 감수하게 된다.

 

그러나 권력분할과 견제와 균형은 또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파벌투쟁. 결국 지도자는 부하를 믿지 못하게 된다.

 

기실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인물이다.

 

건륭은 일생동안 무수한 '문자옥'을 일으켰고, 무수한 충신들이 반역을 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썼다. 그런데, '반청복명'을 한 것이 분명한 사가법에게는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것은 죽은 사람만이 안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