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거정)

장거정(張居正)의 사인(死因)은?

by 중은우시 2018. 1. 14.

글: 정만군(程萬軍)





1582년 7월 9일, 대명의 수보(首輔)이자 일대정치강자인 장거정이 돌연 세상을 떠난다. 나이 겨우 58세이다. 58은 고대인들의 수명으로 보더라도 그렇게 많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장거정은 왜 돌연 사망하게 되었을까?


장거정의 죽음에 관하여, 정사의 기재는 아주 간단하다. <신종본기>에는 그저 "졸(卒)"이라는 한 글자만 적었다.


<장거정전>에는 "아하. 거정이 병든다. 황제는 여러번 칙유를 내려 병세를 물었다. 금과 비단을 많이 내놓아 의약비로 썼다. 사개월이 되도독 낫지를 않았고, 백관은 재초(齋醮)로 기도했다." 무슨 병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사에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3가지 주장이다. 첫번째 주장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적로성질(積勞成疾), 국궁진췌(鞠躬盡瘁췌)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장거정은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 앉아 있었고, 치질이 발작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치질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오랫동안 앉아있고 운동이 결핍되면 생긴다. 그러나 이런 병은 통상적이다. 열명이면 아홉명은 치질이 있다는 말도 있다. 이것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러나 장거정이 얻은 병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장거정의 죽음은 바로 '치질수술'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일찌기 명의에게 부탁하여 치질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이 끝난 후에 더시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야사에는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장거정이 상소를 올려 자신의 병세를 얘기했다는 것이다. "신은 숙환(宿患)은 비록 제거했으나, 혈기가 크게 손상을 입어 수일이래로 비장과 위장이 허약하고, 음식을 먹지 못해 사지가 무력하고 한걸음도 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치질이 치명적인 병은 아니지만, 수술을 하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 당시의 의학수준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를 가지고 이렇게 의심하기도 한다. 장거정이 든 병은 치질이 아니라 직장암이라고. 당연히 이런 것은 모두 추측이고, 어쨌든 고질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둘째, 종욕과도(縱慾過度)로 죽었다는 것이다.


명나라 필기소설은 모두 유사한 얘기를 한다. 역사에서는 장거정이 "탈정(奪情, 삼년상을 치르지 않은 것)이후로 더욱 마음대로 했다(益偏恣)"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장거정에게는 희첩(姬妾)이 사십여명이 있었다고. 그래서 장거정은 춘약(春藥)을 많이 먹었고, 그중에는 명장 척계광(戚繼光)이 보내준 해군신(海狗腎)과 호희(胡姬), 즉 외국여자도 있었다. 왕세정(王世貞)은 <가정이래수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장거정)득지다어내이불급(得之多御內而不給), 즉일이방중약(則日餌房中藥), 발강양이조(發强陽而燥), 즉우음한제설지(則又飮寒劑泄之), 기하성치(其下成痔), 이비위불능진식(而脾胃不能進食)." (장거정은 처첩을 많이 거느렸는데 잘되지 않으면 매일 방중약을 먹었다. 양기가 강해져서 조급해지면 다시 음한제를 먹어 이를 내렸다. 그렇게 하다보니 치질이 생겼고, 비위에 문제가 생겨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장거정이 죽을 때, "피부가 건조해서 갈라져서(皮膚燥裂), 구운 생선같았다(如炙魚然)"고 한다. 즉 종욕과도로 사망한 증상이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비교적 많다. 명나라중엽, 조야상하는 확실히 종욕의 기풍이 있었고, 유행하였다. 몇대의 황제들도 모두 이로 인하여 죽었다. 홍환(紅丸)을 복용하고, 유녀(幼女)를 간음하는 것이 유행했다. 대황제(代皇帝)로서 이런 유행을 따라갔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위존자휘(爲尊者諱)"의 관점에서 장거정의 위대한 이미지를 유지보호하는 측면에서 많은 역사학자들은 장거정이 종욕과도로 죽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두번째 주장이다.


셋째 주장은 더욱 궤이하다. 그는 만력제(萬歷帝)가 죽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주로 장거정의 위대한 이미지를 과도하게 분식하는 소설가들이다. 그들의 소설 속에서,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다.


만력제는 장거정이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 속으로 기뻐한다. 그는 과거에 장거정을 존경하던 태도를 바꾸어 장거정의 집을 봉쇄하라고 명령하고, 아무도 들어가서 문병할 수 없도록 조치한다. 암암리에 태감 장경(張鯨)이 이렇게 한다. 장경의 교사로 태의는 고의로 장거정에게 약을 반대로 쓴다. 장거정의 병이 갈수록 심해지도록 만든다. 3일후 영원히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약을 거꾸로 쓰고, 장거정의 집을 봉쇄하고, 화가난 장거정이 피를 쏟고....등등 만력의 수단은 주원장이 호유용을 보내어 유백온을 죽인 상황과 비슷하다.


필자의 생각에 이것은 헛소리이다.


왜냐하면 장거정에 대하여, 만력제는 반발하고 반역하는 마음을 품었지만, 장거정이 살아있을 때는 모친 이태후가 적극 지지하는 태도에 변화가 없었다. 설사 만력제가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절대 그런 담량은 없었다. 명사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태후는 황제를 엄하게 훈계했다. 매번 심하게 질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선생이 들게 되면 어쩔거냐?" 만력제는 장거정을 매우 꺼려했다. 황제가 점점 자라면서 마음 속으로 싫어하게 된다." 이태후는 아들 만력제를 혼탤 때, 말을 듣지 않으면 장거정 선생에게 말하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만력제가 장거정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태감인 풍보, 수보인 장거정, 그리고 모친인 이태후는 만력제 초기10년의 기본국면을 구성한다. 이 철삼각의 견고한 일각인 장거정에 대하여 만력제가 조그만치도 불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번째 주장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필자는 장거정의 죽음원인에 대하여 앞의 두 가지 주장을 합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업무와 향락의 이중피로때문이다.


한 사람의 정,기.신은 유한하다. 업무와 여색이 과도하면 몸에 손상이 온다. 심각하게 되면 기관이 마르게 된다. 장거정은 이순의 나이로 정무에 바빠서 심신이 피로했다. 적당히 휴식을 취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장거정은 여전히 업무와 향락을 둘 다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한편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열심히 여색을 밝혔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항상 미인들을 좌우에 두었다. 국궁진췌, 교사음일(驕奢淫逸)은 장거정을 쓰러뜨린 원인이다.


만일 장거정 선생을 추도하는 글을 쓴다면, 필자는 이렇게 쓸 것이다: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선천하지낙이낙(先天下之樂而樂)


그렇다 그는 엄숭(嚴嵩)도 아니고, 범중엄(范仲淹)도 아니며 더더구나 뇌봉은 아니다.


중국의 사대부는 일반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한 가지 부류는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낙이낙(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으로 대공무사(大公無私)형이고, 둘째는 "후천하지우이우, 선천하지낙이낙(後天下之憂而憂, 先天下之樂而樂)"하는 개인안일(個人安逸)형이다.


그런데 장거정은 특수했다. 그는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했고, 마음은 국가에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에 대하여도 고행승처럼 처신하지는 않았다. 천하의 즐거움을 먼저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