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화운초(和運超)
대서군이 운남(雲南)으로 들어간 후, 남명군(南明軍)과 융합하는 것은 순조롭지 못했다. 원래의 민간농민군이 신분을 바꾸어 남명군이 되는 것에 대하여, 대서군내부에서는 여러가지 갈등이 발생한다. 특히 1인자인 손가망(孫可望)과 2인자인 이정국(李定國)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더욱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이정국으로 손가망을 대체하려고까지 한다. 이는 결국 대서군과 남명잔여세력이 서남대국에서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1. 손가망의 야심배후: 연합하지만 귀순하지 않는다.
손가망은 큰형이자 우두머리로서, 처음에는 검국공(黔國公) 목천파(沐天波)와 협력한 것은 기회를 보아 운남귀주를 점거하기 위함이고, 그후에 힘을 모아 다시 사천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순수한 공리적인 마음이었다. 대서군은 운남으로 들어간 후 목천파를 억누르고, 몇년후 남명 영력제(永曆帝) 주유랑(朱由榔)을 황제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유랑을 귀주 안룡부(安龍府, 지금의 귀주서남주 안룡현, 명나라때는 安隆縣인데, 주유랑의 행궁이 소재하여 안룡현으로 이름을 바꾼다)
대서군은 남명군과 융합하면서 신분이 바뀌고 이는 청나라를 대응하는 국면에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짧지만 사천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청군의 공세는 거셌다. 특히 서남방면의 하오거(豪格), 아오바이(鰲拜) 그리고 오삼계(吳三桂)라는 청군의 핵심장수들이 차례로 출격했다. 중요한 순간에 손가망, 이정국, 유문수(劉文秀) 삼형제간에는 갈등이 갈수록 심해진다.
손가망은 나이가 가장 많을 뿐아니라, 명망도 가장 높았다. 운남으로 남하하기로 결정한 후, 오랫동안 그가 국면을 주재한다. 전투는 이정국, 유문수가 책임졌다.(넷째인 애능기(艾能奇)는 운남으로 가는 도중에 매복을 당해 죽었다. 이는 대서군에는 안타까운 전환점이다) 그중 이정국은 용맹하고 지모도 있었으며 전적이 휘황했다. 손가망이 우두머리가 된 후, 그는 군사능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개척하는 주요역할을 맡았다.
대서군은 운남에서 남명 최후의 소조정을 떠받쳤다. 일처리나 명령은 모두 대서군의 우두머리인 손가망이 마음대로 했다. 특히 그 혼자서 두 갈래의 주력군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주 발호했다.
대서군은 농민군에서 명나라를 대표하는 관군으로 변신한다. 청군을 막는데 있어서, 각각의 역량을 결집하는 것이 당연히 유리했다. 그러나 농민군출신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은 대서군의 원래의 뜻에는 맞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과거에 연구자가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다수의 연구자들은 오늘날 남명조정을 동정하는 각도에서, 단지 최후의 실패를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실제 실패원인은 청군이 아주 강대하다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남명측의 남은 정성공(鄭成功), 장황언(張煌言)은 대서군과 협력하지 않겠다고 한다. 스스로 신분을 바꾼 대서군도 아주 헷갈렸다. 특히 손가망의 일처리와 행동은 완전히 바뀌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부의 여러가지 갈등과 부적응이 아주 두드러졌다.
형제관계의 변화는 한두마디 말로 다 할 수 없다. 다만 역대이래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난다는 말이 있다. 손가망은 너무나 명나라관리들을 억압했고, 이는 실제로 모든 힘을 하나로 모으는데 불리했다. 그래서, 이정국은 남명측을 단결시키는 것을 중시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점점 경쟁하고 대항하는 국면이 형성되게 된다.
즉, 대서군의 내부는 두 우두머리의 관념이 달라지면서, 금방 양대진영의 충돌로 이어진다. 최종적으로 대서군은 스스로 와해되는 국면에 처하게 된다. 청군과 싸우는데 그들은 원래 그렇게 형편없지 않았다. 최후의 실패는 '아주 빨랐다' 마치 손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손가망이 운남으로 들어간 후 사람이 완전히 변했기 때문일까? 그는 왜 이정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을까?
준의부(遵義府) 아래에 있을 때, 이정국, 유문수, 애능기 삼형제는 모두 손가망을 추대했다. 사료에 따르면, 손가망은 운남으로 들어가는데 다른 의견이 있었가. 심지어 남명을 도우는 것을 꺼린다는 생각도 나타냈다. 이 정보의 배후에는 손가망이 대서군의 신분이 혼동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측면이 있다. 관군이라는 이름을 얻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때 용재전(龍在田)으로부터 소식이 온다. 상대방으로부터 손쉽게 운남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이정국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에 유문수, 애능기와 대부분 장수들이 동의하였으므로, 손가망은 할 수 없이 협력에 동의한다. 다만 손가망은 다시 귀주에서 광서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주유랑은 양광(광동,광서)에 있었다. 만일 전투가 불리하면, 남해로 멀리 도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정국은 검국공 목천파를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목씨집안의 힘을 빌어 운남, 귀주, 사천 삼성을 차지하고, 그 후에 깃발을 내걸고 호남 광주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서히 도모하는 대계이다. 이정국은 항상 황제를 들먹였다. 이는 손가망이 함부로 날뛰는 것을 막으면서 감정에 호소하려는 것이다: "조경(肇慶)에 이미 군주가 있다. 영력은 그의 연호이다. 덕망과 힘이 부족하면서 함부로 스스로를 높이면 결국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의 자료는 이정국의 충성과 용맹을 드러내고 고의로 손가망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정국이 말하는 군주는 주유랑이다. 그렇다면 바로 광서로 내려가 주유랑을 도우는 것이 당연하니, 손가망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만일 손가망과 용재전이 일찌감치 곡성(谷城)에서 알았고, 또한 대국관과 전략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손가망은 확실히 운남 귀주를 탈취하기 위하여 남명과 연합하는데 동의한 것이다. 무슨 손가망이 광서로 가고, 안되는 도망친다는 것은 그저 소설일 뿐인 것이다. 이것이 둘이다.
그래서 고성(顧誠)같은 이는 여러번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청교체기의 사료는 애매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다. 대체로 이정국의 감동적인 말은 후세인들이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깊이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손가망의 변화는 사료에서 기록한 것과 같지는 않다.
애능기가 도중에 죽은 후, 풍쌍례(馮雙禮)가 손가망의 부하로서 애능기의 인마를 인수받는다. 그리고 이정국과 여러번 협력한다. 호남 완주로 출격하여 청나라장수 정일통, 지주 시궁계를 생포하고, 정주(지금의 정주묘족동족자치현, 호남 회화시에 속함)를 합공하고 결국 장사까지 수복한다. 동시에 유문수는 사천을 수복하여 경영하며 오삼계를 격퇴시키는데 효과를 보았다. 초기 대서군의 사업은 확실히 남방에서 점점 회복되는 모습이었다.
다만, 손가망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매번 행동마다 마찰을 일으켰다. 마치 뒷발을 잡는 것같은 혐의를 받는다.
예를 들어, 풍쌍례를 이정국의 부장으로 보낸 것은 손가망이 언제든지 이정국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함이라고 한다든지, 손가망이 곤명에 있으면서, 당초 연합을 권유한 양외지(楊畏知)를 교사하여, 주유랑에게 왕에 봉해달라고 요구하여, 자신이 지위를 이정국, 유문수보다 높게 하려 했다. 양외지는 암중으로 다른 두 사람의 앞에서 손가망이 다른 형제의 정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를 보면 오히려 양외지의 소인 면목을 엿볼 수 있다.
원래 대서군의 큰 일은 모두 삼형제가 논의해서 결정했다. 이것은 과거 농민군의 전통이다. 다만 손가망이 주유랑과 연락하여 처음 요구한 것이 왕에 봉해달라는 것이라니 이는 확실히 양외지의 모함이라 보는 것이 맞다.
손가망이 왕의 작위를 받고, 마음대로 운남을 '운흥성(雲興省)'이라 개명하고, 흥조통보 동전을 주조하고 눈에 이미 군왕과 예법은 무시하며 자기 마음대로 했다고 하는 것은 양외지가 손가망을 여전히 민간의 일개 초개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신분이 바뀌어 관군장수가 된 것 자체를 참월로 보고, 심지어 '죄'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농민군이라 하더라도, 손가망이 혼자서 다른 형제들보다 높은 '왕'의 작위를 받은 것에 대하여 손가망은 야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억누른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점점 둘째인 진왕(晋王) 이정국, 촉왕(蜀王) 유문수와의 갈등을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한다. 이건 정말 너무 악독한 수법이다.
주유랑은 광서에서 불안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진왕(秦王) 손가망음 몇 건의 대사가 순조롭게 통과되는 것을 보고 아예 주유랑을 남녕에서 안룡으로 모셔온다. 그리고 매년 '은팔천냥. 쌀 백석'을 제공하기로 약속한다. 명목상은 안치(安置)이지만 실제로는 "유금(幽禁)"이다.
양외지는 황제와 연락할 때 암중으로 통보한다. 군대내에서 오직 진왕 이정국만이 충성스러운 인물이니, 이정국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당시는 마침 상남, 광서에서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을 물리쳐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순치13년(영력10년, 1656년), 이정국은 손가망이 호광으로 대거 출동한 틈을 타서 안룡으로 가 주유랑을 모셔 곤명으로 돌아온다.
손가망은 풍쌍례, 백문선(白文選) 두 대장으로 하여금 정주에서 보경으로 출격하게 하여 자신의 위명을 떨칠 생각이었다.(그는 당시 이정국의 갈수록 높아지는 명망에 우려하고 있었다). 병력은 10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패배한다. 그러나 청군도 사상자가 많았다. 손가망은 귀주로 패주해서 돌아온다. 그후 그는 주유랑을 곤명으로 모셔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불쾌해 한다. 그리하여 반격하여 일거에 이정국을 병합하려 한다. 당시 이정국의 휘하에는 겨우 3,4만명이 있을 뿐이었다. 손가망은 비록 좌절당하긴 했지만, 인원이 그래도 배는 되었다.
이정국은 전투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적을 깊이 유인한다. 손가망은 운남에서 곡정부근으로 돌아온다. 이정국은 매복전에 능했다. 그는 미리 손가망이 매복에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봉인 백문선은 도중에 아군끼리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아, 이정국에 투항한다. 손가망은 다시 한번 실패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서군에 실망하여 장사로 간 후에 청군에 투항해 버린다.
청군은 내부정보를 얻은 후, 2년도 지나지 않아, 손가망의 잘못을 들추어낸다. 그리고 순치17년 기이하게 사망한다. 일설에는 살해당했다고 하고, 일설에는 사냥중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결국 일대호걸이 선종하지 못한 것이다.
명나라의 각도에서 보자면, 손가망은 확실히 군신간의 협력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대서군의 본질을 유지하려는데 있었다. 단지 그는 자리를 잡은 후,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야심이 팽창한 것이다. 그래서 옛대장 장헌충이 걸었던 길을 걸은 것이다. 진정한 만인지상이 되고자 했다. 이는 손가망이 명나라의 신하들과 계속 부딛쳤던 원인이다. 나중에 이정국, 유문수 두 형제와도 갈등이 생긴 근원이다.
만일 객관적으로 본다면, 손가망이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명나라의 서남사업을 십년이상 지탱시켜준 대들보이다. 손가망이 없이, 단순히 이정국, 유문수에만 의존했더라면,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몇 형제들은 각각의 장점이 있다. 이정국, 유문수는 군사재능에 치우쳐 있고, 진정 대국을 주재할 인물은 못되었다.
예를 들어, 영장제로 토지를 나눈 것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운남귀주의 여러 민족과 백성들의 생계를 회복시켜 주었다. 현지의 영장(營莊)은 원래 명나라때부터 내려온 황장, 왕장이다. 그렇다면 운남은 주로 검국공 목왕부의 땅이다. 목왕부는 운남에서 질이 좋은 땅 40%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비교적 좋은 중등토지는 토사(土司)와 사묘(寺廟)가 나누어 가지고 있었는데 개략 30%이다. 운남, 귀주는 지형이 고원산지가 대부분이어서 각족의 백성들은 겨우 나머지 기껏해야 30%인 열등토지만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의 생계처지가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손가망은 농민군의 본색을 잊지 않았다. 그는 대담하게 전통을 바꾼다. 관4민6의 기준에 따라 목왕부와 토사등의 수중에서 토지를 빼앗아 재분배한다. 일부 토사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지만, 적대적인 토사나 목왕부로부터는 강제로 빼앗았다. 이는 대서군이 사천에서 부호를 대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운남 귀주지역은 부족이 많고, 등급이 삼엄하다. 대서군이 국면을 타파하자, 여러 백성들이 토지를 갖게 된다. 군대는 이로 인하여 자체 토지를 경작하며, 기본적으로 백성을 괴롭히지 않게 된다.
그래서, 대서군은 운남귀주에서 사천과 상황이 달라졌다. 각족 백성들에게 환영을 많이 받게 된다. 많은 백성들이 자원하여 가입했다. 적지 않은 토사들은 대서군과 끝까지 함께 싸운다. 이는 마찬가지로 목천파 그리고 여강목씨토사(麗江沐氏土司)들이 끝까지 손가망에 원한을 지닌 근본 원인이다. 손가망이 주재하면서 민간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손가망은 곤명에 들어간 후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하도록 하고, 부족하면 빌려주도록 한다. 수리사업도 벌인다. 운남, 귀주라는 편벽한 지방에서 20만의 병력을 유지한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오삼계가 운남으로 들어오기 건에 대서군은 '전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전에 운남, 귀주에서 군대를 충분히 먹여살릴 수 있다는 소식은 호남, 강남의 청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청군은 운귀총독 조정신이 솔직히 인정했다. 운남지방이 황무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순치16년 봄여름부터라고. 이때는 주유랑이 버마로 올겨가는 시점이다.
객관적으로 손가망이 운남으로 들어온 이후 10년을 되돌아보면, 보경전투 이전에 했던 일은 먼저 사정주를 멸하고, 사천중부의 여러 진을 평정하고, 운남을 경략했다. 그리고 영력제를 맞이하고, 호남, 광동광서의 수복을 준비한다. 그의 공적은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이다. 설사 이정국이 확실히 뒤어난 전적을 보였지만, 종합해보면 어쨌든 그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손가망과 이정국의 갈등은 순전히 각자의 시야가 좁았기 때문에 일어난 감정싸움이라 할 수 있다.
2. 패국은 기정사실이 되다: 이정국의 변신과 유문수의 무나(無奈)
손가망은 이정국처럼 명나라 군신들과 타협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이정국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영웅이고, 젊어서 '소위지(小尉遲)'라는 별명을 얻었고, 만인적(萬人敵)'이라 칭송받았다. 운남에 들어온 후, 토사의 전법을 받아들여 상군(象軍)을 설치한다. 수하의 정예는 나중에 십만가량에 이른다. 그러나 이정국은 갈수록 남명조정에 지나치게 충성했다. 그는 대서군출신의 면모를 포기한다.
이정국은 농민군 우두머리에서 진정한 명나라의 충신으로 변신한다. 이는 연명항청(聯明抗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내심에서 진정 생각한 것이 일종의 '협력'인지 아니면 '귀순'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실제로 이정국의 나중의 행위는 확실히 현저히 변화한다.
설사 이정국이 단지 다수인을 단결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치더라도, 나중의 행위를 보면, 어쨌든 그것은 일종의 환상이었다. 냉정하게 그가 대서군의 옛부하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아야 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손가망을 친 후에 손가망의 부하를 어떻게 대했는가? 그리고 또 다른 형제인 유문수를 어떻게 단결시켰는가? 이정국은 확실히 선명하게 대서군을 등졌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대국에 아주 불리한 결과를 가져 왔다.
이정국은 진정으로 각측의 역량을 새로 통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명을 지지하는 태도를 너무나 분명히 표현했다. 이것을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계속 대서군에서 단결하지 못하는 악영향을 낳는다. 그의 개인적인 품성은 말할 것도 없이 존경할 만하기 때문에 이런 실패가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이 면목을 확실하게 보면, 자연히 새롭게 두 사람중 또 다른 형제인 유문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손가망과 이정국의 갈등이 봉합불가능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대서군이 두눈 멀거니 뜨고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유문수는 우울하게 죽는다.
순치11년(영력8년, 1654), 호광으로 출정할 계획을 세운다. 장사, 형주, 악주를 수복하고, 홍승주를 격파하고, 강을 따라 장명진(이전의 장황언과 3번에 걸쳐 장강으로 진입했고, 주산열도에 남아서 지키고 있었다. 사실상 장명진은 연말에 병사한다. 장황언은 잠시 정성공과 연합했다가 다시 갈라진다)과 연락하여 함게 강남을 수복하려는 것이다.
이 계획은 원래 아주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다. 유문수는 그러나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어라 수복한 전공이 손가망이 등극하는 자본이 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손가망의 행동을 유의한다.
유문수는 당시에 이정국이 암중으로 주유랑을 구하는 것을 지지했다: "스스로 몇 기를 이끌고 가서 이정국을 만났다. 그리고 이렇게 맣한다. '우리들은 탐관오리들에게 떠밀려 반란에 가담했다. 조정사직을 전복시키려 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가 국가를 등진 것이고, 국가가 우리를 등진 것은 아니다. 지금 황상은 열황제의 적계동생이다. 차라리 함께 힘을 합쳐 운남 귀주를 기반으로 중원을 수복하면 나중에 처자식들까지 관직과 봉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 영광스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 지금 손가망을 쫑차 호란작위(胡亂作爲)
하면 비록 왕을 칭하고 공을 칭하더라도, 결국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오늘은 손가망이 동탁인데, 동탁 이후에 다시 조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 그러자 이정국은 하늘을 가르키며 맹세했다. 귀화사에서 주유랑을 접견한 후, 크게 통곡한다. 그리고 함께 곤명으로 모셔온다."
그후 유문수는 촉왕의 신분으로 사천을 수복한다. 이것이 제2차출병이다.
이전에 영력6년(1652) 사천으로 출격한 것은 기본적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유문수는 왕복신, 하구의, 원도, 무대정, 장선벽, 장광췌, 기삼승으로 하여금 5만을 이끌고 오철, 설산관, 노주등지에서 반격한다. 칠월 서주(지금의 의빈시 서주구)을 공격하여 청나라장수 노광조를 격파하고, 총병 남일괴를 죽인다. 다시 중경을 공격하고, 성도를 포위하며, 청나라의 지부 주기창을 죽인다.
오삼계가 병력을 이끌고 맞이해 왔다. 대서군은 도통 백함정, 백광생등을 참살하고, 오삼계를 포위했다. 청군은 죽어라 포위망을 뚫고 면주(지금의 면양시)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청군의 사망자는 만명이 넘었고, 오삼계로 하여금 보녕(지금의 낭중시 보녕현)로 도망치게 했다.
유문수의 제2차출병은 경적심리로 실수를 한다. 왕복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경솔하게 보녕을 포위공격하나 실패한다. 그리고 왕복신이 전사한다. 청군은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한중으로 물러갔다. 사천경내의 청군은 대체로 숙청되었다. 그러나 대서군은 병력이 부족하고 기반도 튼튼하지 못했다. 손가망은 그 기회를 틈타 비난한다. 좋은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아, 좋은 장수를 죽게 만들었다. 유문수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공로를 감안하여 직위를 파면한다. 부장 장선벽은 몽둥이로 맞아 죽고, 유문수는 직위를 면직당한다.
이렇게 유문수를 1년간 억눌러 놓았다. 이것이 바로 손가망이 귀양으로 가서 대거 호광으로 진격하는 행동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유문수는 명을 받아 호광으로 나간다. 동시에 사천을 공고히 한다. 기삼승, 적삼품, 양위, 하천운, 정수표등 그의 수하 부장들은 가정부(사천 낙산시)로 들어간다. 방어조치를 한 후 사천동부의 이내형, 학요기 및 기동십삼가와 연락하여 호광으로 출동할 준비를 한다.
앞에 얘기한 것처럼 이때 유문수는 손가망이 뒤에서 언제든지 기회를 틈타 그와 이정국을 죽일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장수들은 사천으로 갔고, 호광에서 전투할 인원은 많지 않았다. 이것도 유문수가 이번 행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왕부지는 <영력실록>에서 이렇게 썼다. 삼일동안 7번이나 서신을 보내 이정국에게 대사를 논의하자고 한다. 유문수는 아들 유진(劉震)을 몰래 이정국에게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손가망이 오면 죽이려 한다." 이정국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도적과 결국 같이 일을 하지 못하겠구나. 그래도 나는 여전히 군자의 마음으로 대하겠다." 이정국은 서신을 써서 손가망에게 대의를 위해 같이하자고 권한다.
왕부지 뿐아니라, 황종희의 <행호록. 영력기년>등 여러 사료에서도 모두 이정국의 이미지는 충신으로 묘사한다. 매번 주관적인 정서가 보인다. 다만 당시 손가망과 이정국의 갈등은 기정사실이다. 이번에 호광행동에서 유문수가 힘을 다하지 않은 것때문에 부장 노명신은 상덕성 아래에서 매복에 당해 죽는 결과를 초래한다.
손가망은 원래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장강하류의 장명진과 연락하고 싶어 했다. 다만 유문수는 선봉장으로 실패한다. 병사와 장군을 잃었다. 그리하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번 패전에 유문수의 책임이 있을까? 확실히 그의 책임만은 아니다. 근원은 이정국과 유문수가 손가망에 대하여 진심으로 함께 하지 않은 혐의에 있다.
유문수는 스스로를 지키고, 이정국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했다. 손가망은 이정국이 영향을 주어 유문수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몰래 주유랑을 빼돌린 행위로 갈등은 격화된다. 손가망은 자연히 이정국이 독립하려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급히 그를 병합하려 한다.
대서군의 대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유문수는 인마를 이끌고 이정국에게 가서 손가망을 막는다. 유문수는 혈서를 손가망에게 보내어 간했다. 이를 보면 유문수는 부득이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의리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바램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손가망은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청군에 투항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정국이 후기에 일을 주재한다. 유문수는 원래 이렇게 하면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유랑에게 귀양으로 북상할 것을 권한다. 대서군이 계속 패전하고 있어서 내부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앞에 내세워 사천을 수복하고 사기를 높이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그후에 다시 성도로 들어가서 서남3성을 공고히 하면 다시 북벌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계획은 주유랑마저도 흥분시켰고, 그 방안을 채택하려 한다.
이정국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정국은 사천, 호남에서 인원을 모두 운남으로 빼내도록 명한다" 후인들은 기본적으로 이정국은 주유랑의 성격이 유약하여 그가 전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유랑을 자신이 장악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주유랑이 점점 유문수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정국이 유문수의 사천수복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대신 김간은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내환(손가망)은 제거되었지만, 외우는 아직 큽니다. 우리를 노리는 자들은 전열을 정비하고 무기를 갈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호랑이가 싸워서 하나는 죽고 하나는 상처입기를 기다려 자신들의 용맹을 떨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술을 먹고 물새는 배를 타고있고, 쌓아놓은 나무더미위에서 푹 잠을 자고 있다. 어찌 위험하지 않을 것인가. 두 왕은 오랫동안 전투를 해온 사람인데, 어찌 이런 때에 경계를 느슨히 합니까."
유문수는 이정국이 점점 편협해지는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정국의 변화를 막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 대국을 위하여 손가망이 부하병사들을 단결시키는데 주의할 뿐이다. 그는 활달하고 대범하다. 그에게 귀순한 손가망의 부하가 3만에 달한다. 거기에는 대장 풍쌍례도 포함되어 있고, 애능기의 아들 애승업(艾承業)도 포함되어 있다. 나중에 모두 두 사람은 유문수와 관계가 가까워지고, 이정국과는 멀어진다.
백문선등 대장은 당초 내분을 원치 않아 귀순을 선택했다. 이를 보면 많은 장병들은 중요한 순간에 이해관계를 명확히 알았다. 그러나 이정국은 손가망의 부하들을 거려했다. "손가망의 옛부하들은 '진병(秦兵)'이라 부르고, 원래 이정국의 부하들은 진병(晋兵)'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손가망의 부하들은 마음이 나태해진다.
이정국의 뜻이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므로, 유문수는 이들 소위 '진병(秦兵)' 삼만을 거두겠다고 건의한다. 그리고 이들을 변방에 보내어 국경을 공고히 한다. 병사들은 기꺼이 그 명을 받들어 사천으로 가서 전투를 한다. 이정국은 유문수가 장병을 단결시키고, 이견을 교묘히 해소하는데 불만을 품었다. 그리하여 유문수에게 사천수복을 중단하고 돌아오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이 유일하게 남은 동생은 비통해 한다. 다음 해 그는 한을 품고 죽는다.
죽기전에, 유문수는 대공무사의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놓아, 기동십삼가의 의군과 소통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사천을 회복하는데 힘쓰고 나아가 이정국이 북상하여 섬서로 진격하여 낙양을 점령하도록 건의한ㄴ다. 그리고 그가 주유랑을 도와 대사를 성취할 것을 희망했다.
유문수를 잃자, 이정국은 혼자서 지탱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실력이 크게 약화된다. 그후 순치16년, 청군 오삼계가 대거 운남으로 쳐들어온다. 명군의 기반은 위태위태했고, 주유랑은 옮겨가기 시작한다. 모두 곧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 이정국은 손가망의 여러 조치를 없앤다. 영장법을 포함해서. 이는 이정국에게는 손가망과 같은 식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남명조정에 충성하는 순신(順臣)일 뿐이다.
풍쌍례등 부하들은 이정국이 자신들을 멀리하는 것을 보자, 애능기의 아들 이승업은 목천파의 딸과 결혼하고, 더욱 유문수와 풍쌍례와 가까워진다. 결국 그들은 모두 이정국을 도와 주유랑을 돕고자 하지 않았다. 비록 유문수의 아들 유진은 계속 이정국 부자와 잘 지냈지만(유진과 이정국의 차남 이사흥은 투항했고, 장남 이부흥은 귀주전투에서 일찌감치 죽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막내아들 이윤흥은 이정국의 유훈에 따라 변방으로 숨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대서군의 내부문제는 항상 외부위협보다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본다. 최초로 애능기를 잃은 것이 바로 대서군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당연히 손가망, 이정국, 유문수 세 대들보는 각자의 장점이 있다. 원래 경천동지할 대사업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들의 연명항청의 내용이 명확치 않고 애매했다. 그리하여 서로에 의심이 반복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유지할까 귀순할까의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 나타나게 된다. 실질적인 행동의 수칙이 나오지 않았다. 소위 '협력'은 어쨌든 현대사상으로 보는 것이다. 고인들은 결맹의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목천파, 양외지, 주유랑등은 대서군과 결맹하려는 뜻이 없었다. 완전히 형세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조정이 반군을 초무했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암중으로 손가망을 함정에 빠트리고, 손가망과 이정국의 이견을 이용한다. 명나라관리들이 그것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
형제간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하지 않았다. 이는 이미 신분이 변화할 때 점점 외인들에 의해 분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수습할 수 없게 되고, 모두가 패배하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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