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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계주병변(薊州兵變): 명나라최강의 척가군(戚家軍)은 어떻게 우군에 참살당했는가?

by 중은우시 2021. 5. 1.

글: 남북양조(南北兩謿)

 

만력23년(1595년)의 계주병변은 하나의 비극이며 지금도 차마 다 읽을 수가 없다.

 

이 사변은 사료에 기록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신종실록>에 몇 마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당시는 아직 삼대정(三大征)중 하나인 항왜원조(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가리킴)시기였으므로, 조선의 사료에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만력이십삼년 십월, 기미(己未)일, 방해병(防海兵, 해안방어병)이 군량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며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鼓噪). 계진의 독(督), 무(撫), 도신(道臣)이 난리를 일으킨 자를 붙잡아 처형하고, 나머지 일당은 남쪽으로 되돌려 보냈다. 병부에 보고하였고, 병부에서 허가했다."

 

명신종(만력제)때 병변이 여러번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만력10년의 항주병변(杭州兵變), 11년의 광동나정(羅定)병변, 13년의 사천건무(建武)병변, 15년의 심양(潯陽)병변, 16년의 감숙(甘肅)병변, 17년의 운남영창(永昌)병변, 만력19년에는 경영(京營)의 병사들이 장안문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이와 비교하자면, 만력23년의 이 병변은 무슨 큰 사건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변의 경위

 

병변의 주체는 북병의 중진(重鎭) 계진을 지키고 있던 남병(南兵)이다. 통상적으로 말하는 척가군(戚家軍)이다. 만력23년 십월 이십일, 계진삼협의 남병은 오랫동안 군량이 내려오지 않아서, 집단적으로 흥분한다. 계진총병 왕보(王保)는 이들을 연무장으로 유인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평양에서 남병이 철수할 때, 왕보가 상을 주지 않자, 석문채(石門寨)에서 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총병 왕보는 남병과 약간의 원한이 있었고, 그리하여 천삼백명을 유인하여 모두 죽여버린다."

 

<조선선조실록>: 건창영(建昌營)은 남병 삼천을 남겨서 주둔시켜 왜(倭)에 대비했다. 십월에 고향을 떠난지 오래되고, 돈과 양식을 주지 않자, 분노하여 난을 일으킬 모의를 한다. 일이 발각되어 삼천삼백여명을 죽인다.

 

바로 얼마 전까지 조선반도에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풍운을 질타하던 항일영웅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도살당한 것이다. 

 

피살된 남군의 숫자에 대하여는 기록마다 일치하지 않는다. 수백명부터 3,300여명까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후의 일부 숫자를 보면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다.

 

전후로 2번에 걸쳐 조선으로 출정할 때, 남병은 모두 조선의 군민들에게 가장 평판이 좋았던 명나라군대이다. 전투에서 용맹할 뿐아니라,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군기가 좋았다. 조선인들은 오유충(吳惟忠)이 지휘하는 남병에 대하여 많이 칭찬했다. 조선땅에 들어온 명나라군대중에서는 평판이 가장 좋았고, 전공이 탁월했던 전공이 큰 부대였다. 병력을 지휘하는 오유충, 낙상지(駱尙志), 왕필적(王必迪) 세 사람은 "남병삼영장(南兵三營長)"으로 불리웠다.

 

계진남병은 바로 오유충이 이끄는 절병(浙兵, 절강출신 병사)이었다. 출정후에 어느 정도 인원손실이 있었지만, 계속 인원을 보충하여 합계 3,700여명에 달했다.

 

병변이 발생한 2년 후, 제2차 항왜원조때, 병부는 여전히 오유충이 지휘하는 남병을 조선으로 보낸다. 다만, 이때의 남병은 숫자가 크게 모자란다. 이미 2천명이 되지 않았다. 인원이 절반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 다시 1,785명을 모집하여 숫자를 채워야 했다. 만일 이 숫자를 대조하여 추산해보면, 병변때 피살된 남군의 인원수는 마땅히 1,700-2,000명가량이 될 것이다.

 

표면적인 원인

 

표면적인 원인은 주로 "상을 달라고 모여서 요구하는 것"과 "군량을 늘여달라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즉 군량미를 내놓으라고 집단으로 모여서 항의한 것이다.

 

명나라중기의 군량은 모병제로 일반적으로 매년 18냥이었다. 다만 조선으로 가는 것처럼 출국하여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는 약간 달랐다.

 

당시 경략군무의 송응창(宋應昌)은 남군의 군량을 배로 늘여주어, 1년에 43냥가량이었다. 송응창이 재직할 때는 모두 이 기준에 따라 집행되었다. 문제는 그가 제2차 항왜원조전쟁때 이미 해직되었고, 해직될 때 군량이 전부 지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화근이 된다.

 

남병이 소란을 일으킨 원인은 군량이 전부는 아니었다. 제1차 항왜원조작전때의 상금도 있다. 모두 목숨을 내걸고 싸웠으며, 승리했는데, 미리 약속한 상금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실망과 불만이 컸다.

 

송응창이 조선에 파병하는 병사들을 우대한 것은 잘 한 일이다. 사기를 높였고, 전투력을 제고시켰따. 그러나 그가 이직할 때 제대로 뒷일을 처리해주지 못했다. 송응창 자신도 내각수보 왕석작(王錫爵)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적었다: "평양에서 가장 먼저 성안으로 진입하는 부대에 주기로 한 상금을 아직 지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각군의 전투의지가 예전만 같지 못합니다. 이 일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재상께서 유념해 주십시오."

 

배후의 원인

 

군량이 미지급되는 일은 군대에서는 흔한 일이다. 사병들이 불만을 가지고, 소란을 부리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왜 큰 공을 세운 남병을 이렇게 도륙해야 했을까?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군대내의 남북다툼이다.

 

남병은 모두 척계광(戚繼光)이 절강에서 모집한 자제병이다. 전후로 모두 2만여명에 이른다.

 

제1차 항왜원조전쟁(임진왜란)때, 오유충은 계진의 3,700여명 남병을 이끌고 출전했으며 뛰어난 전적을 거둔다.

 

조선의 <조선선조실록>에는 남병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남병은 생사를 돌보지 않고, 계속 전진한다. 오유충의 공이 가장 높다."

"유격(遊擊) 오유충은 남병을 이끌고 밀덕(密德) 모란봉 토굴을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분전하여 사상자가 특히 많았다."

 

다만, 군대의 총사령관은 이여송(李如松)이다. 그는 북군(北軍)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북군에 편향되게 처리했다. 원래 남군의 전공을 북군에게 돌렸다. 예를 들어, 평양성을 가장 먼저 등정한 것은 분명 오유충인데, 최종적으로 으뜸공로를 북군 장수 양원(楊元)에게 돌린다.

 

이여송의 이런 방식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남병의 장수인 왕필적은 심지어 직접 이여송에게 "부지불신불인(不智不信不仁, 지혜도 없고, 신의도 없고, 어질지도 않다)"고 질책한다. 하급장수가 상급장수를 질책하다니, 이를 보면 남병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남병은 공정한 대우를 받지도 못하고, 사전에 약속한 상도 받지 못했다. 명군의 내부에 북병과 남병간의 다툼이 갈수록 심해진다. 벽제관전투이후, 이여송은 전투의지가 약화되어 추가적인 군사행동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척계광은 왜 남병을 굳이 북쪽의 계진에 주둔시켰을까? 그것은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에서였다. 이를 통해 북군의 기풍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척가군은 군기가 엄격했고, 출국이후의 원정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렇게 하는 것은 반드시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건드리게 된다. 동시에 남북병간의 갈등을 조성했다. 척계광이 살아있을 때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그 틈은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남북의 다툼은 군대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거정(張居正), 척계광이 사망한 후, 후임자들은 대부분 북방인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 고향사람들에게 편파적이었다. 남병을 지지하던 송응창도 파면되자, 남병은 더욱 고립된다. 아무도 그들을 위해 말해주지 않았다. 미리 약속했던 군량과 상금도 누구에게 찾아가서 달라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계진총병 왕보는 당연히 북방인이다.

 

그래서 계진병변이 발발한 것은 바로 남북간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이번 병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남병이 마음 속에 그들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북방장수에게 유인되어 살해당하고, 나중에 모반의 죄명까지 뒤집어 쓴다. 이것이 사실의 진상인 것이다.

 

심층적 원인

 

그러나 만일 더욱 심층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는 명나라군대제도 내지 정치제도의 폐단을 반영하는 것이다.

 

명나라의 군사는 처음에 군호제(軍戶制)에서 나중에 모병제로 변화한다. 만력제 말기에 이르러, 이미 운영이 더욱 어려워진다. 근본적으로 재정과 관련이 있다. 장거정이 개혁한 10여년간 국고는 충실했다. 그러나 삼대정으로 인하여 더 이상 재정은 고갈되고 회복되지 못한다.

 

"황제불차아병(皇帝不差餓兵, 황제는 굶는 병사를 보내서는 안된다. 즉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배곯게 해는 안된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황궁에 틀어박혀 있는 만력제는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숭정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로 그들이 계속하여 '굶은 군대'를 내보내는 바람에 '굶은 병사'는 '반란군(賊兵)'으로 바뀌고, 결국 대명은 이들 '굶는 병사'들의 손에 망하게 된 것이다.

 

계진병변은 기실 만력제, 대명제국에 대한 하나의 경고였다. 구변중진(九邊重鎭)중 으뜸인 계진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분명 제도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터졌다는 것이다. 이대로 계속하다가는 대명제국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만력제나 여러 신하들은 이것을 무시한다.

 

이 사건의 원흉은 계진총병 왕보이다. 사후에 그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 왕보는 그후 동일원(董一元)의 뒤를 이어 요동을 지키고, 거기에서 죽는다.사후에는 좌도독에 추증된다.

 

남병 장병들은 반년전에 막 출국전투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이국땅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들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왜군의 총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주둔지에서 자신의 우군에게 유인살해당했다. 국가가 이렇게 공신을 대우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계진병변후, 척계광이 16년간의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방어선은 그 역할을 상실한다. 삼십여년 후, 홍타이시가 청군을 지휘하고 쳐들어왔을 때, 대명의 북방 각 중진은 일거에 무너져 버린다. 청군의 앞에 그들은 방어벽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런 대명이 망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때가 만력23년 즉 1595년의 일이고, 다시 49년이 지나서 대명은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