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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량샹(梁湘): 천안문사태로 잊혀진 선전경제특구 최대공신

by 중은우시 2020. 8. 29.

글: 관령(關嶺)

 

선전경제특구는 중국 개혁개방의 하나의 기적이다. 이 기적을 만드는 과정에서, 선전에서는 많은 개척정신을 지닌 관리들을 배출한다. 이들 관리들 중에서, 량샹은 기복과 곡절이 커서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량샹은 광둥 카이핑(開平) 사람으로, 1919년생이다. 광저우에서 학교를 다닐 대 급진적이고 활발했다. 1937년, 량샹은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보로 연안까지 간다. 그후 전투가 계속되는 세월 속에서 생사를 넘나든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량샹은 일찌기 광저우시 부시장, 샤오관지위 부서기, 광저우시위 부서기, 광저우시위 제2서기를 역임한다. 1981년 3월 량샹은 선전시위 제1서기 겸 시장이 된다. 그도 처음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당시 광둥성위 제1서기인 런중이(任仲夷)와 광둥성장 류텐푸(劉田夫)가 극력 추천하여 결국 명을 받들게 된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량샹은 선전을 5년간 다스린다. 그때는 선전이 가장 힘들었던 5년이다. 또한 선전이 아래 위에서의 압력을 가장 크게 받았던 5년이기도 하다. 더더국 선전이 하나의 도시로 발전하는 기초를 닦은 5년이기도 하다.

 

5년동안, 량샹은 비범한 박력과 과감한 개혁으로 온갖 압력을 막아내며, 구물표증(購物票證), 양표(糧票)를 없애고, 노동계약제를 시행하며, 노동계약을 한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험을 실행한다. 전국 최초의 외환거래센터를 만들고, 통일적인 소득세세율을 실행한다. 논밭 위에 천개에 이르는 건물을 세운다. '선전속도'과 '일야성(一夜城)'의 신화가 이렇게 탄생한다. 선전은 특구에서 기적이 된다.

 

선전은 하루에 천리를 가는 발전성취를 이룰 대, 선전의 '변천론(變天論)'이 나타난다. "량상은 적자(赤字)로 국격을 떨어뜨렸다" "국토주권을 외국인에게 팔아먹었다. 당대의 이홍장이다" "선전은 모든 것이 이미 자본주의화되었다." 상하이의 <문회보>는 <구중국조계의 유래>라는 글을 실어 선전이 '새로운 조계'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1981년 11월, 량샹이 선전을 다스린지 1년도 되지 않아, 중앙기율검사위가 조사소위를 파견한다. 1984년 1월, 등소평이 선전특구에 "선전의 발전과 경험이 증명한다. 우리가 경제특구를 건립한 정책은 정확했다"는 글을 내려주고나서야 량상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량상은 결국 낙마한다. 1985년 8월 시장직위를 면직당하고, 1986년 5월에는 다시 시위서기의 직위로 면직당한다. 그리고 광둥성 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 옮긴다. 이직때 량상은 칠레시인 Pablo Neruda의 말을 인용하며, 선전에 대한 깊은 감정을 토로했다: "만일 반드시 천번을 태어나야한다면 나는 이 곳에서 태어나길 바란다. 만일 천번을 죽어야 한담녀 역시 이 곳에서 죽기를 바란다." 찰나간에 많은 동료들은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얼마 후 중공중앙 정치국위원 왕전(王震)이 량상으로 하여금 하이난(海南)으로 가서 조사연구하여 하이난의 발전을 가속화시킬 의견을 제안해줄 것을 부탁받는다. 하이난에서 1주일간 고찰한 후, 량샹은 보고서를 써서 하이난을 광둥에서 분리시켜 단독 성으로 하고, 선전경제특구와 같이 경제특구로 만들자고 한다. 당시 중공총서기 자오쯔양은 량상의 건의를 높이 평가하여, 량상을 다시 기용한다. 그는 하이난건성준비조 부조장, 하이난성 초대 성장이 되어 다시 관료사회로 들어온다. 

 

1989년 3월, 5명의 전국정협위원이 연명으로 '양회'에서 발언한다. 하이난성의 양푸(洋浦) 30평방킬로미터의 토지를 외국인투자자에게 임대하며, 기간은 70년으로 하고, 무당 임대료는 2,000위안으로 하여 경제특구를 만드는 바안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이는 중국의 주권을 해친다고 보았다. 200여명의 전국정협위원들도 이 문제에 대하여 연명으로 제안을 내놓는다. 일부 전인대 대표들도 의론이 분분했다.

 

국내외매체는 이 소식을 보도한다. 어떤 신문잡지는 엄중하게 비판했다. 일부 국내군중과 해외화교들도 베이징에 서신을 보냈다. 언사는 아주 격렬해고, 이에 대하여 경악과 분개를 나타냈다. 그리고 관련 책임자를 처벌할 것도 요구한다. '양푸풍파'는 일시에 중국각지로 만연한다.

 

6.4천안문사태가 막 지나고 나서, 량샹과 하이난성위서기 쉬즈제(許士傑)은 베이징으로 양푸개발방안을 보고하러 간다. 다음 날 새벽, 량샹은 격리조사를 받는다. 1989년 9월 <인민일보>는 량상이 '이권모사(以權謀私, 권력으로 사적인 이익을 꾀하다)'했다는 이유로 면직당한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계속 조사한다. 보도에 따르면, 량샹이 낙마한 진정한 원인은 바로 자오쯔양의 둘째아들 짜오얼쥔(趙二軍)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자오얼쥔은 하이난으로 도망왔다. 세관에서는 여권이 이상하다고 여겨 량상에게 보고하는데, 량샹은 '여권은 유효하니 통과시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오얼쥔은 홍콩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1990년, 선전읕 특구설립 1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그런데, 10주년성취전이나 경축화책의 그 어디에서도 량샹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91년, 중병에 걸린 량샹은 선전으로 돌아와 요양한다. 공원을 산책할 때 시민들이 알아보았다. 시민들은 아이에게 량할아버지(梁爺爺)라고 부르게 했다. 그리고 량상에게 가지고 있던 케이크를 주었다. 량상은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1998년 12월 13일, 80세의 개혁가 량상은 근 10년간 '장기조사'를 받던 중 광저우에서 병사한다. 그는 나를 '오동산(선전과 홍콩 사이의 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선전의 역사에서 량샹의 이름을 지워버릴 수 없다!" 당시 량상은 조각가에게 요청하여 '유자우(孺子牛)'를 시청광장에 세웠다. 많은 사람들은 량상이 그 고집센 소에게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