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청나라말기 "미국유학아동"들은 얼마나 우수했을까?

중은우시 2020. 5. 28. 14:35

글: 장금(張嶔)

 

증국번(曾國藩)이 관료사회에서 종횡하며 부침을 거듭했지만, "유미유동계획(留美幼童計劃)"은 그의 일생에서 최후의 큰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72년 8월 11일, 즉 증국번이 사망하기 5개월전에, 이 '중화창시지거(中華創始之擧)'라 불리는 계획을 힘들게 싸워서 성사시켰다. 120명의 '유미유동'은 4차에 나누어 3만2천리를 건너 미국으로 유학간다. '서도자강(徐圖自强, 천천히 스스로 강해지기를 도모한다)'의 국가사명을 어깨에 지고 떠난 것이다. 증국번의 생전에 오른팔이며, '유미유동계획'의 집행자인 용굉(容閎)은 흥분하여 외쳤다: "나는 야응(夜鷹, 쏙독새)이 눈을 뜬 것같았다."

 

막 나라의 대문을 열었던 시대에, '서양유학'은 대다수의 중국인들에 있어서, 머리깨지면서 앞다투어 가려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당시의 백성들 눈에 기본적으로 '마굴(魔窟)'이었다. 유학? 그것은 바로 아이를 불구덩이에 던져넣는 것과 같은 나쁜 일로 인식되었다. 120명의 '어린 유학생'들은 나이가 10살에서 15살까지였고, 절대다수가 빈곤한 평민가정출신이다. 고관자제는 한명도 없었다. 그들은 막 미국의 국토를 밟았을 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달리는 기차와 기괴한 형상의 고층건물을 보고 놀라서 한때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다만, 이들 평범한 출신의 아이들이 초기의 '경악'을 거친 후 금방 굳은 애국심과 각고의 학슴정신으로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들의 놀라운 학습능력은 언어장애를 극복하고, 우수한 성적을 얻어냈을 뿐아니라, 더더욱 완벽하게 미국의 캠퍼스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하트포드고등학교에서 공부할 때, '유미아동'중의 등사총(鄧士聰), 강새령(康賽齡), 양돈언(梁敦彦)등은 전체 학교에서 유명한 럭비선수였다. 나중에 예일대학에 진학하는 종문요(鍾文耀)는 예일대학 조정팀의 주전선수였다. 이처럼 미국젊은이들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영역에서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별명을 얻고 있던 '유미유동'들은 모두 전혀 손색없는 용기와 역량을 보여주었다.

 

하트포드고등학교의 졸업식도 '유미유동'들의 무대였다. 그들은 우수한 졸업성적을 거두었을 뿐아니라, 하나하나 멋진 졸업연설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양돈언은 <북극곰>이라는 연설에서, 제정러시아가 중국영토를 집어삼킨 후안무치한 행동을 질책했다. 연설중 '러시아는 도적이다'라는 한 마디는 당시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채소기(蔡紹基)의 <아편무역>은 영국의 후안무치한 아편무역을 질타했다. 이들 '유미유동'들은 영어로 내심의 목소리를 외쳤다: "중국은 죽지 않았다. 중국은 단지 잠들어 있을 뿐이다. 언젠가 깨어날 것이고, 반드시 세계에 자랑스럽게 서게될 것이다."

 

이들이 던진 호언장담을 들으면 같은 '영문연설'이면서 백여년후에 하는 말마다 '미국의 공기는 달콤하다'고 외치는 유학생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1876년 필라델피아세계박람회에서 백명이상의 중국 '유미유동'은 특수한 '손님'으로 참석한다. 세계박람회에서 그들은 일상적이 시험답안지와 노트를 보여준다. 그들의 착실한 학습정신과 우수한 성적은 각국에서 온 손님들로부터 놀랍다는 반응을 받아낸다. 평균연령이 겨우 십여세였던 이들은 단정한 행동거지와 조리있는 대답으로 질문한 손님들의 각종문제를 대했다. 이들의 뛰어난 못브은 미국대통령 그란트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시간을 내서 이들과 만나고, 한명한명과 악수하며 한담을 나누었다.

 

이 광경을 보고, 필라델피아세계박람회에 참석했던 청나라정부의 관리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청나라정부의 대표관리인 이규(李圭)는 이 놀라운 기쁨을 글로 기록했다. 일기에서 그때의 감동을 적어두었다. 고향을 떠난 이들 중국어린이들은 '천,만명들 사이에서 말고 행동이 자연스럽고,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들이 서양에서 배운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기실 이규뿐아니라, 세계각국의 내빈들도 이때 이들 우수한 중국어린이들을 주목하게 되고, 그들이 낙후된 조국을 찬란한 미래로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우수한 아이들이 대청제국의 여러 완고파관리들에게는 눈엣가시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미국유학'을 떠난 날부터, 이들을 폄하하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계속하여 이들 '유미유동'에게 쏟아졌다. 결국 1881년 청정부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멍청한 결정을 내린다. 그리하여 소수의 운좋은 아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미유동'은 강제로 귀국당한다. 근대중국의 자강을 위한 '서양유학'활동은 이렇게 폭력적으로 끝나버린다.

 

조국의 땅을 다시 밟은 이들이 중국에서 받은 대우는 환영의 박수가 아니라 오히려 적나라한 치욕이었다. 배에서 내려 육지를 밟는 순간부터 그들은 수군에 의해 강제로 압송되어 '창문은 거의 습기가 차서 썩어있고' '곰팡이냄새가 코를 찌르는' 낡은 방으로 데려가소, 3,4일간 '죄수'와도 같은 생활을 한다. 그 후에 비로소 그들은 도대아문(道臺衙門)으로 데려가진다. 가는 도중에도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각종 조롱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도대아문에서는 강제로 무릎꿇려지고, '도대대인'으로부터 냉랭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청나라정부로부터 각박하고 무정한 대우를 받은 '유미유동'들은 이어지는 반세기동안 절대다수의 이들은 중국의 대들보같은 인물이 된다. 예를 들어, 1881년에 초기귀국당했으나 나중에 경장철로(京張鐵路)를 건설하여 중국철도업계의 '조사'가 된 첨천우(詹天佑), 1881년 운좋게 귀국당하지 않고 미국에 계속 남아서 공부할 수 있었으며, 나중에 '중국기계채광의 창시자'로 불리는 오앙증(吳仰曾), 그리고 '경자국난'의 치욕을 짊어지고 이치로 다투어서 미국으로 하여금 일부 '경자배상금'을 반환하도록 성사시킨 외교가 양성(梁誠)은 모두 이들중 가장 우수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외에 중화민국의 초대총리 당소의(唐紹儀), '중국은 죽지 않았다'고 소리친 천진대학의 창건자 채소기, 마지막황제 부의의 결혼식때 들러리를 섰고, 일찌기 '러시아는 도적이다'라고 소리쳤던 하트포드고등학교를 다녔던 외교가 양돈언, 청화대학의 초대총장인 당국안(唐國安), 미국최초의 중국계 변호사인 장강인(張康仁), 미국의 중국계노동자들의 '보호자'인 이은복(李恩福).... 많은 이들이 중국근대사에서 한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이들도 당시 120명의 유미유동중 일원이다.

 

그러나 후인들이 잘 알고 있던 위의 인물들과는 달리 후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사람들도 있다.

 

먼저, 1884년 8월 23일, 중국프랑스전쟁의 '마미해전(馬尾海戰)에서 복건수사(福建水師)가 전멸하는 비장한 전투에서, 역시 4명의 '유미유동'이 나라를 위해 희생되었다: '진위호(振威號)'의 육품군공 광영종(鄺咏鍾), '양무호(揚武號)'의 육품군공 양조남(楊兆楠), '양무호' 육품군공 설유복(薛有福), '양무호' 칠품군공 황계량(黃季良).

 

10년이 지난 후 1894년 7월 25일의 갑오청일전쟁에서의 풍도해전(豊島海戰)에서 '제원호(濟遠號)'의 방대대부(幇帶大副) 심수창(沈壽昌)은 당시 '유미유동'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인물이다. 발포를 지휘하던 그는 전투중 머리에 포탄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는 갑오청일전쟁의 해전에서 가장 먼저 순국한 중국장교가 된다.

 

그리고 9월 17일, 더욱 참혹했던 황해대전(黃海大戰)에서 등세창(鄧世昌)과 함께, '치원호(致遠號)'를 몰아서 일본으 '요시노(吉野)'호에 부딛쳐갔던 대부(大副) 진금규(陳金揆)도 역시 당시의 '유미유동'이었다. 마지막 위해위(威海衛)전투에서 진금규와 같은 학교에서 같이 공부했으며, '광병호(廣丙號)'를 몰면서 죽을 때까지 저항했던 황조련(黃祖蓮)도 불행히 적의 포탄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근대사상 큰 업적을 세운 다른 친구들에 비하여 이들 몇명 영웅들의 지명도는 크지 않고, 지금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생사의 결전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의 '관료로서의 길'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계속 배척당했다. 그들이 직면한 것은 구사일생의 거의 승리의 희망이 없는 악전고투였다. 그러나 그들은 희생을 앞에 두고도 젊은 그들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쳤다.

 

예를 들어, 마미해전에서 순국한 황계량은 전투가 개시되기 전에, 자신의 부친에게 스스로의 자화상을 한폭 보낸다. 그리고 한글자 한글자 눈물로 편지를 쓴다: "부친대인은 자식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인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평소의 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내드리오니, 부친께서 보시고 제가 항상 부친의 슬하에 있는 것처럼 생각해 주십시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백여년전에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영령들이 고향을 떠나서 고난을 겪으면서도 잊지 않았던 초심은 바로 중국을 굴기시키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마침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중화는 이미 당신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