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영정혁신(永貞革新): 당나라 중엽의 '이왕팔사마(二王八司馬)'사건

중은우시 2020. 2. 4. 12:54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이왕팔사마'사건은 당순종(唐順宗) 재위기간에 왕숙문(王叔文), 왕비(王伾)등이 이끄는 정치혁신운동을 가리킨다. 이왕팔사마중의 '이왕'은 바로 왕숙문, 왕비이고, '팔사마'는 위집의(韋執誼), 한태(韓泰), 진간(陳諫), 유종원(柳宗元), 유우석(劉禹錫), 한엽(韓曄), 능준(凌準), 정이(程異)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개혁에 실패한 후 모두 주사마(州司馬)로 좌천되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당나라는 안사(安史)의 난이후, 중앙은 지방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점차 번진할거(藩鎭割據)의 국면이 형성되었다. 당덕종(唐德宗)시기 번진할거의 형세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번진의 난은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건중4년(783년) 십월, 경원(涇原)의 병사들이 전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 주자(朱泚)를 주군으로 모시고, 대거 반란을 일으킨다. 당덕종은 어쩔 수 없이 봉천(奉天)으로 도망치고 다시 양주(梁州)로 갔다. 흥원원년(784년) 칠월, 비로소 장안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 후 장안은 여러번 번진들에게 포위당하여 위기에 빠진 도성이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어떻게 번진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집권을 재건할 것인지가 당왕조 군신들이 반드시 직면해야할 문제가 되었다.


'이왕팔사마'사건의 내용은 주로 이러하다: 환관의 병권을 회수하고, 번진발호를 제재하고, 탐관오리를 타격하고, 궁시(宮市), 오방소아(五坊小兒) 및 진봉(進奉)등 폐정을 혁파한다. 민간의 미납세금과 각종 잡세를 면제해주고, 덕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해달라는 등이다.


안사의 난이후, 군주는 신하를 믿지 못하여, 환관이 정치에 간여하게 된다. 당숙종(唐肅宗)때의 이보국(李輔國), 당대종(唐代宗)때의 정원진(程元振), 어조은(魚朝恩)은 모두 환관으로 병권을 장악하여, 권력이 더욱 커진다. 당덕종이 봉천으로 갔을 때 환관 두문장(竇文場), 곽선명(霍仙鳴)등은 호송에 공로가 있어, 장안으로 돌아온 후, 두사람이 신책중위(神策中尉)가 되어 환관이 금군(禁軍)을 지휘하고, 이것이 제도화된다. 이후 환관은 군권을 손에 넣었고, 거리낌이 없어지고, 정치간여가 더욱 심해진다. 이런 상황하에서 어떻게 환관세력을 억제하고, 국가군권을 회수할 것인지는 당나라때 군신들이 반드시 직면해야할 문제가 되었다.


정원21년(805년) 당순종의 지지하에, 왕숙문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고, 위집의를 재상으로 삼아 일련의 상벌을 분명히 하며, 가정(苛政)을 멈추고, 폐해를 제거하는 중앙정령을 반포한다. 궁시, 오방소아 및 진봉을 폐지하며 진전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역사에서는 '시리환호(市里喚呼)' '인정대열(人情大悅)'했다고 쓰고 있다.


권력을 집중하고,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왕숙문집단이 특별히 주족한 것은 재정권을 장악하는 것과 군권을 환관으로부터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우석과 관련이 있는 두우(杜佑)가 탁지사(度支使)와 제도염철전운사(諸道鹽鐵轉運使)를 겸직하게 하고, 왕숙문을 부사로 삼는다. 한엽, 진엽, 유우석, 능준은 사건처리를 하고, 이량(李諒)은 순관(巡官()이 되며, 정이는 양자원(揚子院)에 남아 있었다. 그중 서천절도사 위고(韋皋)는 검남산천을 완정히 장악하려고 기도하고 영지를 확대하려 했지만 그 음모는 성공하지 못한다. 왕숙문은 능준과 관련있는 숙장 범희조(范希朝)를 좌우신책, 경서제성진행영절도사로 임명하고, 한태를 그 행군사마로 임명하여, 환관으로부터 경서신책군의 병권을 접수하게 했다. 다만 환관집단의 강렬한 저항으로 병권탈취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얼마 후, 당순종이 중풍에 걸리고, 치료를 받은 후 벙어리가 된다. 그리하여 집정능력을 상실한다. 왕숙문은 모친의 사망으로 관례에 따라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모친상을 지낸다. 왕비도 돌연 중풍에 걸려, 혁신파는 중견역량을 잃게 된다.


환관 구문진(俱文珍), 유광기(劉光琦)등과 검남서천(지금의 사천성도)절도사 위고와 형남(지금의 호북 강릉)절도사 배균(裴鈞), 하동(지금의 산서태원남쪽)절도사 엄수(嚴綬)와 결탁하여 왕숙문집단에 항거하고, 신책군 장교들을 책동하여 범희조가 군권을 접수하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 그리고 암중으로 궁중정변을 획책한다; 환관 구문진등은 외번인 검남절도사, 위고, 형남절도사 배균, 하동절도사 엄수등과 연합하여 개혁파를 몰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속속 상소를 올려 당순종의 선양을 압박한다.


삼월에는 먼저 당순종을 압박하여 이순(李淳, 나중에 純으로 개명함)을 태자로 세우게 한다. 당순종이 병으로 말을 못하게된 후, 다시 환관과 번진의 격렬한 저항에 부닥쳐서 결국 8월에 황위를 넘겨주고, 연호를 '영정(永貞)'으로 고친다. 다음해 정월, 당순종 이송(李誦)은 사망한다. 당순중의 재위기간은 겨우 8개월이었다. 


역사에서 이 사건을 '이왕팔사마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순종의 재위기간의 연호가 '영정'이었으므로 이번 정치혁신운동을 '영정혁신'이라고도 부른다. 영정혁신이 실패했는데, 시행시기는 전후로 146일에 불과했다.


영정원년(805년) 팔월, 태자 이순이 즉위하니 그가 당헌종(唐憲宗)이다. 환관이 득세한 후, 왕숙문 왕비는 차례로 축출된다.


왕비는 개주사마(開州司馬)로 좌천되고 얼마후 병사한다; 왕숙문은 투주사호(渝州司戶)로 좌천되고 다음해에 사사(賜死)된다 ; 위집의는 애주사마(崖州司馬)로 좌천되고, 한태는 건주사마(虔州司馬)로, 진간은 태주사마(台州司馬)로, 유종원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유우석은 낭주사마(郎州司馬)로, 한엽은 요주사마(饒州司馬)로, 능준은 연주사마(連州司馬)로, 정이는 침주사마(郴州司馬)로 좌천된다. 이들 '팔사마' 이외에 육질(陸質)은 먼저 병사하고, 이경검(李京儉)은 상중이었고, 여온(呂溫)은 토번(吐蕃)에 사신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혁신운동에 참여하지 않아 좌천당하지 않았다. 왕숙문집단에서 지위가 비교적 중요한 이량, 이위(李位)는 조금후 조정에서 쫓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