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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소광염(蕭光琰): 비참한 최후를 맞은 "중국석유의 아버지"

by 중은우시 2018. 3. 5.

글: 진봉(陳峰)


오늘날 우리는 석유를 에너지로 하는 배, 자동차, 비행기를 하면서 육해공로를 다니고 있는데, 우리가 잊지 말하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중국석유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광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에게 '감사'해야할 때, 그는 일찌감치 세상에 없었다. 그와 그의 처, 딸은 모두 그 광퐁노도의 시대에 멸문의 화를 당했다.


1968년 12월 11일 소광염은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한 60일의 낮과 밤을 보냈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는데, 결국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다. 12월 13일, 소광염의 처인 견소휘(甄素輝)도 절망에 빠져 15살된 딸과 함께 수면제를 대량으로 복용하고 자살한다...


집안은 멸문당하고, 시신은 화장되었다. 37년이 지난 2005년에 비로소 나이 84세의 고령인 백개부(白介夫) 선생이 소광염의 상사이자 친구로서, <염황춘추>에 장편의 회고문을 쓴다: <나와 소광염의 쓴 우의>. 이 글로 '석유의 아버지' 소광염의 멸문진상은 세상에 드러난다.


소광염은 1920년 일본에서 출생한다. 조적은 복건성 복주시이고, 부친은 일찌기 중화민국주일대사관의 무관(중장)을 지냈다. 소광염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고, IQ가 뛰어났다. 학문과 연구를 할 보기드문 인재였다.


9살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의 3개국어를 할 수 있었고, 12살에 일본 최고의 중학교에 들어간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고, 항상 학교에서 성적은 선두권이었다. 나중에 그는 미국으로 이주한다. 1942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미국 포모나대학 화학과를 졸업한다. 그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유명한 제임스 프랑크교수에게 사사한다. 1945년 소광염은 시카고대학 물리화학박사학위를 받는다. 당시 나이가 25살이다. 1946년에는 시카괘학 화학과의 조교가 되고, 그후 미국 모빌석유회사의 화학엔지니어가 된다. 1949년, 모빌에서 세계최초의 고정상단백금촉매중정장치를 개발하는 전체 과정에 참여한다.


그는 노력과 재능으로, 연속하여 4개의 석유금장을 받는다. 나이 겨우 28살의 그는 이미 미국의 저명한 석유화학과학자가 되어 있었다.


소광염은 해외에서 태어나고, 해외에서 자라고, 해외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중국전통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고국에 대한 귀속감이 강했다. 그는 뼈속부터 중국인이었다. 1949년 가을, 소광염은 미국의 "중국과학공작자협회"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귀국의 열망이 불타오은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나 행동이 이어지게 된다. 금방 소광염은 중국정부에 편지를 써서 중국석유공업에서 어느 방면의 기술이 필요한지 물어본다. 답변을 들은 후, 그는 수천달러를 들여 복제설비를 구하고, 산처럼 쌓여있는 자료에서 필요한 자료를 골라 수집한다. 그리고는 기술자료를 복제하고 정리한다. 이렇게 꼬박 1년을 보낸다. 이를 위하여 그는 일체의 사교도 끊고, 수영, 테니스, 스케이팅, 스키등 좋아하는 운동도 그만둔다.


소광염의 처는 견소휘인데, 예쁘고 우아한 중국계였다. 부친은 일찌기 손중산의 비서를 지낸다. 그때 그들은 금방 결혼한 상태였다. 남편이 귀국하겠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잘 지낼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왜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국어도 못한다. 중국에 돌아겸 뭘 해야 하는가?" 소광염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네가 중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나만 먼저 돌아가겠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로서 가장 행운아인 것은 자기를 숭배하는 여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견소휘는 이 남자를 깊이 숭배했고, 그가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비록 본인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결정에 따르기로 한다.


소광염이 귀국하려 하자,미국에서는 여러가지로 막았다고 한다. 심지어 '국가기밀보호'를 이유로 그의 출국을 금지했다. 소광염은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여러 곡절을 거쳐 홍콩에 도착한다. 1950년 11월, 소광염은 대량의 자료와 도서를 가지고,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는 중국에 들어간다.


그의 뜻에 따라 그는 석유부에서 연구업무를 맡는다. 나중에 그는 대련화학물리연구소로 간다. 그가 가져온 자료는 전문가들이 정리하고 감정한다. 결론은 이들 자료는 아주 진귀하고 일거에 중국석유기술분야의 공백을 메워준다.


당시 중국석유기술은 아직 낙후되어 있었다. 심지어 어느 촉매제를 사용하여 제련하는지도 잘 몰랐다. 연구가 침체되어 있을 때, 소광염은 정확한 방안을 제공해 주었다. 백금중정기술을 채용하도록 지도한다. 1960년대, 중국은 이 기술을 이용하여 대형 생산장치를 세운다. 당시 중국공업전선의 '5개 황금화'중 하나로 불리던 신기술이다. 중국석유공업이 오늘날처럼 발전한데는 소광염이 큰 역할을 했다.


1964년, 대경유전이 항공유와 저응휘발류를 만들 때 기술적인 난점에 부닥치느데, 역시 소광염이 전화율이 높은 촉매제를 만들어 해결한다. 이어서 소광염이 이끄는 여러 과학연구성과가 세상에 나온다. 그는 말그대로 중국석유화학분야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1달의 급여는 겨우 120위안이었고, 움직일 때는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중국의 생활은 미국과 천양지차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5일, 소광염 생전의 두 동료이자 논문공저자인 이문쇠와 전이훤이 <소광염선생을 회고하다>라는 글을 쓴다. 이 글에서 소광염의 학술공헌을 다음과 같이 개괄했다: "소선생은 미국석유공업분야이 대학에서 과학연구를 한 실제업무경험과 넓은 전문지식ㅇㄹ 가지고 당시 대련화학물리연구소의 중요한 발전방향에 적극 투신한다. 석유가공과 석유화학학과의 창건업무를 했다. 그는 친히 촉매중합, 촉매열화 및 규산려고체산등의 연구과제를 개설하고 지도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초까지 전후로 학술논문 29편을 발표했다. 그는 중국의 석유촉매제연구분야의 선구자이다. 대련화학물리연구소가 국내 중요한 석유연구기지로 발전하는데 중대한 공헌을 했다."


소광염이 귀국한후 9개월도 지나지 않았을 때인 1951년, 지식분자에 대한 '사상개조'운동이 시작된다. 그는 '중점비판대상'에 오른다.


소광염이란 사람은 이상주의자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상주의는 과학에서 표현될 때는 과학에 헌신하는 것이고, 애국에서 표현될 때는 애국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를 전혀 몰랐다. 당시 소광염은 겨우 서른 살이 넘었는데, 초등학교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혈기방장했다. 한번은 비투회에서 그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비판내용을 듣고, 그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혁명대중을 앞에 두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껴 연경까지도 부숴버린다.


뜨거운 피에 차가운 물이 부어지는 순간이다. 소광염은 상심이 컸다. 그는 가족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따: 나는 조국을 사랑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했는데, 누가 알았으랴. 당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몰아낸다. 신중국에 나는 '실연'한 느낌이다. 생활의 중심과 균형을 잃은 것같다. 나는 앞날이 비관적이다." 이때부터 그는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심신이 모두 피곤하고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1956년, '사상개조'운동이 점점 약화된다. 유관부서의 고위층이 친히 소광염에게 말한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그에 대하여 나쁘게 쓰여 있던 사상감정자료를 고쳐준다. 소광염은 진정으로 이전의 억울한 일이 '오해라고 여기고 화를 완전히 푼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질책한다. 그는 실제행동으로 과거 5년간 성과가 없던 손실을 메우겠다고 말한다.


그는 죽어라 일을 하고, 그의 과학적인 두뇌는 다시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1년반동안, 그가 이끄는 과제팀은 15편의 논문보고를 완정한다. 그가 귀국후 계속하여 종사한 '세일석유촉매열화 및 그 질소중독의 기리연구"와 "전자산성촉매제연구"는 획기적 진전으로 인정받는다. 소광염이 연구에 매진한 이 시기는 그에게 '황금시대'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1958년부터 일어난 '발백기(拔白旗)"운동은 다시 한번 소광염은 인생의 밑바닥으로 몰아넣는다. "노백기-소광염'이라는 대자보가 복도에 붙는다. "너는 조국에 아무런 감정이 없다..." "네가 가져온 자료는 위로 기어올라가기 위한 것이다..." "너는 고액의 급여를 받고 몇년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다...네가 집행한 것은 양두구육이다. 이론만 높은 백기노선이다...."


이해 연말에 소광염은 화학물리연구소의 신년연환회에 참가한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되는데 제목이 <양박사현형기(洋博士現形記)>였다. 막이 열리면서 징소리가 들이고, 그의 특징을 묘사한 우스꽝스럽게 꾸민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본인은 소박사이며, 부모의 더러운 돈으로 미국에서 서양박사를 받았습니다. 듣기로 공산당이 중국에서 정권을 장악했다고 하여 나는 자료를 좀 훔쳐서 중국으로 굴러들어와서, 약간의 관직이라도 얻어볼까 하고...."


소광염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비분과 굴욕이 그를 휩싼다. 그는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건 좋지 않아. 아주 좋지 않아....사람을 놀리는 것은, 좋지 않아..."


그는 '개조'의 성의를 가지고 호소한다: 나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이런 개조방법은 가장 효과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 인격이 상하면 개조는 늦어진다. " 이 때부터 그는 업무에 의욕을 잃는다. 회의를 열면 귀퉁이에 앉아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불면에 시달린다. 어떤 사람은 걱정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소선생이 자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61년 중국의 지식인정책이 다시 바뀐다. 지식인회의에서 소광염은 울면서 호소한다: 저는 다시 40년을 더 살아서, 나의 여생을 당의 사업에 바치는 것이 최대의 행복입니다."


그는 여동생에게도 편지를 썼다: "나는 일찌기 당의 과학지도가 경험이 부족하여 약간의 결점과 손실이 있었다는 것을 안타까워 했었다. 다만, 나는 당의 지도가 경험으로 점차 과학업무의 규율을 알게 된다고 믿는다. 결점은 잠시이다. 한 과학자의 책임은 바로 전력을 다해서 당이 과학공작의 특징과 규율을 이해하도록 도우는 것이다."


분명히 당에 의해 참혹하게 당했으면서 반대로 당을 옹호한다. 이는 전형적인 '스톡홀름증후군'이다. 그 시대 지식분자의 통상적인 모습이다.


마음이 편해지면 어떤 약보다 낫다. 오랫동안 소광염을 과롭히던 불면증도 좋아진다. 그는 열정을 가지고 친우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부터 나는 더 이상 퇴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어라 일할 것이다." 그는 정말 죽어라 일했다. 전문과제팀의 업무외에 주말마다 청년들에게 강의하고, 회의에 참가했고, 설날에도 쉬지 않았다.


1964년, 소광염의 여동생이 북경에서 병사한다. 그가 보낸 전보회신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여생을 당의 과학연구사업에 바칠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귀국후의 여러가지 곡절도 견뎌냈지만, 문화대혁명은 마침내 소광염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1968년 10월 5일 저녁9시경, 화학물리연구소는 20명의 건장한 사내를 보낸다. '전정대(專政隊)이다. 이들은 무장을 하고 소광염을 집으로 가서, 병을 앓고 있던 소광염을 붙잡아 '우붕(牛棚)'에 넣는다. 동시에 소광염 집안의 모든 돈나가는 재물을 가져간다. 말이 가산몰수이지, 실제는 강탈이다. 강탈된 재물 중에는 견소휘의 부친이 그녀에게 남겨준 반지(전해지는 바로는 손중산이 그녀의 집안에 준 것이라고 한다)도 있다. 이것은 그들이 가져가서 팔아먹었기 때문에 행방이 불명이다.


엄중하고, 쉬지 않는 '심문'이 시작되었다. '군자가 비적을 만나면, 입밖에 없다' 지능이 높은 소광염이지만 '전정대'가 묻는 문제에는 도대체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소광염, 너는 미국에서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고, 살기도 잘 살았는데, 왜 귀국한 것이냐?" "너는 미국의 자료를 중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으니, 분명히 중국의 자료도 미국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라. 미제국주의자에게 얼마나 자료를 넘겨주었느냐?"


여전히 여려해전의 그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소광염은 이들에게 뭐라고 확실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정대'의 그에 대한 대우는 더 이상 회의나 통제가 아니었다. '삼각대'로 만든 형구로 맹렬하게 두드려 팼다. 소광염은 피와 살로 된 몸은 진정으로 무산계급전정의 무서움을 보게 된 것이다.


귀국하여 일한지 20년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생각해도 이런 대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순수한 애국심이 20년간 충분히 표현되지 않았단 말인가.


'전정대'의 한 노동자폭도는 소광염에게 '백시(白屎, 흰똥)'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대련사람은 '백'을 '박(博)'으로 읽기 때문에 박사는 이제 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조롱과 모욕에 피부가 찢어지는 고통속에 소광염은 26건의 '진술서'를 쓰게 된다.


그는 이런 황당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고, '전정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가족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그는 결심하다. 죽음으로 처및 딸과 완전히 선을 긋기로 한 것이다. 문혁때 많은 지식분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가족들에게 마지막 애정을 표현하곤 했다.


12월 10일밤, 다시 한번 엄중한 '심문'과 더욱 횽포한 구타가 시작된다. 12월 11일 새벽, '전정대원'이 그에게 일어나라고 하였지만, 더이상 일어날 수 없었다. 검시결과: 대량의 수면제복용이 사인이었다.


그러나 인간성이라고는 없는 '전정대'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반혁명특무분자 소광염은 죄를 지은 것이 겁이나서 자살했다. 이는 무산계급전정의 위대한 승리이다. 그는 '특대희신(特大喜訊)"으로 전체 연구소에 알리고, "승기를 잡아서 모든 계급의 적에 대하여 더욱 깊이 파헤치겠다"고 결정한다.


소광염은 자신이 떠나면 모든게 끝날 줄 ㅇ라았다. 처자식에게는 살 길이 열릴 줄 알았다.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은 그가 떠난 것이 겨우 버티고 있던 처와 딸에게는 치명적 일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소광염의 처인 견소휘는 영성자농장에게 노동개조를 받고 있었다. 소광염이 자살한 그날 오후, '전정대'는 그녀를 화학물리연구소로 데려온다. 그리고 그녀에게 엄속히 선언한다: '반혁명특무분자 소광염은 죄를 지어 겁을 먹고 자살했다. 그의 문제는 적대적인 성질이다. 너는 계속하여 진술해야 한다."


견소휘는 얼굴이 백짓창저럼 되었고, 눈에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남편의 시체를 한번 보고는 이틀의 휴가를 청한다. 집에 돌아와서 여러날동안 돌보지 못했던 아이를 돌보게 해달라고. 기괴한 것은 그녀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녀는 그날로 집에 돌아간다.


소광염과 견소휘의 사이에는 15살된 딸이 있었다. 이름은 소낙련(蕭洛蓮)이다. 중국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 초등학교때는 자신이 반도체로 라디오를 조립해서 들었다. 그녀는 친히 부모가 비판당하고, 욕먹고, 얻어맞는 것을 보면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흑오류, 홍오류'로 분류했다. 그녀는 당연히 '흑오류'에 속했고, 큰 압박을 받는다.


사람들은 견소휘 모녀가 다시 만난 후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견소휘가 집으로 돌아간 3일째 되는 날(12월 13일), 이웃은 그 집에서 아무런 동정이 없는 것을 보고는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문을 열었더니 모녀가 침대 위에 누워서 요를 덮고 있었다. 모친은 딸을 꼭 끌어안고 있었고, 이미 숨이 끊어진 뒤었다.


죽기 하루 전날, 소낙련은 자신의 사진을 친구에게 주었다고 한다. '영원한 기념으로 남긴다."


소광염의 일가족 3명은 3일내에 연이어 자살했다. 사람을 죽이 죄악이 '전정대'에게는 '휘황한 전적'이 되었다. 그들은 상급에 이를 전적으로 보고하고, '계속 깊이 파헤치겠다'고 결정한다. 대련화학물리연구소, 대련해운학원, 대련운수공사, 대련부산(婦産)의원으로 구성된 연합전안조는 소광염을 중심으로 한 '특무집단사건'을 대형사건으로 취급하며 안팎으로 조사한다. 그리고 11개 단위의 26명이 연루된다. 그 중에는 어린 소낙련을 돌봐준 이웃집부부, 소광염과 열대어를 교환한 적이 있는 이발사, 소광염에게 주사를 놓은 적이 있는 간호사등도 포함되었다. '전정대'는 이를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승리'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특무집단'을 파헤치기만 하면 바로 '특대승리'였다. 대련화학물리연구소는 중앙문혁영도소조로부터 중요시되고, 모원신이 친히 '전형'이 되어 '노동자계급이 과학연구부문을 점령한' 살아있는 모범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인민일보>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