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충이관풍월(䖝二關風月), 인수실무심(因受實無心)
태산은 관광명소이다. 매번 명절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발디딜 틈조차 없어진다. 오악(五嶽)의 으뜸으로서 태산의 명성은 예로부터 대단하다. 태산은 고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린 봉선(封禪)의 장소로서, 천하의 경건한 향객들이 향을 올리고 축원을 드리는데 가장 먼저 손꼽는 곳이기도 하다.
문화예술로서, 태산석각(泰山石刻)은 중국의 서예사를 관통한다. 비각제명(碑刻題名)이 많기로는 중국명산들 중에서 으뜸이다. 자연스러운 서예전람장소가 되었으니 실로 중화일절(中華一絶)이라 할 만하다. 태산 만선루(萬仙樓) 북쪽의 돌아가는 길의 서쪽, 두모궁(斗母宮)에서 약간 남쪽에도 마애석각(磨崖石刻)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충이(䖝二)"라고 두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언뜻 보기에도 독특한 글이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글자가 새겨진 시기는 상대적으로 다른 석각들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시기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다. 청나라 광서연간 제남재자(濟南才子)인 유정계(劉廷桂)가 쓴 글이다. 태산칠십이경중 하나로 꼽힌다. 기실 이 두 글자는 문자유희이다. 이 두글자의 뜻은 '풍월무변(風月無邊)"이라는 뜻이다. 풍자와 월자의 변을 둘러싼 것을 벗겨내고나면 남는 것이 '충이'이므로, 풍월이 끝이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풍월은 경치, 풍류, 남녀간의 애정이라는 뜻이다.
이 두 글자는 당시 건륭제가 항주 서호이 호심정(湖心亭)에 새겨서, 서호의 풍월무변을 찬송한 것이다. 이곳에 이런 글을 써놓은 건 아주 적절하다. 그러나, 태산은 장엄한 장소인데, 이런 글을 남기는게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기실 이 유수재가 이 두 글자를 써놓은 것은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태산고자'를 풍자하기 위함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는 '인수(因受)''라는 두 글자도 썼는데, 그것은 바로 '충이(䖝二)'와 같은 의미로, '은애우심(運愛無心)' 사랑에 마음이 없다는 듯이다. 그러나 '인수' 두 글자는 지금 어디에 써놓았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저 전해지는 바라고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자(姑子)'는 불가의 니고(尼姑), 즉 비구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도가의 도고(道姑)를 가리킨다. 태산은 도가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성한 곳과 풍월 화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청나라때, 이곳은 중국의 4대색정장소(色情場所)중 하나였다. 명칭은 '태산고자'였다. 옛날의 청정하고 신성한 장소가 더러운 풍류의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춘추시기 관중이 창기업(娼妓業)을 국유화한 이후, 관영과 사영의 기녀업은 계속하여 경쟁관계였다. 그러나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는 주류가치관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관중이 국유화한 이후에도 여전히 사영의 기녀들이 흥성했다. 관영의 군기(軍妓), 영기(營妓), 관기(官妓)는 어쨌든 강제적인 면이 있는 것이고, 겉으로 드러내서 자랑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창기업은 역대왕조에서 모두 정당한 직업으로 인정받아 왔다. 정식의 영업허가증을 발금했다. 명,청 두 왕조때는 경사(京師)와 금릉(金陵)같은 고도에서 창기업이 흥성했을 뿐아니라, 지방에서도 4대분파가 나타난다. 즉 양주수마(揚州瘦馬), 대동파이(大同婆姨), 서호선낭(西湖船娘)과 태산고자이다. 춘날, 추국처럼 각자 뛰어난 점을 지니고, 2개는 남방, 2개는 북방에서 서로 대응하며 활성화되었다.
태산고자를 얘기하자면, 이는 실로 특이한 존재이다. 도고로서 당연히 독수청등(獨守靑燈)하며, 마음수양을 하는 것이 본분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화류와 관련을 맺게 되었을까?
이것은 태산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산은 진시황이 봉선한 이후, 지위가 계속 올라갔고, 오악의 으뜸일 뿐아니라, 천하에서 유명한 도교의 명산이 되었다.
명산이다보니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자연히 아주 많아진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자 장사도 늘어난다. 그리하여, 태산의 자락에는 각종 점포가 줄줄이 들어서게 된다. 이어서 먹고 마시고 노는 것도 따라온다. 그러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풍류장소도 빠질 수 없다.
산 속에 있는 도관(道觀)이 자금원은 향객(香客)들이 바치는 '향화전(香火錢)'이다. 그러나 이들 향객들이 산아래에서는 훨씬 시원시원스럽다. 산에 올라가서는 그저 한두푼 동전을 던지고, 그후에 산을 내려가서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끌어안고 노는 것이다.
산 아래에 세워지는 건물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종사하는 인원들도 점점 많아진다. 많은 향객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고, 이들 '경건'한 향객들중에는 도관을 찾아가는 것은 그저 핑계이고, 실은 이곳에 와서 놀기 위해 오는 것이다. 밤이 되면 산아래는 홍등이 높게 걸리고, 산 위는 적막해진다. 둘을 비고하면 실로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산 속의 사원의 향불이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도관의 장문인은 머리를 굴리고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그리고는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자신의 자원우세를 이용하여, 산아래에서 돈을 쓰는 향객들이 다시 자신들의 '공덕상자' 속에 돈을 넣도록 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돈을 빌려서 도관을 새로 인테리어하여 면모를 일신한다. 대당의 뒤에는 청아하고 멋있는 소옥(小屋)을 짓는다. 그리고 뛰어난 요리사도 구해와서 좋은 술과 좋은 음식을 준비한다. 옛날에는 그저 장중하고 엄숙한 도고의 암자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 향불을 피우고, 소망을 빌고, 투숙하고, 먹고 마시고, 놀기까지 할 수 있는 원스탑 소비장소로 만들어 버린다.
주인공에 대하여는 주지들도 머리를 짜낸다. 그녀들은 먼저 30세이하의 도고들에게 다시 머리를 기르도록 하고, 시사가부, 악기와 노래를 가르킨다. 전문가를 불러서 그녀글에게 화장을 시키고, 눈빛을 주고 눈썹을 찡그리는 쪽으로도도 공부를 시킨다. 또한 연회석에서 어떻게 술을 따르고 재미있게 하는지, 그리고 침대에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등의 기본적인 것들도 가르친다.
이뿐아니라, 여자들이 입을 옷을 큰 돈을 들여서 제남에서 유명한 재봉사들을 모신다. 그리하여, 이들을 위해 "정갈치군(精葛緇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도복(道服)을 제작한다. 이 정갈치군이 어떤 모양인지에 대하여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전해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명칭으로 볼 때 검은색의 치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이처럼 고급스럽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했으니, 성공하지 못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원래 산에 올라와서 경치나 구경하던 향화객들은 도관에 들어서자 마자 깜짝 놀란다. 농염하게 화장을 한 도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술도 마시고 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미녀와 함께. 다시 산을 내려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원래 젊은 나이에 적막하게 지내던 도고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남성들과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광명정대하게 오래 묵혀온 욕정을 배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연히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되고, 고품질의 서비스로 고객들의 호평을 받아낸다.
이렇게 되니, 소문이 금방 퍼져나간다. 많은 남자들이 그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돈을 들고 도관을 찾게 된다. 마침내 속되지 않은 아이디어에 정교한 운영까지 겹치면서 태산도관은 산아래에 있는 여러 유명한 기원들을 제치고 명성을 떨치게 된다.
물이희위귀(物以稀爲貴). 물건은 희귀해야 비싸다. 이렇게 남다른 태산고자는 공급이 수요를 따를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몸값이 계속 치솟는다. 평범한 연회에는 5냥이 필요한데, 욤모가 보통인 태산고자가 술을 따르면 가격은 배로 오른다. 물가가 경사의 고급기원들과 같은 수준이 된다.
상전은 격렬하다. 산아래의 기원이 어찌 돈을 모두 가짜 도고들에게 빼앗길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녀들도 따라하기 시작한다. 원래의 화려한 의복은 쳐박아 놓고, 화려한 누각은 다시 도관건물로 개조한다. 원래 연지곤지 바르고 있던 기녀들은 졸지에 검은 색의 도포를 입은 도고로 변신한다. 당연히 '정갈치군'까지도 그대로 쓴다. 짝퉁인 것이다.
산아래가 이러하니, 산 위에서도 전력을 다하여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규모를 확대한다. 사람이 모자라자, 아예 예쁜 기녀들을 모집한다. 그리고 산으로 데려가서 가짜도고를 만들어 더 많은 손님들을 끌어들인다.
산아래는 어찌되었건 산속처럼 정통은 아니다. 산 속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태산의 두모궁(斗姥宮)이다. 그러나 전체 태산지역의 기원은 이미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제대로 된 곳과 짝퉁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진정한 '태산고자'의 맛을 보려면 산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상전이 날로 치열해 지면서, 산위, 산아래의 규모는 날로 확대된다. 명성도 더욱 커진다. 심지어 임대업무까지 나타난다. 당시 진상(晋商, 산서상인)이 전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번 이들이 천하를 돌아다닐 때면 곁에 '태산고자'를 데려고 가는 것이 운치있는 일이었다.
'태산고자'는 명청시기 4대지방기녀집단중 하나이다. 일찌기 전국을 풍미했다. 이들은 종교의 겉옷을 걸치고, 당당하게 도관을 기원으로 바꾸었다. 이를 보뎜 당시의 사회기풍이 얼마나 문란했는지 알 수 있다. 정국의 혼란과 법제의 혼란도 반영한다. 이는 전체 청왕조가 쇠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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