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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황치판(黃奇帆): 충칭 '육조원로(六朝元老)'

by 중은우시 2020. 8. 24.

글: 청평(靑萍)

 

최근, 충칭시장과 중국전인대 재경위 부주임을 역임한 황치판이 본인의 저서 <구조성개혁: 중국경제의 문제와 대책>을 출판했다. 그는 스스로 "시장은 직무이고, 경제학연구는 종신직이다."

 

나이가 칠순에 이른 이 정치인물은 이미 관직에서 물러났고, 충칭의 "육조원로", "정계의 오뚜기"는 모두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여러 차례의 정치적 동탕을 겪은 황치판은 그의 '초심'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황치판의 과거: 상이우즉사(商而優則仕)

 

1968년은 황치판에게 첫번째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나이 16살의 황치판은 문화대혁명의 충격으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의 상하이시 코크스(焦化)공장 코크스로의 보통노동자가 된다. 일을 잘 했기 때문에, 그는 추천을 받아 1974년 상해이공대학(전 상해기계학원) 측정기기학과 자동화측정기기전공으로 공부를 한다. 1977년 대학졸업후, 황치판은 코크스공장으로 돌아가서 설비과의 기술자가 된다. 나중에 다시 보조엔지니어, 엔지니어, 부공장장으로 승진한다. 1983년 12월 황치판은 '상이우즉사'로 상하이시 당정기관으로 옮겨 일하기 시작한다. 이는 황치판에게 두번째 인상의 전환점이었다.

 

황치판이 상하이시 코크스공장에서 일한 기간은 합쳐서 12년이다. 이는 황치판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문혁에서 개혁개방에 이르는 중국역사의 전환점이 포함된다. 그는 일도 잘 모르고, 서먹서먹해하던 것에서 점점 이성적으로 성숙한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좋은 청년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상하이 정계에 들어간 후, 황치판은 경제위원회 종합기획실 부주임, 시 경제자문센터 주임, 푸동개발판공실 부주임, 푸동신구 관리위원회 부주임등의 직위를 맡는다. 더더구나 상하이 시위 부비서장과 시정부 비서장의 이중직무를 겸직하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 황치판은 다시 공부하여 공상관리(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황치판의 세번째 인생전환점은 2001년 10월이다. 그는 33년간 일하고 공부했던 상하이를 떠나, 부시장의 신분으로 장장중상류의 직할시 충칭으로 간다.

 

황치판은 충칭에서 16년간 재직한다. 2000년 시장에 오른 이후 그는 관료사회에서 자신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다. 전인대의 2선으로 은퇴할 때까지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한다. 이 기간동안 충칭의 '일인자' 즉 성위서기는 전후로 6번이나 바뀐다. 각각 허궈창(賀國强), 황진둥(黃鎭東), 왕양(王洋), 보시라이(薄熙來), 장더장(張德江)과 쑨정차이(孫政才)이다. 황치판의 '육조원로'라는 별호는 여기서 얻은 것이다.

 

'육조원로'라는 말은 약간 폄하하는 별호라면, 또 다른 별호인 '정계 오뚜기'라는 말은 분명히 칭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별호를 얻게 된 것은 주로 황치판은 보시라이, 쑨정차이 두 사람이 모두 임기중에 낙마했지만, 살아남았기때문이다. 그중 보시라이사건은 전국을 뒤흐들었고, 시국은 이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었다. 충칭의 관료사회는 더더구나 모조리 교체된다. 다만, 황치판은 혼자서 살아남았고, 시장의 직위를 계속하여 유지했다.

 

이는 황치판의 인생에서 네번째 전환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보시라이와 함게 정계의 스타로 불리던 '60후' 쑨정차이도 '6가지 죄'를 저질렀더는 이유로 2017년 면직된다. 그래도 황치판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베이징으로 들어가 요직을 맡을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2017년 2월, 황치판은 확실히 베이징으로 간다. 그러나, '2선'으로 인식되는 전인대의 직위를 맡는다. 그는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을 맡은 것이다. 2018년 3월에는 해당위원회의 위원이 교체되면서, 황치판의 이름은 빠지게 된다. 이는 황치판이 정식 은퇴하였음을 의미한다.

 

정계 일선은 떠났지만, 경제분야에서 자주 대책을 건의한다.

 

황치판은 2017년 충칭을 떠나고, 자연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같았다. 아마도 이것이 황치판 인생의 다섯번째 전환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있어서 더 이상 충칭시장을 맡지 않게 되자, 시야를 충칭에서 중국전역으로 확대한다. 국가경제, 금융에 대하여 거시적인 측면에서의 의견과 건의를 내놓는다. 그리고 외부에서는 그를 '중국에서 금융을 가장 잘아는 시장'이라고 불렸던 그의 경험과 견해를 직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전인대로 옮긴 후에도 황치판은 쉬지를 않았다.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남을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정치, 경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그다지 없는 일부 활동에도 참가한다.

 

예를 들어, 2017년 7월, 황치판은 장쑤 난통에서 3시간에 걸친 보고회를 갖는다. 보고의 주요내용은 경제대세였다. 그중 하나의 중점은 지방정부가 어떻게 투자를 유치하느냐였다. 그러나 외부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가 충칭시장으로 있을 때의 옛이야기였다.

 

전인대를 떠난 후,황치판의 모습은 더욱 자주 보였다. 예를 들어, 중국매체가 2019년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황치판은 2018년 중국전인대 재경위원회에서 이직한 후, 1년동안 참가한 포럼과 공개강연이 16회를 넘었다고 한다. 장소도 베이징, 상하이, 선전, 선양등지에 걸쳐 있다. 강연주제는 대부분 금융시장과 관련이 있었다.

 

그가 내놓은 의견은 왕왕 여론에 불을 붙였다. "P2P의 본질은 고리대금업이 인터넷에서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이다" "지방부동산시장의 높은 레버리지를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금융재난이다." "(증감회개혁)의 순서가 잘못되었다. 좋은 패를 가지고서도 잃게 되었다." "부동산세는 당연히 거두어야 한다." "재정부와 중앙은행의 2원적 외환관리구조가 중앙은행의 독립관리보다 더욱 좋다"등등

 

황치판은 충칭에서 재직할 때의 조심스럽고 신중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대담한 발언을 하여 여론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특히 중앙은행과는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황치판은 당시 중앙은행의 독립외환관리에 이견을 발표한 후, 그 자리에 참석했던 중앙은행연구국의 국장 쉬중리(徐忠立)에게 직접적으로 반박을 당했다고 한다: "황시장(당시는 이미 시장직을 떠난 이후였다)이 말씀하신 논리는 듣기에 아주 아름답지만, 현실은 앙상합니다."

 

기실 황치판은 중국은행업의 문제에 계속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나타냈었다. 일찌기 2012년 3월 중국양회때 당시 충칭시장을 맡고 있던 화이판은 중국은행계를 비판한 바 있다: "우리의 은행은 세계의 다른 은행보다 그냥 1조를 가져간다! 이런 편법적인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는 안된다. 은행은 가볍게 안정적인 이윤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

 

그외에 2016년 2월, 당시 중앙은행 행장으로 있던 저우샤오촨(周小川)이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행장회의에서 명확히 '개인주택에 레버리지를 증가시킨다"는 것을 지지했다. 며칠 후 당시 여전히 충칭시장으로 있던 황치판은 바로 반대의견을 내놓는다. "만일 현재 일부지방의 부동산 하이레버리지를 그냥 방치하면, 반드시 금융재난이 올 것이다." 얼마후 한 기자가 저우샤오촨에게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른 점에 대하여 물었는데, 저우샤오촨은 그냥 웃고 넘어간다.

 

그러나, 2018년 부동산시장의 레버리지축소와 P2P지뢰까지, 그리고  다시 2020년의 정부에서 부동산세 입법까지, 그리고 중국총리 리커차이 은행에 1.5조위안의 이익을 양보하라는 요구까지, 마치 황치판의 중국경제에 대한 인식이 하나하나 맞아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같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황치판이 '육조원로' '정계오뚜기'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인 듯하다. 그리고 2013년 11월 중공 18기 3중전회전에 당시 후베이성위서기 리홍중(李鴻忠)과 함께 지방고관으로서 3중전회 <결정>문건을 초안하는데 참여한 단 2명중 한 명이 된 원인일 것이다.

 

외부에서는 오랫동안 황치판을 저평가하고 오해했던 것같다. 그렇다면 황치판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경제를 알면서, 행정조치에 능숙한 인물": 저평가된 황치판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가 반반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황치판은 2010년 양회기간 매체에 자신과 보시라이는 "여어득수(如魚得水, 물만난 고기같다)", "아주 힘이 난다"고 한 바 있다. 그후 보시라이가 낙마하면서 신속히 태도를 바꾼다. "중앙의 왕리쥔사건에 대한 처리를 견결히 옹호하고, 중앙의 충칭시위 주요지도자의 조정을 옹호하고, 정치를 중시하며, 대국을 고려해야 한다"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카멜레온이라 불렸다. 당연히 정치인으로서, 명을 받아 일처리를 하고, 법규를 지키고, 대국을 유지하는 것은 관료로서의 통상적인 업무형태이다. 아마도 비난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경제분야에서 그는 아마도 걸출한 인재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황치판은 경제를 알면서도 행정조작에 능숙한 관리'이다. 그는 정력이 넘치고, 경륜이 쌓여 있으며, 경제수치에 대하여는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다. 그는 왕왕 몇시간을 얘기하면서도 원고를 보지 않는다. 생각이 분명하고, 논리는 엄밀하고, 인용하는 수치가 아주 많지만 잘못된 것은 거의 없다.

 

2018년 12월 29일, 중국의 저명한 기업가 동밍주(董明珠)가 제17기 중국경제포럼에서 황치판을 소개한다: "나는 그와 국수를 한 그릇 같이 먹은 적이 있다. 국수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말을 아주 잘했다. 경제에 대하여는 독보적인 견해가 있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나는 말 한마디고 끼어들지 못했다." 중국경제학자 장오상(張五常)은 그가 쓴 <황치판의 발전사고로 말하는 중국의 부의 축적>이라는 글에서 2012년 8월, 자신은 황치판과 한 프로젝트를 참관했는데, "도중에 그는 4시간동안 쉬지 않고 설명했다. 주로 그가 말했고, 나는 들었다. 그의 사고는 정치하고 엄밀했으며 잘 조직되어 있었고, 숫자도 시스템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황치판이 시장을 맡고 있던 동안, 충칭의 GDP증가속도는 연속 여러해동안 전국에서 선두를 달린다. 보시라이사건을 겪었지만, 충칭의 경제형세는 여전히 괜찮았다. 시종 증가속도 1위의 보좌를 유지했다. 황치판의 공로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쑨정차이가 낙마할 때의 '6가지 죄'중에 한가지는 "용라무위(庸懶無爲, 평범하고 나태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치판이 떠난 후 충칭의 경제증가속도는 하락한다. 아마 이것도 황치산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황치산은 소비라이, 쑨정차이의 낙마라는 두 차례의 정치홍역을 겪었지만 시종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는 황치판이 이들과 그다지 많이 얽히지 않았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황치판이 충칭을 다스리는 능력은 중앙에서도 인정했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어떤 소식에 따르면,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이 황치판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고 한다: "치판아. 쉽지 않았겠다(奇帆啊, 不容易)"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상하게 볼 일도 아니다.

 

2015년 10월, 당시 중국발개위주임을 맡고 있던 쉬샤오스(徐紹史)가 인원을 이끌고 충칭으로 와서 조샤연구를 했다. 충칭시장인 황치판이 계속 안내했다. 쉬샤오스는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조사연구는, 정리하기 위함이다. 충칭경험을 종합하는 것이다" 그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관료사회에서 한 때 '충칭모델'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충칭모델이 끝난 후의 충칭경험에는 분명히 황치판의 역할과 공로가 적지 않을 것이다.

 

2020년 8월, 황치판은 자신의 새 책을 소개하면서 그는 공급분야의 구조개혁에 대한 인식과 사고의 3단계를 설명한다. "자행이부자지(自行而不自知, 행동은 하지만 알지는 못한다), 자지이부자각(自知而不自覺, 알기는 하지만 깨닫지는 못한다), 자각이차자신(自覺而且自信, 깨닫기도 하고 자신도 가진다). 이 삼단계는 아마 그가 자신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요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