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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정권붕괴 (1) : 가이다르 <제국의 붕괴>

by 중은우시 2020. 8. 8.

글: 전원(田園)

 

소련은 어떻게 붕괴되었는가? 중공의 견해는 이러하다: 소련은 원래 괜찮았다. 그런데 고르바초프, 옐친같은 혁명의지를 상실한 배신자가 나타나서, 자산계급자유화를 꾀했고, 그래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를 죽여버렸다. 그러므로, 중국이 얻은 결론은 이러하다. 서방의 화평연변(和平演變)을 반대하고, 총부리를 확실히 장악하면, 중공의 홍색강산은 영원할 것이다.

 

기실, 중공은 소련이 붕괴한 진정한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폭력으로 유지하는 제국은 반드시 해체된다. 이는 인류 국가형태의 필연적인 철칙이다. 고대의 대륙에서 영토를 확장한 제국이건, 대항해시대의 식민제국이건 마찬가지이다. 만일 폭력에 의해서만 통치를 지속할 수 있다면, 지중해는 여전히 로마제국의 내해였을 것이고, 영국은 아직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일 것이다. 중공의 말은 그저 감추고 싶은 것일 뿐이다. 소련이 붕괴되었다. 그들이 믿었던 공산주의는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등 뒤에서 칼로 찔렀던 것일까? 중국은 절대로 공산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공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속죄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공의 지도자들이 소련해체때, 전체 소련공산당원중에 "사나이가 한 명도 없다"고 조롱했던 원인이다. 그 의미는, 만일 당시 누군가 기개가 있는 사람이 앞장서서 주먹을 휘둘렀다면, 소련은 그렇게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소련으로 존재하던 마지막 1달동안, 소련공산당의 강경파들은 8.19정변을 일으켜, 고르바초프등 '반동파'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소련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었다. 군대의 강경파가 지원했지만, 탱크, 대포와 AK47소총이 있었지만, 일부 군인은 민중이 저항하면 피로 씻겠다고 장담했지만, 이 유혈정변은 코미디같이 용두사미로 끝나버린다. 정변의 우두머리들조차도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명령이 먹히지 않는지? 5일후, 우크라니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소련해체의 서막이 열렸다. 소련이 무너진 것은 아무도 그것을 막기 위해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가이다르가 <제국의 붕괴>라는 책에서 밝힌 것이다. 그는 소련해체의 과정을 목격했고, 러시아로 전환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는 전소련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이것은 중공의 어느 우두머리가 취득한 법학박사보다는 훨씬 제대로된 것이다), 1991년 소련공산당을 탈당하고, 1992년 러시아연방정부의 대리총리가 된다. 다음 해에는 러시아연방부장회의 제1부주석이 되고, 나중에 러시아전환경제연구소를 이끌기도 했다.

 

가이다르는 이렇게 생각한다. 소련의 붕괴는 겉으로 보기에 우연인 것같지만, 기실 도화선은 건립때부터 묻혀 있었다. 폭력으로 유지하는 독재체제, 공유제, 집단화와 인권에 대한 무시는 금방 도살, 기근, 결핍경제, 저생산율과 자원분배실패로 이어졌다. 외부세력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소련공산당은 그저 크메르루즈의 폴포트가 걸었던 길을 걸어야 했을 것이고, 나쁜 짓을 다 하고 난 후 잠깐 존재했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은 소련공산당에 숨을 쉴 기회와 합법의 겉옷을 입게 해주었다. 다만, 1950년대중반에 이르러, 2차세계대전의 강심제가 효용을 다했다. 후르시초프는 부득이 스탈린을 버린다. 거의 모든 폭력행위의 책임을 그에게 떠넘긴다. 그렇게 하여 아무런 부담없이 새로 시작하려 한다. 소련공산당의 이데올로기를 건드릴 수 없는 개혁은 적폐를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많은 폐단을 만들어내게 된다. 소련은 큰 배가 모래사장에 올라간 것처럼 마력을 올려도 곤경을 벗어날 수 없다.

 

그때, 소련은 두번째 기회를 맞이한다. 석유위기. 1973년 제1차위기대 산유국은 서방에 석유금수를 시행한다. 유가가 2년만에 거의 4배나 오른다. 6년이후, 제2차위기가 발발한다. 유가가 다시 2배이상 올라간다. 소련은 석유수출을 통하여 큰 돈을 번다.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돌연 발견하게 된다. 원래 하늘의 도움만으로도, 개혁을 통하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왜 개혁하려고 애를 쓴단 말인가? 산업을 업그레이드하고 산업을 전환할 필요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소련은 돌연 '대국굴기'라고 느낀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을 침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은 돌고 도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가는 계속 하락했고, 소련공산당을 유지시켜주던 석유달러가 고갈되어 버린다. 고르바초프가 취임할 때 소련은 이미 산궁수진(山窮水盡), 좌곤수성(坐困愁城)의 상태였다. 이제는 '수성(守城)'마저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당시 소련에서 떠돌던 우스개는 상당히 정확하게 그 사망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소련지도자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돌연 철궤가 끝나서, 기차가 설 수밖에 없었다. 레닌은 이렇게 호소한다: "인민들에게 토요일 의무노동을 시켜서, 철도를 수리하고, 공산주의로 향해서 나가자!" 스탈린은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교통부는 모조리 굴라크(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고, 다시 죄수 10만명을 데려와라. 철도를 수리하지 못하면 모조리 총살시켜라!" 후르시초프는 가죽신발로 치면서 소리친다: 뒤쪽의 철로를 뜯어서 앞으로 옮겨라. 기차는 계속 가야 한다!" 브레즈네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괜찮다. 우리는 제 자리에 앉아서 몸을 약간 흔들면서 기차가 잘 가는 것처럼 하고 있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고르바초프가 약간 생각하고서는 말한다: "기차를 일단 해체해라. 앞에 철로가 나오면 다시 조립해서 몰고 가자!" 그렇게 소련은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때의 고르바초프는 정말로 소련을 해체하고, 소련공산당을 해산하고, 자신의 직위를 포기하고 싶었을까? 아니다. 그의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결과이다. 소련은 당시 얼마나 곤란했을까? 가이다르는 책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당시 소련지도자는 정치거래로 자금을 얻고자 했다. 예를 들어, 한국과 수교하면서 겨우 30억달러의 대출을 받아냈다. 예를 들어, 허리를 숙이면서 쿠웨이트같은 소국에도 약간의 자금을 부탁했다. 소련정부는 외환을 긁어모으기 위해 기업과 국민들이 대외경제은행에 예금한 외환까지 모조리 가져다 썼다. 그중에는 고르바초프 본인의 것도 있었다.(그 은행은 얼마후 파산을 선언한다). 서방에 대출을 받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대표를 보내어 G7으로 하여금 자신이 1991년 런던에서 거행되는 G7정상회담에 참가할 수 있도록 초청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존(당시 영국수상은 존 메이저였다), 부탁합니다!"였다. 고르바초프가 G7정상회담에 참가하려 했던 이유는 대출을 좀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간다.

 

민생도 마찬가지로 도탄에 빠졌다. 가이다르는 이런 사례를 기록했다. 1991년 3월말, 고르바초프의 대외정책고문이었던 아나톨리 체르미야에프는 병석에 누운 친척을 위해 빵을 사려고 했다. 그와 친구는 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다 돌아다녔지만 살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체르미야에프는 적어도 차관급이다. 만일 호시절이면 절대로 특공(特供)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빵가게조차 문을 걸어닫았거나, 아무 것도 없었다. 체르미야에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사정은 모스크바가 가장 기아에 시달리던 시대에도 겪지 않았던 일이다.

 

소련인들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혹은 오직 하나의 선택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소련공산당을 포기하는 것이다. 누구 다른 사람이 취임했더라도, 결과는 모스크바에서 빵한조각 살 수 없었던 것보다 별로 나은게 없었을 것이다. "십사만인제해갑(十四萬人齊解甲)"은 사나이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소련공산당의 진면목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정권의 명령을 목숨을 걸고 따를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