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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 후경(侯景)의 황제몽(皇帝夢)

by 중은우시 2023. 6. 13.

글: 진량(陳良)

 

남북조시기는 중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남조(南朝)는 차례로 송(宋), 제(齊), 양(梁), 진(陳)으로 이어지고, 북조(北朝)는 차례로 북위(北魏), 동위(東魏)와 서위(西魏),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이다. 이 시기는 이전의 동진(東晋),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을 포함하여, 왕조교체가 아주 빈번했고, 적지 않은 강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힘만 있으면 제왕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성두변환대왕기(城頭變幻大王旗)", "강산대유황제출(江山代有皇帝出), 각령풍소약간년(各領風騷若干年)"이었다. 

 

진승(陳勝)이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고 말한 것처럼 특히 난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황제몽을 꿈꾸었던가? 후경(侯景)이라는 사람은 그런 꿈을 꾸었을 뿐아니라 며칠간 황제를 지내기도 했었다. 역사에서 비록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그는 용상에 앉았고, 어쨌든 황제의 맛을 보았던 사람이다.

 

큰 나무 아래에 있으면 시원하다.

 

후경(503-552), 선비화한 갈(羯)인이다. 북위 회삭진(懷朔鎭, 지금의 내몽골 고양 남쪽)에서 태어났다. 사료를 보면, 그의 집안은 보통이고, 위로 7,8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유명한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어렸을 때, 그는 성격이 사나운 아이였다. 자주 사고를 일으켰고, 사람들이 싫어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는 마찬가지 성격이었다. 게다가 키가 왜소하고, 왼발은 태어나면서부터 혹이 있어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순전히 용모가 형편없는 '루저'였다. '고수부(高帥富, 키크고 잘생기고 돈많은 남자)'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다만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변방지역의 용맹하고 싸우기 좋아하는 기풍의 영향을 받아 용맹하고 힘이 셌다. 난세에 태어났으니 그런 재주를 지녔다는 것은 세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아무런 배경이 없는 '루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가기가 어렵다. 뭔가를 해내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격이 교활한 후경은 자연히 그런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인물에게 빌붙었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광명대로를 걸어올라갔다.  후경은 일찌기 군대에 들어가서, 일반병사에서 시작하여 점점 승진하여 공조사(功曹史)까지 오른다. 당시 북위에는 이주영(爾朱榮)이라는 효웅이 있었다. 그는 전투를 잘하는 부락수령이었다. 북위 무태원년(528년) 사월, 이주영은 북위의 효명제(孝明帝) 원후(元詡)가 영태후(靈太后)에게 독살당한 것을 기회로 삼아,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쳐들어가서, 영태후와 영태후가 세운 어린 황제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공경사(公卿士) 이천여명을 하음(河陰)에서 죽이고, 팽성왕(彭城王)의 아들 장락왕(長樂王) 자유(子攸)를 황제로 올리니 그가 효장제(孝莊帝)이다. 효장제는 이주영을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대장군(大將軍),태원왕(太原王)에 봉하고, 북위의 군정대권은 모조리 이주영이 장악한다. 이주영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고, 각지의 호족들이 속속 그에게 귀부(歸附)한다. 후경도 바람부는대로 흘러갔다.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이주영에 귀부한다.

 

북위의 말기에 정치는 극히 부패한다. 국내의 각부족이 속속 들고 일어나 선비족의 통치에 반항한다. 먼저 육진기의(六鎭起義)가 일어나고, 이어서 하북민변(河北民變)이 발생한다. 그해 팔월, 민변의 수령 갈영(葛榮)이 반란군을 이끌고 업성(鄴城)을 포위하여, 상황이 아주 위급했다. 북위조정은 이주영을 보내어 토벌시킨다. 후경은 선봉장이 되어 이주영을 따라 출정했고, 정예기병 7만을 이끌고 갈영과 결전을 벌인다. 갈영은 적을 가볍게 보다가 앞뒤로 후경과 이주영에게 협공당하고, 결국 패전하여 포로로 잡힌다. 후경은 전투의 공로로, 정주자사(定州刺史)로 발탁된다.

 

이주영은 전공을 내세워 교횡발호(驕橫跋扈)한다. 그리하여 효장제는 그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다. 그는 권신에게 조종당하고 싶지 않았고, 정교하게 계획을 세워 이주영을 주살한다. 이주영이 죽자, 후경은 뒤를 봐주는 사람을 잃게 된다. 그는 이주영의 일당으로, 제거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후 개인적인 앞날은 암담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시기에, 세상일은 변화막측한 법이다. 순식간에 북위왕조가 해체되고, 동위,서위로 분열된다. 이때 다시 두명의 효웅 고환(高歡)과 우문태(宇文泰)가 나타나서, 실질적으로 동위, 서위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고, 두 나라의 황제를 손바닥 안에 놓고 조종한다. 다행히 고환도 회삭현에서 자랐고, 후경과는 같은 고향사람이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서로 알았고, 사이가 좋았다. 고환이 득세하는 것을 보자, 후경은 희망이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같은 고향사람인 고환에게 의탁한다. 다시 큰나무를  찾으려 한 것이다.

 

과연 후경의 생각대로, 고환은 그를 받아들여주었을 뿐아니라, 그를 아주 후대했다. 고환의 보살핌으로 후경은 급속히 승진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 사도(司徒), 하남도행대(河南道行臺)가 되고 복양군공(濮陽郡公)에 봉해지며, 병력 10만을 거느리고, 하남지구를 다스린다. 지위와 권세가 상승하면서, 후경은 자아가 팽창된다. 그리하여 안중무인이 된다. 고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눈아래 두지 않았다. 심지어 고환의 세자 고징(高澄)마저도 무시했고, 사적으로 고징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런 말이 고징의 귀에 들어갔고, 고환과 원한을 맺게 된다. 그러나, 고환이 살아있을 때는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량(南梁)에 투항하여 화란을 일으키다.

 

동위 무정5년(547년) 고환이 병사하고, 세자 고징이 집정한다. 그는 후경을 업도(鄴都)로 부른다. 후경은 고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업도에 가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기를 들기로 선택한다. 그는 먼저 서위(西魏)에 투항한다. 서위는 한편으로 후경을 대장군(大將軍) 겸 상서령(尙書令)에 봉하면서 동시에 병력을 보내어 후경을 맞이하며, 동위에 대항한다. 서위의 승상 우문태는 후경이 거짓으로 투항하였을까 우려하여, 후경을 입조하게 한 후, 그의 병권을 박탈하고자 한다. 후경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현호(懸瓠, 지금의 하남성 여남)에 주둔한다. 고징은 병력을 보내어 그를 추격했고, 후경은 과양(涡陽, 지금의 안휘성 몽성)으로 퇴각한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병사 사만명을 잃는다. 후경은 심복 몇명과 회하(淮河)를 건너 도망쳐 겨우 남은 800여명을 모아 수춘성(壽春城)을 지킨다. 자신이 상갓집 개로 전락하고, 동위, 서위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게 되자, 그는 할 수 없이 남량에 투항한다.

 

후경이 투항하겠다는 말을 듣자, 남량의 대신들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후경은 기사다변(機詐多變)한 인물이어서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양무제는 좌우에 말한다. 그가 밤에 천하가 태평한 꿈을 꾸었다. 그런데 후경이 투항해오니 그것은 꿈에서 본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무제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후경의 투항을 받아주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를 하남왕(河南王), 대장군(大將軍), 사지절독하남하북제군사(使持節督河南河北諸軍事), 대행대(大行臺)로 봉한다. 후경이 이미 수춘을 점거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남예주자사(南豫州刺史)로 임명한다. 양무제는 원래, 후경을 받아주면, 남량의 국토면적과 실력을 확대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후경을 받아준 것은 늑대를 집안에 들인 꼴(引狼入室)이고, 호랑이를 길러서 우환을 남긴 꼴(養虎爲患)이었다. 비록 남량은 후경을 아주 후대했지만, 그는 욕심이 끝이 없어, 득촌진척(得寸進尺)했다. 왕씨와 사씨(王謝)는 당시 명문호족이었다. 그런데, 후경은 조정에 왕씨,사씨의 딸을 취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양무제는 이렇게 회답한다: "왕씨, 사씨는 집안이 고귀하여 짝이 될 수 없고, 주씨  장씨(朱張) 이하는 가능하다." 후경은 화를 벌컥 내면서 악독한 맹세를 한다: "오(吳)의 딸을 노비로 삼겠다!"

 

남량에 투항한지 1년도 되지 않아, 후경은 남량이 동위와 의화(議和)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즉시 상소를 올려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동위를 배반했는데, 남량과 동위가 우호관계를 맺으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화를 저지시키기 위해, 후경은 큰 돈을 쏟아부으면서 양무제의 총애를 받는 대신 주이(朱異)를 회유하고, 그에게 양무제의 앞에서 말을 잘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주이는 "돈만 받고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사신을 동위에 파견하여 평화협상을 해야한다고 극력 주장했다. 후경은 자신이 위험에 빠질 것을 겁내어, 먼저 손을 쓰기로 한다. 그리하여 거병하여 남량에 반란을 일으킨다. 남량 태청2년(528년) 팔월, 후경은 중령군(中領軍) 주이, 소부경(少府卿) 서린(徐麟)등을 죽인다는 명목을 내걸고 수양(壽陽)에서 거병한다. 음험하고 교활한 후경은 임하왕(臨賀王) 소정덕(蕭正德)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그로 하여금 수도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에서 호응하게 한다. 구월, 후경은 병력을 이끌고 건강으로 쳐들어간다. 양무제는 태자가령(太子家令) 왕질(王質)로 하여금 삼천의 병력을 이끌고 막도록 한다. 후경의 부대는 야간에 채석기(采石磯)로 도강하고, 소정덕이 수십척의 배를 보내준다. 반군이 돌연 성벽까지 밀려오자 조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양무제는 말년에 불교에 빠져서 재산을 절에 바치면서 무기장비는 제대로 준비해놓지 않았었다.

 

후경의 군대가 건강으로 진입하고 금방 석두성(石頭城), 백하성(白下城)을 점령하고, 동부성(東府城)을 함락시킨다. 대성(臺城)은 황궁이 있는 곳인데, 금방 함락시킬 수 없었다. 후경은 병력을 집중시켜 포위한다. 오랫동안 대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고, 양초가 바닥나니 군심이 동요했다. 그리하여, 후경은 병사들에게 약탈을 하고 부녀자르 간음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하도록 허락한다. 반군이 대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사방에서 지원을 온 자들이 삼십여만인데, 투지가 없었고, 자기들끼리 서로 빼앗을 뿐이었다." 원군이 비록 많았지만, 통일된 지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한다. 태청3년 삼월, 대성이 함락된다. 이때 대성에는 양식이 바닥나서, 군사들은 노(弩)를 끓여먹고, 쥐를 구워먹고, 새를 잡아 먹었다. 전당의 비둘기까지 모조리 잡아먹었다. 말을 잡아 먹으면서 인육도 섞어넣었다. 그리하여 질병이 성행하고, 성안에서 절반이 죽었다. 후경은 명을 내려 환자와 시신을 함께 불태워버리도록 한다. 경성은 일거에 인간지옥이 되어버린다. 도처에서는 짙은 연기와 통곡소리가 들렸다. 이와 동시에 많은 건물이 파괴된다. 동궁 대전(臺殿)에 소장하고 있던 도서는 모두 불타버린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후경의 난"이다. 건강에 참혹한 피해를 가져왔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대성이 함락되면서 양무제는 후경에게 구금된다. 두달 후에는 문덕전(文德殿)에서 굶어죽는다. 만일 양무제가 <농부와 뱀>, <동곽선생과 늑대>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당초 후경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방법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왕왕 사후에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일이 이미 발생한 후에는 후회해도 이미 늦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황위에 오르다.

 

후경은 대성을 함락시킨 후, 남량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관직을 내린다. 자칭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대승상(大丞相),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된다. 양무제가 죽은 후, 후경은 태자 소강(蕭綱)을 황제에 앉힌다(역사에서 간문제(簡文帝)라 한다). 당연히 간문제는 단지 황제라는 이름만 가졌을 뿐이고, 실권은 모두 후경이 장악하고 있었다. 다음 해 연호를 대보(大寶)로 바꾼다(550년)

 

대권을 장악한 후경은 갈수록 자아팽창되어, 자칭 우주대장군도독육합제군사(宇宙大將軍都督六合諸軍事)라 했다. 그리고 간문제에게 '우주대장군'의 봉호를 비준하는 조서를 내려달라고 요구한다. 간문제는 황당하다고 생각했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은 우주라는 봉호를 가진단 말인가?" 그가 보기에 이 봉호는 너무 거창했다. 우주는 아주 큰데, 자신은 그저 강남을 차지한 황제일 뿐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무슨 우주대장군을 봉할 자격이 있겠는가! 우주가 얼마나 큰지 일개무부인 후경은 알지 못했다. 그의 사전에는 그저 무력이라는 두 글자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무력이 말을 한다. 내가 무력으로 황제도 통제하는데, 그럼 내가 천하제일이고, 우주대장군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수재가 군인을 만나면 이치로 설명해서 설득할 수 없다." 방법이 없다. 간문제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우주대장군'으로 봉한다.

 

우주대장군이 된 후에 후경은 더욱 마음대로 행동한다. 당초 왕씨, 사씨의 딸을 처로 맞이하고 싶다는 요구가 거절당했는데, 건강을 점령한 후에 그는 왕씨, 사씨 양가를 대거 도살하여, 거의 멸족시킨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왕씨, 사씨집안의 규수는 신경쓰지 않았고, 눈길을 황실로 돌린다. 공주를 노린 것이다. 간문제에게는 율양공주(溧陽公主)가 있는데 나이 14살이었고, 총명영리하며, 매우 아름다웠다. 후경은 그녀를 점찍었고, 직접 간문제에게 혼인시켜달라고 요구한다. 간문제는 사랑하는 딸을 악당에게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후경의 권세때문에 그는 꾹 참고 공주를 그와 결혼시킨다. 그는 황실까지도 압박할 정도이니, 다른 집안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 후 후경은 다시 양간(羊侃)의 딸을 점찍어 첩으로 취한다. 그리고 양씨집안을 다독이기 위하여 양간의 아들 양곤(羊鵾)에게 관직을 내린다.

 

후경은 건강을 장악하고, 간문제를 조종했다. 그러나 전체 강남을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명성과 위명을 날리기 위해, 시류에 역행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공포정치를 행한다. 그는 명을 내려 석두성에 큰 절구를 만들게 했다. 누구든지 그의 명령을 어기면, 절구에 넣어서 찧어죽이는 것이다. 그는 또한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처족과 모족까지도 멸했다. 후경은 절강동부에 군인을 파견하여, 공개적으로 군인들로 하여금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을 저지르도록 시킨다. 빼앗을 물건이 없으면, 사람을 잡아가서 북방에 팔아넘겼다. 후경은 포악무도했고, 자연히 남방백성들의 원한과 반항을 불러오게 된다. 

 

대보2년(551년)초, 후경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영주(郢州)를 함락시키고, 파릉(巴陵)을 포위하며, 강한(江漢. 장강과 한수일대)을 평정하고자 한다. 양무제의 일곱째 아들인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이 당시 진서장군도독형주자사로 있었다. 그는 부장 서문성(徐文盛), 강주자사 왕승변(王僧辯)으로 하여금 응전하게 한다. 왕승변은 파릉에서 배를 침몰시키고 깃발을 부러뜨린 후 거짓으로 도망치는 척한다. 후경은 함정에 빠져서 주야로 파릉을 맹공하지만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양초가 바닥나고, 질병이 만연하여, 전투력이 크게 손상된다. 육월, 적정대전(赤亭大戰)에서 남량의 장수 호승우(胡僧祐), 육화법(陸和法)이 다시 후경을 대파한다. 후경은 잔여병사들을 수습하여 건강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부장들이 대거 전사하자, 후경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느낀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오매불망 황제가 되고자 했다. 모사(謀士) 왕위(王偉)는 후경의 뜻을 알아차리고 즉시 그가 황제에 오를 수 있도록 기획한다. 그러나, 왕위도 사심이 있었다. 그는 후경이 황제에 오르는 꿈을 이루게 해주는 대신, 자신도 재상이 되는 꿈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해 구월, 후경은 간문제 소강을 폐위시키고, 태자 소대기(蕭大器)등 종실 이십여명을 죽이고, 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을 황제에 앉힌다. 그리고 연호를 천정(天正)으로 고친다. 십월, 후경은 왕위를 시켜 생일축하 명목으로 소강을 취하게 만든 후, 흙주머니로 눌러서 압사시킨다. 십일월, 후경은 소동의 황제위를 폐위시키고, 전통적인 '선양'의 방식으로 즉위한다. 연호를 태시(太始)로 바꾸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며, 천자로 부르고 승상과 문무백관을 설치한다.

 

등극하는 날, 후경은 황궁에서 등극대전을 거행하고, 백관의 조하를 받는다. 우연하게도, 단에 오를 때, 토끼 한 마리가 단의 앞에서 돌연 뛰어올라왔다가 즉시 사라진다; 이건 마치 예시하는 것같았다. 후경은 토끼처럼 꼬리가 길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전이 끝난 후, 재상 왕위는 칠묘(七廟)를 세울 것을 건의한다. 후경은 묻는다: "칠묘를 세운다는 게 어떤 뜻이냐?" 왕위가 그에게 말한다: "황제는 7대의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칠묘를 세우는 것입니다." 후경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이렇게 말한다: "조상의 이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부친의 이름은 후표(侯標)이고 삭주에서 죽었다; 그들에게 영혼이 있더라도, 이렇게 먼 길을 와서 제사를 받을 수 있겠느냐?" 좌우가 그의 말을 듣고는 모두 몰래 웃었다. 다행히 왕위는 총명해서, 가볍게 '루저'가족의 혁혁한 조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나라때의 사도(司徒)인 후패(侯覇)를 후경의 시조로 만들고, 진나라때의 정사(征士) 후근(侯瑾)을 7대조로 모시며, 동시에 그의 조부는 대승상으로, 그의 부친은 원황제(元皇帝)로 한다. 

 

이렇게 하여 후경은 원하는대로 황제의 보좌에 올랐다. 아마도 그는 조상을 빛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같고, 그저 신하들이 만세를 불러주는 것이 꿈에도 그리던 바였을 것이다.

 

황제노릇을 해보고 죽다.

 

황제가 된 후, 후경은 국사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주색에 탐닉한다. 하루종일 황궁내에 기거하면서, 주색을 즐겼다. 옛친구나 심복이 아니면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중 원망하는 소리가 많아진다. 어쨌든 자신의 말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굳이 신경을 써서 일을 하기보다는 그저 황제노릇이나 통쾌하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하루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이다. 

 

후경이 주색에 빠져 있을 때, 상동왕 소역(양원제)는 강주자사 왕승변, 동양주자사 진패선(陳覇先)과 연락하여 후경을 토벌한다. 승성원년(552년) 이월, 소역은 왕승변에게 명하여 병력을 이끌고 강주에서 출발하게 하고, 진패선에게는 갑사, 선박을 이끌고 남강(南江, 즉, 贛江)에서 북상하여 왕승변의 군대와 회합하게 한다. 남량군대는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건강으로 진격한다. 그때, 후경은 부득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방어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크고 작은 선박들에 돌맹이를 채워서 강에 침몰시켜 진회하(秦淮河)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는다. 그리고 강을 따라 보루를 십여리 쌓는다. 진패선은 먼저 북안으로 상륙한 후, 석두성의 서쪽 낙성산(落星山)에 목책을 쌓는다. 다른 군대도 차례로 성보 8개를 구축한다. 소신(沼申)에서 석두성 서북까지, 포위하는 모양을 갖춘다. 왕승변은 군대를 진격시켜 초제사(招提寺) 북쪽(석두석 북쪽)으로 간다. 후경은 만여명의 보병, 팔백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8차례 맹공을 퍼붓는다. 그러나 모두 성공하지 못한다. 석두성을 수비하는 장병들은 잠시 저항하다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후경은 겨우 백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장모(長矛)를 버리고 단도(短刀)를 쥐고 진패선의 군대를 향해 돌격한다. 그러나 싸우면서 계속 뒤로 밀리고, 거의 궤멸하게 된다. 후경은 궁안으로 도망쳐 온다. 그리고 왕위를 엄하게 질책한다: "당초 네가 나에게 황제가 되라고 종용해서,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니냐." 왕위는 할 말이 없었다. 후경은 도망갈 생각을 한다. 왕위는 궁중호위병사들을 동원해서 저항하자고 한다. 그러나 후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2명의 강보에 싸인 아이와 수십명의 심복을 데리고 도망치고자 한다. 그는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면서, 선박 이백척과 병사 이천명을 확보한다. 그해 사월, 후경의 잔여부대는 송강(松江)에서 격패당하고, 겨우 배 1척과 수십명만 남게 된다. 그는 바다를 통해 북방으로 도망치고자 한다.

 

후경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요행을 바라면서 잠에 들었을 때, 한 사람은 수군에게 뱃머리를 돌려 경구(京口)로 돌아가게 한다. 그는 바로 양곤(羊鵾)이다. 이때 후경은 억지로 그의 여동생을 첩으로 취한 것때문에 그는 앙앙불락하고 있었다. 꾹 참고 후경의 밑에서 일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충성을 다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원한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 복수한 것이다. 후경이 깨어나보니, 배가 경구를 향하고 있어 대경실색한다. 돌연 양곤이 몇 사람을 데리고 쳐들어와서, 후경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오늘 너의 머리를 취한 후, 부귀와 바꾸겠다." 후경은 원래 물에 뛰어들어 도망치고자 했으나, 길이 막힌다. 할 수 없이 선창 속으로 도망쳐서 칼로 배바닥을 뚫어 도망치려고 한다. 양곤이 뒤따라가서 삭도(槊刀)로 맹렬히 찔러가고 후경의 등을 관통한다. 후경은 비명소리를 지르고 절명한다. 양곡은 후경의 배를 갈라, 소금을 가득 집어넣어 썩지 않도록 하고, 시신을 건강으로 보낸다.

 

왕승변은 후경의 수급을 베도록 명령한 후, 수급을 강릉으로 보낸다. 상동왕 소역은 후경의 수급을 얻은 후, 시장에 3일간 걸어둔다. 그후 옻칠을 한 후에 무기고에 넣어 소장한다. 후경의 시신은 건강의 시중에 진열된다. 시민들이 속속 와서 구경했다. 후경에 대한 원한이 깊어서,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의 살을 베어 먹는다. 자신이 능욕을 당했을 뿐아니라, 부친과 오빠들도 살해당하여 율양공주는 그의 살을 먹고 싶었으나, 그녀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오지 않아쑈다. 왜냐하면 후경의 뼈까지도 이미 모조리 사람들이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후경의 최후이다. 그가 범한 죄행, 그가 심은 원한, 그는 그대로 거두었다. 인과응보의 법칙은 그에게서 그대로 인증되었다.

 

역대개국황제들은 대부분 조류 혹은 민심에 순응했다. 그렇게 황제노릇을 해야 일정한 합법성과 안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푸경은 포악과 배반으로 황제를 칭했다. 국가와 민중에 거대한 재난이었을 뿐아니라, 자신도 죽어서 묻힐 곳이 없게 된다. 비록 잠시 황제노릇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뜬구름이다. 후경에게 물어보고 싶다. 만일 자신의 최후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래도 황제노릇을 하기 위해서 애쓰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