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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대동파이(大同婆姨): 중국고대 지방매춘업의 선두주자

by 중은우시 2019. 5. 27.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창기(娼妓)제도는 신중국건립전까지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 그것은 정부에서 인정한 정당한 업종이었다. 역사상 태평천국시대에만 엄격히 봉쇄했었고, 근대까지 중국문명과 더불어 계속 존재했다. 심지어 '청루문화(靑樓文化)'까지 나타난다. 그중 많은 사람들의 염명(艶名)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진회팔염(秦淮八艶)의 유여시(柳如是)와 진원원(陳圓圓)이 대표적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최고의 풍류장소는 당연히 남경과 북경이다. 북경은 더 얘기할 필요도 없이, 명,청 양대의 황도이다. 관료와 상인이 운집하니 상응한 '관련시설'도 빠질 수가 없다. 그리고 남경은 육조고도로 진회하 변에는 홍등이 높이 걸리고, 향기로운 바람이 사람들의 코에 스며들었다. 기원이 풍정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농후했다.


당연히 이는 하나의 컨센서스일 뿐이다. 궁중요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식상하게 되면 시골의 음식맛을 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특색이 있는 지방의 색정업도 있다. 예를 들어, 대동파이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특색있는 유명 브랜드이다. 비록 명성에서는 양주수마(揚州瘦馬)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쪽의 기호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한번 맛보지 않으면 안되는 유명한 곳이다.


왜 이렇게 편벽한 지방인 대동에 미인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그렇게 엄청난 명성을 얻었을까? 이건 기실 이해하기 쉽다. 대동은 역사상 특수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오랫동안 다른 민족과 융합되는 과정을 거쳤다. "변방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장을 열어서 여러 민족들이 와서 섞여 살았다." 그리하여 유전자가 달라지고 잡교의 장점으로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화목란(花木蘭), 소태후(蕭太后)등이 있다. 당연히 <옥당춘(玉堂春)>에 나오는 소삼(蘇三)과 <유룡희봉(遊龍戱鳳)>의 이봉저(李鳳姐)도 있다.


당연히 또 다른 원인도 있다. 역사학의 대가인 전백찬 선생은 <중국사강요>에서 이렇게 썼다: 당시 북위 효문제는 한화개혁때 낙양으로 천도한다. 많은 대신과 궁녀는 따라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강제로 이들을 낙양으로 이주시킨 후, 여러번 주청을 올려 "여름에 돌아가고 겨울에 가도록" 청한다. 효문제는 어쩔 수가 없어, 돌아가도록 허락하고, 그 궁녀들을 돌려보낸다. 그녀들을 대동의 변방 장병들에게 나누어준다. 이는 영웅에게 미인을 준 것이니, 후대가 당연히 미인일 것이다.


대동은 옛날에 얼마나 번화했을까? 명나라때의 사조제(謝肇淛)는 <오잡조(五雜俎)>에서 이렇게 말했다: "구변(九邊)의 대동(大同)과 같은 곳은 번화하고 부유한 정도가 강남에 못지 않다. 부녀의 아름다움과 기물의 우아하고 좋은 점도 모두 변방에서 없는 수준이다. 시장에 돈이 많은지 오래되었고,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동은 명나라때 아주 번화했다. 변방도시중에서 가장 부유했다고 할 수 있다. 군대만 근 14만명이 주둔했다. 이 거대한 소비집단은 여러 기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보장했다. 여기에는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고, 이에 따라 여러가지 서비스업, 오락업과 수공업의 발전이 뒤따른다. 그리하여 번화하고 부유하기가 강남에 못지 않는 북방도시가 되었다. 사방의 인구가 대동으로 몰려들고, 사람이 많아지니 용모가 뛰어난 여자들도 자연히 많았다.


대동은 자고이래로 미녀가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대동에서는 25명의 황후, 9명의 황비를 배출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후지향(皇后之鄕)"이라는 말이 있다. 대동파이는 계진성장(薊鎭城墻), 선부교장(宣府敎場)과 더불어 "대동삼절(大同三絶)"로 불린다. 변방무역의 번성은 지방의 번영을 가져왔을 뿐아니라, 소비수준의 제고를 가져온다. 소위 배가 부르면 음탕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의 발전은 색정업의 번성을 불러온다. 이는 정상적인 일이다.


지방브랜드로서, 소첩을 양성하는 것으로 형성된 산업체인인 양주수마와는 달리, 대동파이는 풍유비둔(豊乳肥臀)한 외형, 상제오인(床第娛人)의 미공(媚功)으로 손님들을 끌어들여 전국에서 유명세를 탄다. 그들은 금기서화를 갖추고, 거지투족(擧止投足)의 규범을 훈련받고, 일빈일소(一顰一笑)의 풍운(風韻)과 같은 일반적인 기능 외에 특수한 훈련을 거쳐 그들의 손님들이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성적 만족감을 얻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녀들의 서비스는 중노년층을 마케팅대상으로 포지셔닝했다.


어떻게 훈련하여 이른 특수한 기능을 익히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대동파이의 고객선택은 진회하의 문화와 유아(儒雅)함을 중시한 것과는 달리 손님들이 <청루운어(靑樓韻語)>에서 정한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 또한 "수시편시칭자건(須是片時稱子建), 불가일일무등통(不可一日無鄧通)"을 받들 필요도 없다. 그저 돈을 가지고 천하를 다 돌아다녀 보겠다는 오기로 이들 파이들을 대하면 그만이다.


주의할 점은 여기에서 말하는 "파이"는 나이가 많은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동파이"는 전용명사이다. 전문적으로 이 지역에서 이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설사 추기(雛妓, 어린 기생)라 하더라도 이 명칭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대동파이라는 이 칭호는 주로 외지인들이 부르는 말이다. 대동인들은 다른 지방과 달리, 처를 파이 혹은 파낭(婆娘)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동사람들은 부인을 노판(老板) 혹은 이로판(二老板)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기녀에 대하여는 대동사람들이 황미(黃米) 혹은 요녀(窑女)라고 부른다. 기원에 가서 기녀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칭량황미(稱量黃米, 노란쌀의 무게를 잰다)" 혹은 "광요자(逛窑子)"라고 부른다고 한다. 필자는 대동에서 살아보지 않아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이것은 옜날의 못브일 것이고, 현대인들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대동의 모든 성숙한 여성들을 이런 칭호로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 백성집안의 여자를 부르는 것도 아니다. 옛날 대동의 악호(樂戶) 혹은 화적(花籍)의 여자들 즉 관부(官府) 혹은 교방(敎坊)에서 색예(色藝)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창기(娼妓)나 우령(優伶)들이 비로소 '대동파이'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는 명나라때 사람인 심덕부(沈德符)의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이라는 책에서 아주 분명하게 쓰여 있다. 대동부는 주원장의 아들의 봉국이었고, 연국(燕國), 요국(遼國)과 대치하고 있어서, 기르는 악호가 다른 번속보다 훨씬 많았다. 나중에 비록 점점 쇠락해지기는 했지만, 화적에 있는 사람만 2천여명에 이르렀다.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주야로 그치지 않았고, 나중에는 몰락하여 송나라대의 노기(路妓)나 산악(散樂)과 같이 된다.


소위 악호는 전문적으로 음악가무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전문인원과 가정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이들은 '천민'에 속한다. 그리고 이는 세습제이다. 대동의 악호는 주로 명나라초기 주원장이 원나라를 멸망시킨 후, 많은 몽골부족의 가족과 후예들이 대동으로 흘러 들어왔고, 그녀들은 모두 비교적 고급의 문화와 음악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이곳에 와서 살아갈 때 관부에 의해 악인으로 편입해서 악호가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악호, 악인은 기녀와는 다르다. 최소한 명목상으로 그녀들은 매예불매신(賣藝不賣身) 즉 기예를 팔지 몸을 팔지 않는다. '화적'의 미색으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여인들과는 달랐다. 다만 어떤 때는 이들을 나누기 힘들었다. 그래서 대동파이는 문화정도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낮지가 않다. 당연히, 진회하의 자매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많은 차이가 있다.


만일 현재 대동을 가면, 이 파이라는 칭호에 신중해야 한다. 그것은 "미지파이(米脂婆姨)"처럼 여성을 칭찬하는 좋은 뜻이 아니다. 이 '대동파이'는 비칭이다. 현지인들은 모두 욕하는 말이라고 알고 있다. 선조의 나쁜 점을 들춰내는 것을 좋아할 리는 없는 것이다.


이전에 '대동파이'의 색예는 북방에서 충분히 자랑할 만했다. <여선외사(女仙外史)>에 나오는 대동명기(名妓) 유연(柳煙)은 재색을 겸비했고, 풍월에 능했다. 더더구나 침대에서의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별명이 "만상비(滿床飛)"였다. 이는 '대동파이'의 전형적인 문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참동안 얘기했지만, 핵심은 아직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동파이가 자랑하는 혹은 매력포인트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들이 남다른 점은 혹은 다른 지방의 같은 유형의 업종과 비교하여 장점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말하기가 좀 민망하니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점을 양해하기 바란다. 그래도 가장 깨끗하고, 우아한 언어로 개략적인 내용을 얘기해 보기로 하자.


"대동파이"는 어려서부터 독(瓮) 혹은 요강(釭)을 가지고 훈련한다고 한다. "좌옹(坐瓮)"이라고 부르는 비밀리에 전해지는 특수한 기술이다. 나이가 들면서, 기계의 대소도 달라진다. 성인이 된 후에는 생리적으로 일종의 '특이공능'이 생긴다고 한다. 마음대로 고객을 만족시켜줄 수 있다고 한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곡경도유(曲徑道幽), 중문첩호(重門疊戶)"라고 한다.


"중문첩호"가 원래 가리키는 것은 대동 고성 남성문의 쌍옹성(雙甕城) 구조이다. 호사가는 이것을 가지고 '대동파이'를 묘사했다. 이 '중문첩호'는 삼중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매 문은 시사와 성어를 써서 표시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문의 대련은 이러하다: 조숙림변수(鳥宿林邊樹),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별유동천(別有洞天)"

둘째 문의 대련은 이러하다: "산궁수진의무로(山窮水盡疑無路),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  "점입가경(漸入佳境)"

셋째 문의 대련은 이러하다: "운무심혜출수(雲無心兮出岫), 조권비이지환(鳥倦飛而知還)" "극락심처(極樂深處)"


이것은 근대문인 포천소(包天笑)가 <천영루회억록(釧影樓回憶錄)>에 있는 말이다. 필자는 그저 인용했을 뿐이다. 필자는 우둔하여, 시사가부를 잘 모른다. 실로 그 중의 깊은 의미를 개닫지 못하고, 그 맛을 음미하지 못하겠다. 독자들은 잘 살펴봐서 '대동파이'라는 이 지방의 브랜드가 어쩧게 생겼는지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대당파이의 이런 '특이공능'은 명성을 널리 떨치게 만들었다. 많은 상인 거부가 그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천금을 뿌린다; 더욱 과장된 것은 황제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는 전통경극에느 정덕제(正德帝)가 대동에 와서 엽색행각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이 바로 <유룡희봉>이다. <매룡진(梅龍鎭)>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건 그저 허구의 소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