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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태행팔형(太行八陘)중의 포음형(浦陰陘)의 역사

by 중은우시 2020. 6. 30.

글: 지도제(地圖帝)

 

태행산맥은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하남성(河南省)의 사이에 있으며, 황토고원과 화북평원을 육로로 연결시키는 중요한 통로이다. 자고이래로 병가의 필쟁지지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태행산은 험준하여 넘기 힘들어 고대인들의 통행이 불편했다. 태행산에는 8개의 산맥 양측을 연결시키는 통로가 있다. 고대인들은 이를 '태행팔형'이라고 불렀다. 태행팔형은 남쪽부터 북쪽으로 차례로 경관형(輕關陘), 태행형(太行陘), 백형(白陘), 부구형(滏口陘), 정형(井陘), 비호형(飛狐陘), 포흠형, 군도형(軍都陘)이다. 오늘 우리가 얘기하려는 것은 바로 태행팔형중 제7형인 포음형이다.

 

포음은 옛 현(縣)의 이름이다. 지금의 하북성 역현(易縣)의 서자형령(西紫荊嶺)에 있었다. 동한시기에는 곡역현(曲逆縣)으로 고친다. 포음현은 역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포음이라는 명칭은 살아남았다.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하는 전쟁을 진행하는 중, 연나라의 태자단(太子丹)은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자, 자객 형가(荊軻)로 하여금 지도에 비수를 숨겨 들어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다. "풍소소혜역수난(風蕭蕭兮易水寒), 장사일거불부환(壯士一去不復還)"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천고의 슬픈이야기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가? "능려월만리(凌厲越萬里), 이리과천성(迤邐過千城)" 형가는 바로 포음형을 통과하여 진나라의 도성 함양으로 간 것이다. 천고에 유명한 역사적 장거의 증인이 된다. 비록 이러한 암살행위는 역사를 역행하려는 것이었다고 비난을 받기는 하지만.

 

우리는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지역의 지형도를 살펴보자. 연나라는 화북평원에 있다. 진나라의 도성은 섬서의 관중지역에 있다. 섬서는 동으로 황하를 건너면 산서이다. 산서에서 태행산을 넘으면 하북이다. 천리 먼길의 태행산은 남북으로 관통해 있고, 태행산 북부에 위치한 포음형은 자연히 역수강에서 출발한 형가가 진나라로 가는 최선의 길이 되는 것이다. 포음형은 하북성 역현에서 시작한다. 하북평원을 따라 역수를 다라, 자형관을 지나 내원분지(淶原盆地)로 들어간 후, 태행팔형중의 제6형 비호경과 함께 서쪽의 노선을 공유한다. 즉 내원분지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가면 울현분지(蔚縣盆地)로 들어간다. 이는 대동분지(大同盆地)와 이어진다.  서로 가면 영구분지(靈丘盆地)로 들어간다. 평형관을 지나면 흔정분지(忻定盆地)에 도착한다.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에 하북평원의 주요세력은 연나라와 조나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북을 "연조대지(燕趙大地)"라 불린다. 조나라는 중산국을 멸망시킨 후, 연나라와 조나라는 남역수를 경계로 하여, 각각 포음형과 비호형의 동쪽입구를 차지한다. 그러나 조나라는 울현, 영구와 내원의 3곳 분지도 지배하고 있어서 국력이 연나라보다 훨씬 강했다. 그래서 연나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조나라가 포음형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진격하는 것을 막느냐에 있었다. 냉병기시대에 연나라는 북역수의 상류에 관문을 만드는 것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고, 연나라사람들은 확실히 그렇게 했다. 이 관애(關隘)는 최종적으로 "천하구새(天下九塞)"의 하나가 되는 자형관(紫荊關)이다.

 

포음형을 얘기하려면 자형관도 얘기해야 한다. 자형관은 포음형의 중요한 관문이다. 장성의 내삼관(內三關)중 하나이다. 자형관은 한나라때 설치되었고, 다른 이름으로는 오완관(五阮關)이라 한다. 북위때는 자장관(子庄關)이라 불린다. 송나라때는 금피관(金陂關)이라 불렸다. 사실상 포음형은 보정, 순평, 도마관, 주마역, 영구를 잇는 일선이다. 자형관의 앞은 거마하(拒馬河)이고, 같은 장성 내삼관인 도마관의 아래는 당하(唐河)이다. 모두 병가에서 필쟁지지인 험준한 요지이다.

 

포음형의 옛길은 실제로 거마하 상류의 하곡(河谷)이다. 이곳은 수도와 아주 가깝다. 포음형을 막고 있는 자형관은 '기남제일웅관'이라 불렸다. 특히 요,금이후, 북경은 천하의 중심이 된다. 전략적인 지위가 계속 높아진다. 전쟁은 더욱 빈번해진다. 역사상 자형관에서는 140여차례의 전쟁이 일어났다. 가장 저명한 것은 금나라말기 금선종초기 몽골의 징기스칸이 거용관을 오랫동안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병력을 나누어 남하시켜, 자형관을 함락시킨다. 그후 거용관을 내외에서 협공하여 무너뜨린다.

 

1449년, 명영종 주기정이 친정을 한다. 그 결과 토목보에서 사건이 터진다. 주기진은 천하를 깜짝 놀라게 하는 '토목보의 변'으로 오이라트에 포로가 된다. 오이라트는 명영종을 이용하여 새로 즉위한 경태제의 명나라를 협박한다. 그러나 명나라조정은 거절한다. 마음 속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는 자형관을 함락시킨 후 북경으로 진격한다. 일찌기 이런 말이 있었다. 거용관을 통하여 북경을 공격하면 30%의 승산이 있지만, 자형관을 통하여 북경을 공격하면 70%의 승산이 있다고, 이를 보면 자형관이 북경보위에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고대에 포음경은 지형이 험준하였다. 청나라때는 이런 기록이 있다: "협곡을 따라 들어가면, 길이 암석 사이에 있는데, 길이 좁아서 말한마리가 통과할 수 있다. 오른쪽의 절벽은 천길이고, 왼쪽은 낭떠러지로 수백장이다. 그 아래에는 분노한 강(즉, 당하의 격류)이 흐른다."이를 보면 상당히 겁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고공공포증을 가진 사람은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험준한 기세는 일찌감치 과거가 되었다. 현재의 포음형은 잘 닦인 철도가 들어섰다. 그러나 자형관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자형관은 5개의 작은 성으로 이루어졌다. 각각 거마하 북안의 소금성(小金城), 남쪽의 관성(關城), 소반석성(小盤石城), 기봉구성(寄峰口城), 관좌령성(官座嶺城)이다. 큰 성이 작은 성을 둘어싼 구조는 자형관을 전국의 장성 관애중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세월은 무정하다. 이 옛날의 웅위한 건축물은 지금 형편없게 낡아버렸다. 명나라는 북원(몽골)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여 새로 관성을 쌓았다. 관성의 설계를 매화모습으로 하여 거대한 돌로 쌓아서 석벽을 만든다. 관외의 맑은 거마하의 물은 모두 독특한 풍경이 된다. 바깥을 둘러싼 자형관의 장성의 부도욕(浮圖峪)에서 북으로 수킬로미터를 가면 오룡구장성(烏龍溝長城)이다. 기세는 웅위하여 팔달령(八達嶺), 모천욕(慕天峪)에 비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