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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정덕제(正德帝) 재위16년간의 황당한 사건들...

by 중은우시 2020. 5. 7.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의 일생은 "황희무도(荒嬉無度), 자의황위(恣意枉爲)"라는 여덟자로 개괄할 수 있다. 그는 재위16년간 "격구주마(擊毬走馬), 방응축견(放鷹逐犬), 배우잡극(俳優雜劇), 착진어전(錯陳於前)"했고, "여외인교역(與外人交易), 압닐설설(狎昵媟褻)", "일유부족(日遊不足), 야이계지(夜以繼之)"하면서 무수한 황당한 일을 벌였다. 여기에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1. 호랑이와의 결투

 

무종은 즉위한지 1년후, 서화문(西華門) 밖에 개인적인 행궁을 건립했고, 무수한 진금맹수(珍禽猛獸)를 길렀다. 거기에는 표범(豹子)가 있어서, "표방(豹房)"이라고 불렀다.

 

"표방"에는 호랑이도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무종은 최소한 호랑이와 2번 결투를 벌였다.

 

제1차는 무종이 당해내지 못해서, 호랑이에게 몰려 구석으로 밀려났다. 곁에서 보고 있던 심복 전녕(錢寧)이 놀라서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나섰다. 다행히 강빈(江彬)이라는 무관이 무기를 들고 뛰쳐나가서 호랑이를 찔러죽이고 무종을 구했다.

 

제2차에도 여전히 무종은 적수가 되지 못했고, 호랑이에게 당해서 상처를 입는다. 놀라자빠진 무종은 호랑이의 무서움을 알고 더 이상 호랑이에게 덤비지 못했다.

 

2. 무예에 미치다.

 

무종은 어려서부터 창과 몽둥이를 들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선조인 영락제(명성조 주체)를 본받고 싶어했고, 이정소혈(犁庭掃穴), 심입대막(深入大漠), 친정몽고(親征蒙古)의 위대한 업적을 세우려 한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극력 말리는 바람에 실현할 수 없었다.

 

선부(宣府)의 무관 강빈을 알고난 후, 무종은 무예를 열심히 익힌 다음 경성내에서 써먹을 곳을 찾는다. 그는 황궁내에 동,서 두 관청(官廳)을 두고, 안단영(安團營)을 건립하며, '표방' 부근에 소위 '내교장(內校場)'을 설치하여 한 무리의 관병들과 매일 진법을 배치하고 무예를 익힌다. 각신 양일청(楊一淸)은 이런 말을 했다: "용여(龍輿, 황제가 타는 가마)가 표방으로 가면 머물고 돌아오지 않았다. 후원에 이르러 병사들을 훈련시키는데, 북소리 대포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었다."

 

한번은 건청궁(乾淸宮)에 불이 붙었다. 당무종은 사람을 불러서 불을 끄려 하지 않고 오히려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리고 천고의 명언을 남긴다: "멋진 큰 불이로구나!(是好一棚大煙火也)!)

 

3. 변방으로 몰래 가다.

 

강빈이 계속 종용하자, 당무종은 변방으로 가서 적을 죽이고 싶은 생각이 갈수록 강해졌다.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 다음 그는 강빈을 데리고, "미복으로 바꿔 입고 덕승문을 빠져나가 창평주로 간다." 조정의 문무백관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조회때, 관리들은 비로소 황제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어 급히 사람을 보내어 추격한다. 결국 사하(沙河)에서 따라잡는다. 그러나 명무종은 죽어라 북경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누가 와서 권해도 듣지 않았다.

 

마지막에 거용관(居庸關)의 수관어사(守關御史) 장흠(張欽)이 문을 걸어잠그고 무종을 받아주지 않는다. 무종은 더 나갈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가 북경으로 돌아와서 한 첫번째 일은 바로 장흠을 해직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태감 곡대용(谷大用)을 보내어 거용관을 지키게 한다. 장흠이 길을 막지 않으니, 그는 순조롭게 거용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에 곡대용으로 하여금 거용관을 걸어잠그게 해서, 뒤를 추격해오던 북경의 관리들이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순조롭게 선부까지 갈 수 있었다.

 

그해 9월, 무종은 산서(山西) 양화(陽和)에 도착한다. 마침 몽골 달달부(韃靼部) 5만 철기가 칩입해 들어왔다. 무종은 크게 기뻐하며, 친히 전투를 배치햇고, 말을 타고 적을 죽이러 달려나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친히 몽골병사 1명을 죽였다고 한다.

 

4. 돼지를 기르지 못하게 하다.

 

정덕14년 십이월 하순, 무종은 성지를 하나 내리는데, 민간에서 돼지를 기르거나 죽이지 못하게 했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순행해서 도착하는 곳에서 민간이 돼지를 기르지 못하게 하여, 원근에서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해 제사에는 양으로 돼지를 대신했다."

 

당시 이후(李詡)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계암노인만필>이라는 책에서 무종의 금저령(禁猪令) 원문을 실어놓았다: "양시지가(養豕之家), 이매재살(易賣宰殺), 고계심상(固繫尋常), 단당작본명(但當爵本命), 기이우성(旣而又姓), 수연자이(雖然字異), 실내음동(實乃音同). 황겸식지수생창질(況兼食之隨生瘡疾), 의당금혁(宜當禁革). 여약고위(如若故違), 본범병연당방가소발견극변위(本犯幷連當房家小發遣極邊衛), 영원충군(永遠充軍)"

 

당무종의 성은 주(朱)이다. 돼지의 저(猪)와 발음이 같다. 우연하게도, 그의 띠가 돼지띠이다. 그래서 이런 금저령을 내린 것이다.

 

이 금령은 조정과 민간에서 엄청난 반대를 불러온다. 내각수보 양정화(楊廷和)는 <청면금살저소(請免禁殺猪疏)>를 올리고, 예부관리도 글을 올려 국가의 정상적인 제사에는 모두 소, 돼지, 양의 세 가지 동물을 써야 하는데, 돼지고기를 쓸 수 없게 되면 부득이 양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예법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강력한 반대앞에 무종은 어쩔 수 없이 금지령을 철회한다. 이때는 금지령을 반포한 때로부터 3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5. 영왕(寧王)을 다시 체포하다.

 

정덕14년 육월, 영왕 주신호(朱宸濠)가 반란을 일으켜, 구강(九江)등지를 점령하여, 강남이 혼돈에 빠진다. 그러나 무종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친히 총사령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대군이 막 탁주(涿州)에 도착했을 때, 영왕의 반란이 이미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주신호 본인은 왕수인(王守仁, 왕양명)에게 생포된 것이다.

 

무종은 진압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만일 대외적으로 진압소식이 전해진다면 이번 남정(南征)은 물거품이 될 터였다. 그리하여 그는 진압소식을 숨기고, 계속 남하한다.

 

십이월, 무종은 마침내 남경성에 도착한다. 주신호도 왕수인에 의해 남경성으로 압송된다. 무종은 돌연 기이한 아이디어를 낸다. 그리하여 '이금영왕(二擒寧王)'의 일막이 벌어지게 된다.

 

무종은 무장을 하고, 여러 장병들의 호위하에 석방한 주신호를 다시 체포한다. 주변의 장병들은 소리높여 '만세'를 불렀다. 무종은 득의양양해 했다. 마치 영왕이 정말 그에게 생포된 것처럼.

 

가련한 영왕은 반란을 한번 일으켰을 뿐인데, 두번이나 생포된 것이다. 아마도 반란을 일으킨 친왕들 중에서 가장 운나쁜 케이스일 것이다.

 

무종은 16년간 재위했는데, 황당한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가 죽은 후, 사서는 그에 대하여, "탐락희유(耽樂嬉遊), 닐근군소(暱近群小)"라고 평했다. 정곡을 찌른 평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