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나라말기의 황제들은 무능했지만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중은우시 2020. 3. 3. 10:39

글: 문재봉(文裁縫)


북경대학 교수인 양쿠이송(楊奎松)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는 얼마나 죽기를 두려워했는가"라는 글을 쓴 바 있다.

확실히 부의(溥儀)는 무척이나 죽는 것을 겁냈다.

만주국시기 부의는 죽음을 겁내서 매번 일본 관동군의 고위참모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를 만나러 갈 때면, 점을 쳐서 길흉을 알아보았다; 심지어 외출하거나 만주국대신을 만날 때, 길을 걸을 때 어느 쪽 발을 먼저 내딛을지, 음식을 먹을 때 야채요리를 먼저 집을지 고기요리를 먼저집을지도 모두 점을 쳐서 길흉을 물었다.


일본인의 '아황제(兒皇帝)'로 모든 일은 일본인들의 분부에 따랐으며, 심지어 자신의 조상도 인정할 수 없었다. 제사지낼 때도 그저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게 지내야 했다.


부의는 자서전에서 "아Q"정신에 충만하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조상을 항상 최우선에 두었다. "매번 몸을 움직여 신묘로 가기 전에, 먼저 집안에서 나의 조상에게 절을 했다. 신묘에 도착해서 아마테라스 오키카미의 신감(神龕)에 절을 할 때면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그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북경의 곤녕궁에 절하는 것이다.'"


다만, 그는 일본인들이 그의 목숨을 거두어갈까봐 겁을 냈고, 오로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빌었고, 입만 열면 항상 '마아테라스 오미가키의 신휴(神庥)와 천황폐하의 보우(保佑)'를 얘기했었다.


요시오카는 부의를 세뇌시킨다.

입만 열면, "일본은 폐하의 부친과 같다. 응? 관동군은 일본을 대표한다. 응? 관동군사령관도 폐하의 부친과 같다. 응?"

그리고는, "관동군이 폐하의 부친이다. 나는 관동군을 대표한다. 응?"


더 말할 필요도없이 중국에서 이는 가장 사람을 모욕하는 말이다. 다만 부의는 함풍제, 서ㅐ후, 광서제와 같은 품성을 지녔다. 평소에는 인민이 머리위에 올라타서 위세를 부리지만, 일단 외부의 힘에 정복당하면, 즉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땅을 내주고 돈을 내주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정복한 사람을 할아버지로 부르든 아버지로 부르든 그게 뭐 대수일 것인가.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부의가 1945년 8월 16일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준비하다가, 심양공항에서 소련군에 체포되었을 대이다. 당시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절대로 중국인의 손아귀에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중국인의 손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체포된 후, 그는 예전에 일본에 극력 충성을 표시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극력 소련인들에게 잘보이려 한다. 그는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일본인의 죄행을 증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있는 금은보화를 스스로 '전후기금'으로 내놓는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글의 말미에는 이렇게 썼다: "하나의 전제봉쇄의 정권구조에서 결국은 근친번식의 물종퇴화의 진흙탕에 빠져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시조황제가 얼마나 대단하든지간에 대가 내려갈수록 점점 못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명나라에서 뒤에 언급하는 몇몇 황제들은 청나라말기의 이들 통치자들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명나라황제들에게 가장 칭찬할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천자수국문(天子守國門), 군왕사사직(君王死社稷)"(천자가 나라의 관문을 지켜내고, 군앙은 사직을 죽믐으로 지킨다). 명나라초기, 명성조 영락제는 친히 대막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우리 왕조는 국세가 높아 전왕조들을 초월한다. 북로, 서번, 남도, 서양의 여러 오랑캐를 다스리고, 한왕조의 화친도 없고, 당왕조의 결맹도 없으며, 송왕조의 납세박폐도 없다. 역시 적국과 형제의 예를 하는 것도 없다."


명성조는 도성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는데 목적은 바로 '천자수국문'하기 위함이다. 대명천자는 제일선에서 나라의 관문을 지켰던 것이다.


그의 자손들도 그의 바램을 저버리지 않았다.


대명왕조는 276년의 비바람을 견디면서, 시종일관 여하한 세력에도 굴복한 적이 없다. 그것이 잠시일지라도.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일까지 발생한 적이 있지만, 여전히 돈을 주거나,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여자를 주고 평화를 구하지도 않았다. 더더구나 영토는 촌토도 양보하지 않았다.


설사 후금의 홍타이시가 문앞까지 쳐들어왔지만, 한번도 '전요가복(全遼可復)'(전체 요동땅을 다시 수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 설사 이자성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경사로 공격해 들어왔지만, 타협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천도는 죽어도 하지 않았다.


후인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는 그 숭정제는 오척백릉으로 '천자수국문, 군왕사사직'의 10글자를 지켜냈다.


숭정제이후, 홍광제(弘光帝), 융무제(隆武帝), 소무제(紹武帝), 영력제(永曆帝)등 네 황제도 모두 죽음을 겁내지 않았고, '시사여귀(視死如歸)'의 기백을 보여주었다.


먼저 홍광제를 얘기해보면, 그는 동림인들에게 가장 심하게 비난받은 인물이다.

장대(張垈)는 홍광제를 이렇게 책망했다: "자고이래로 망국지군중 우리 홍광이 가장 심하다. 한헌제의 잔약(孱弱), 유선의 치라(痴羅), 양광의 황음(荒淫)이 모두 합쳐서 한 사람에게 들어 있다."

육기(陸圻)도 홍광제가 혼용음란하여 조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궁궐에 깊이 들어 앉아서 어린 여자를 낚고, 술을 마시며, 배우들과 어울려 즐긴다."

그러나, 장대, 육기와 같은 인물들은 홍광의 궁궐에 밀접하게 접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적은 것은 그저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이나 혹은 억측을 한 것일 뿐이다.


홍광정권이 무너진 후, 당시 사람 사증(史曾)은 내시 임이량(林爾亮)을 만나서, 홍광제는 억울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책 <통여잡기(慟餘雜記)>에 특별히 주석을 달았다: "홍광제가 궁중에서 여러가지 웃기는 일들을 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는 혼용하기 그지없어 망했으니 불쌍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 임이량을 만탔더니 그가 말하기를 혼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홍광제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기를 원치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를 황제로 옹립했고, 그리고 한 가지 일도 그가 하자는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모두 그들이 시키는대로 해서 일을 망쳤다는 것이다." 홍광제때의 급사중 이청(李淸)은 홍광정권이 수립된 후 멸망할 때까지 남경에서 생활했는데, 그는 홍광제의 전과정을 보았다. 외부에 열러진 유언비어에 대하여 분개해 마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도 붓을 들어 홍광제를 위해 변명했다. 홍광제는 여자를 가까이한 것이 드물다. 다만 상소문을 친히 결재하지 않아서 안의 환관과 바깥의 재상들이 간사하게 처리했는데, 모든 책임을 황상에게 떠넘겼다.


어떤 사람은 청군이 남경성에 쳐들어올 때, 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을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평가한다.

이에 디햐여, 이청은 <삼원필기(三垣筆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처음에 홍광제는 성에서 끝까지 남으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태조의 능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저 죽기를 각오하고 지킬 수밖에 없다." 그후 사례감 한찬주가 권하여 비로소 마사영등의 호위하에 성을 빠져나간 것이다.


홍광제가 청군에 체포된 후, 청의 예친왕 도도의 심문을 받았다. 문병(文秉)은 <갑을사안(甲乙事案)>에 간단하게 적었다: "끝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終無一語)". 이것만으로도 홍광제의 비타협, 비투항, 비굴중, 비구요(非求饒), 비협조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국가와 인격의 존엄을 지킨 것이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원래 자신과 동림당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전겸익(錢謙益)은 일찌기 홍광제의 즉위를 극력 반대했었다. 그러나 홍광제가 살해당한 후, 자주 홍광제가 근면하게 정무를 보며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던 광경을 떠올리며, 세상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추화되는 것을 마음상해 하면서 <일년(一年)>이라는 시를 남긴다.


홍광제가 체포된 후, 명나라의 선비들은 다시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황제로 옹립한다. 그가 바로 융무제이다. 융무제는 정주(汀州, 지금의 복건성 장정)에서 죽는다. 당시 청나라의 패륵 보로(博洛)은 대군을 이끌고 복주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총병(總兵) 이성동(李成棟)은 경기(輕騎)를 이끌고 융무제일행을 추격한다. 이성동의 추격은 재빨랐다. 한밤중에 정주의 부당(府堂)으로 쳐들어가며 병사들을 지휘하여 마구 활을 쏜다. 융무제와 그의 후비들은 모조리 핏물 속으로 쓰러진다.


융무제가 순국하자, 대학사 소관생(蘇觀生)과 광동포정사 고원경(顧元鏡)등은 다시 광주에서 융무제의 동생을 옹립하니 그가 소무제이다.


소무제는 남명황제중 가장 사나이다웠다. 소무제는 겨우 40일간 즉위했는데, 광주성이 퉁양갑(佟養甲), 이성동등이 이그는 청군에 함락되고, 자신은 포로로 잡힌다.


이성동은 정주에서 융무제를 사살했기 때문에, 청나라조정에 포로를 바칠 기회를 놓쳐버렸다. 다시 소무제를 붙잡자 그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며, 북경까지 압송하여 큰 상을 받으려 생각한다.


그러나 소무제는 사나이였다. "내가 만일 네가 주는 한 숫가락이라도 먹는다면, 선제의 얼굴을 지하에서 어떻게 보겠는가?"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소무제의 즉위를 추진했던 소관생도 절개가 있었다. 청군이 이미 성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자, 그는 숨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문을 걸어잠그고 크게 "대명충신의사(大明忠臣義士), 고당사(固當死)"라고 벽에 크게 써놓고, 목을 매어 자결한다.  


역사학자들은 영력제를 평가하면서 그는 성격이 유약하여, 매번 일이 닥치면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고, 위기에 닥치면 여기저기로 도망다녔다고 한다.


다만, 영력제는 남명의 네 황제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영력정권은 15년간 존속했다. 그는 의지가 굳었다고 볼 수 있다.

오삼계의 수중에 들어가서 궁현교수(弓弦絞首)의 형을 당하기 전에도 영력제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은 고요한 물과 같이 담담하게 맞이했다.

영력의 아들은 나이가 겨우 12살인데, 형을 받기 전에 오삼계에게 욕을 했다: "힐적(黠賊)! 우리 왕조가 너에게 무엇을 잘못했고, 우리 부자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영력제 본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삼계가 영력제 부자를 처형한 후, 사람을 시켜 성이 북문밖에서 장작을 쌓게 하여 시신을 화장한 후 사방에 유골을 뿌린다.

이것이 바로 '좌골양회(挫骨揚灰)'이다.

중국에서 살부살자(殺父殺子)의 피맺힌 원한이 없다면, 이렇게 단자절손(斷子絶孫), 절정과의(絶情寡義)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오삼계는 이런 악행으로 그후 '삼번의 난'을 일으키지만 민심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