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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나라는 정말 "시망어가정(始亡於嘉靖)"일까?

by 중은우시 2019. 12. 28.

글: 기점역사(起點歷史)


가정(嘉靖, 1522-1566)은 명나라의 열한번째 황제인 명세종(明世宗) 주후총(朱厚㷓)의 연호이다. 명나라때 가정이라는 이 연호는 모두 45년간 사용되었다. 명나라에서 두번째로 길게 사용된 연호에 해당한다(가장 길게 사용된 연호는 명신종 만력제의 만력으로 모두 48년간 사용되었다). 가정제는 명나라때 권력을 장악한 기간이 가장 긴 황제이다. 그의 부친인 주우원(朱佑杬)은 단 하루도 황제의 자리에 앉지 못한다. 나중에 가정제가 억지로 추봉해서 황제가 된다. 가정제의 즉위는 명효종(明孝宗)의 일맥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덕(正德) 16년(1521), 명무종(明武宗)이 붕어한다. 무종은 후사를 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각수보(內閣首輔) 양정(楊廷)은 '황명조훈(皇明祖訓)에 근거하여 황위계승자를 찾는다. 명무종의 유일한 동생인 주후위(朱厚煒)는 어려서 요절했다. 그리하여 위로 명무종의 부친인 명효종의 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명효종의 두 형은 모두 요절하고 후사를 두지 못했다. 넷째동생 흥왕(興王) 주우원은 이미 죽었으나, 두 아들을 두었다. 흥왕의 장남 주후희(朱厚熙)는 이미 죽었고, 그리하여,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원칙에 따라 차남 주후총이 후사를 잇는다. 그가 바로 명세종이다.


가정제는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고, 바로 이런 원인으로, 내각수도 양정은 그가 새 황제에 오르도록 극력 추천했었다. 그러나 양정은 앞의 절반만 맞혔고, 뒤의 절반은 맞추지 못했다.


가정제는 확실히 아주 총명했고, 심지어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총명했다. 그가 등극한 후,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신경을 쓰지 않고, 양정을 우두머리로 하는 문관집단을 상대했다. 결국 단지 3년의 기간을 들여, 사조원로(四朝元老) 양정을 쫓아내고, 나중에 평민으로 강등시킨다.


조정을 정돈한 후, 가정제는 개혁을 추진한다. 정치적으로 집이납간(集異納諫)하면서 정무에 근면했다. 귀족세력과 환관세력에 타격을 가하고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한다. 조정관리에 대한 대거 교체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주어 경작을 장려하고, 부역을 새로 정리정돈하며, 재난구호에 힘쓰며, 세금을 감면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보살펴서 당시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크게 완화시킨다.


군사적으로는 척계광(戚繼光), 유대유(兪大猶)를 위시한 항왜명장들을 등용하여 왜구를 소탕하여 외환을 없애고 국경을 정돈한다. 문화적으로는 과거의 폐해를 개혁한다. 문화와 과학기술이 유례없이 번영하며, 우수한 문학작품과 걸출한 인물이 대량으로 등장한다. '천하흡연칭치(天下翕然稱治)" 이 시기를 사학자들은 '가정중흥'이라 부른다.


가정제는 20년간 나라를 다스려 천하태평하게 하지만, 후기에는 방사(方士)를 미신하고, 도교를 받들며, 장생불로약을 만든다. 그후 20년간은 더 이상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가정제의 불상조(不上朝)는 조정을 내버려두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낮에 도교를 수련하고, 밤에는 새벽5점까지 상소문을 읽었다. 대신들을 완전히 손바닥 안에 가지고 놀았다.


비록 간신 엄숭(嚴嵩)이 20년간 권력을 농단했지만, 가정제는 순식간에 엄숭을 가파인망(家破人亡)하게 만든다. 이를 보면 가정제의 용인술(用人術), 식인술(識人術), 권형술(權衡術)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가정제의 재위후기에 명나라의 전체적인 실력은 어느 정도 하락했지만, 망국에 이를 정도라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비록 좋은 황제라고 부를 수 없을지는 몰라도 명나라는 '가정제때부터 망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