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명세종(明世宗) 가정제는 논쟁이 많은 황제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영명하여 명태조 주원장에 비견할 만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혼용무능(昏庸無能)하여 연단(煉丹)에만 빠져있었다고 본다. 다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명세종은 즉위초기의 몇년간 확실히 잘 통치했었다는 것을 설사 후기에는 일년내내 수도에 빠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정을 완전히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었다. 명세종은 지극히 총명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황제이다. 그리고 약간은 과대망상이 있었다. 자신과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은 엄숭과 같은 관료사회의 노련한 인물들만이라고 여긴다. 결국 명세종은 무능한 혼군이 아니었다.
엄숭(嚴嵩)을 살펴보자. 엄숭은 명나라때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자는 유중(惟中)이고, 호는 개계(介溪)이다. 가정시기, 조정을 20여년간 독단했다. 명세종은 도교와 신선을 추구하고, 정무에는 게을렀다. 엄숭은 아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황제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문장을 쓰는데 뛰어났다. 그래서 총애를 받고, 수보(首輔, 재상)에 오른다. 그는 권력을 오랫동안 쥐고 있었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요직에 앉혔다. 아들은 시랑(侍郞)에 올리고, 손자는 금의중서(錦衣中書)가 된다. 그의 빈객들이 조정을 가득 채우고, 그의 친인척들이 요직을 장악한다. 그리고 일당을 끌어모아 조정대신들중 대다수가 그의 일당이 된다.
엄숭의 아들 엄세번(嚴世藩)은 윗사람의 뜻을 잘 헤아리고, 모함도 잘하며 권력을 농단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소승상(小丞相)"이라 부른다. 그는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뇌물이 성행했다. 당시 타타르(韃靼)의 얜다칸(俺答汗)이 여러번 남침하여, 북방의 군사사정이 시급했다. 여러 변방의 군량 백만이 엄숭에게 뇌물로 들어간다. 가정29년(1550년), 얜다칸은 군대를 이끌고 북경성아래까지 치고 들어온다. 엄숭은 일당인 대장군 구란(仇鸞)은 감히 나서서 싸울 생각을 못한다. 엄숭은 타타르는 "실컷 노략질을 하면 알아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하며 수수방관한다.
가정말기, 어사 추응룡(鄒應龍), 임윤상(林潤相)이 연이어 엄세번을 탄핵한다. 엄세번은 죽임을 당하고, 엄숭은 면직된다. 그리하여 권세를 잃는다. 가산은 몰수당했는데, 황금 30만냥, 은 200만냥, 좋은 논밭과 저택이 수십개였다. 이를 보면 그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명세종은 무능한 인물이 아니다. 엄숭도 청렴한 관리가 아니다 .그들은 왜 함께 짝을 맞추어 서로 돕고 지지했을까?
만일 가정제의 심정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 중의 비밀과 단서를 엿볼 수 있다. 가정제는 엄숭을 아주 좋아했다.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그러하다. 첫째, 엄숭은 황제에게 아부를 잘 했다. 그의 재능을 '청사하표(靑詞賀表)'를 쓰는데 썼고, 확실히 황제의 환심을 얻는다. 둘째, 엄숭은 확실히 행정재능이 있었다. 가정제는 엄숭을 내각수보로 삼는 것이 중앙정부의 운영을 통제하는데 가장 좋은 방안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두 사람의 협력은 아주 잘 맞았던 것이다.
어느 학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황제는 강렬(剛烈)하고, 엄숭은 유미(柔媚)하다", 일정일반(一正一反)이다. "황제는 교횡(驕橫)하고 엄숭은 공근(恭謹)하다" 역시 일정일반이다. "황제는 영찰(英察)하고, 엄숭은 박성(朴誠)하다. 이것도 상호보완관계이다. 게다가 황제는 '독단(獨斷)'하고, 엄숭은 '고립(孤立)'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황제와 엄숭 간에는 '물만난 고기'같은 상호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황제는 그를 심복으로 여기고,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엄숭은 황제를 그의 호신부(護身符)로 여기며, 권세를 행사한다. 이것은 모두 가정제와 엄숭이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를 의지하게 된 내재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기실, 또 한 가지가 있다. 학자들은 아마도 보지 못한 점일 것이다. 가정제가 엄숭을 기용한 것은 엄숭이 '말을 잘 듣는다'는 것도 있다. 엄숭은 쉽게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엄숭이 '말을 잘 듣는 것'은 엄숭이 황제의 총애를 기반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엄숭을 '쉽게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엄숭이 부정부패를 저질러 약점을 황제가 쥐고 협박할 수 있는 무기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도자는 부하의 부정부패는 겁내지 않는다. 부하가 재물을 탐하는 것은 겁나지 않으나, 부하가 재물을 탐하지 않으면서 윗사람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 겁난다. 그것이 정말 겁나는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이 방면이 사례는 아주 많다. 청나라때의 화신(和珅)은 엄청난 탐관오리였는데, 건륭황제는 영명했으므로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고발을 해도 건륭제는 모르는 척했다. 입건도 하지 않고 조사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화신을 신임했고, 그로 하여금 권세를 누리게 놔두었다. 죽을 힘을 다해 자신에게 충성을 다 바치게 만든 것이다. 건륭제가 죽은 후, "화신이 쓰러지니, 가경이 배부르다"라는 말이 나온다. 화신이라는 중국역사상 최대의 탐관은 가경제에게 처리된 것이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가경이 화신을 처리한 것은 무슨 탐관오리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권력투쟁의 필요때문이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부하의 부정부패는 오히려 지도자를 안심시킨다. 이는 중국고대 관료사회에서 아랫사람을 다루는 '잠규칙' '암규칙'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명나라때 부패척결의 목소리가 높을 수록 부패는 심해졌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지도자가 부하를 다루는 것은 두 가지 수단이다. 하나는 회유로서, 금전과 관직, 미색을 쓴다. 둘째는 약점을 잡는다. 탐관오리는 뇌물문제가 있다. 혹은 사생활의 문제가 있다. 재물도 좋아하지 않고, 여색도 좋아하지 않으면 윗사람이 안심할까? 다루기 힘들어서 겁을 내든, 아니면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할까봐 겁을 내든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부하가 재물을 탐해야, 상사는 안심하는 법이다.
이제, 가정제가 왜 탐관오리 엄숭을 중용했는지는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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